비애의 여인을 이르는 이름 고리슬라바(Горислава)를 품고 살아야 했던 로그네다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키예프(키이우) 대공국 수장이었던 남편 블라디미르 1세 암살에 실패 후 어린 아들 이지아 슬라프(977~1001)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머니를 지켜 목숨을 건졌다. 이후 어머니와 동생 야로슬라프는 오늘날 벨라루스 도시 자슬라웨로 추방되었다. 이어 988년 어머니의 아픔을 품은 폴로츠크 공국을 자치령으로 물려받아 어린 이지아 슬라프를 대신하여 어머니 로그네다(960~1000)가 섭정하였다.
폴로츠크 공국의 부흥을 위하여 헌신한 로그네다는 이지아 슬라프가 20살이 되었던 997년 섭정에서 물러나 수녀 아나스타샤가 되어 수도원에서 생활하다가 밀레니엄의 해 1000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해 1001년 큰아들 이지아 슬라프(977~1001)도 스물 세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러 연대기는 짧은 삶을 살다간 그에 대하여 온유한 인격과 자비로운 성품의 인물로 전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여러 부인 이외에도 각 도시에 집단으로 여인들을 두었던 제도를 시행한 여성 편력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 989년 동로마 황제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면서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 후 독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세례명은 바실리였다.
바실리(Василий)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을 지배하는 제우스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별명인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에서 유래하여 군주 또는 통치자를 뜻하였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임금들의 임금(βασιλεύς τῶν βασιλέων)으로 유대교에서 왕중왕의 왕(מֶלֶךְ מַלְכֵי הַמְּלָכִים)으로 전한 맥락이다.
성경 구약 예언서 에스겔 26장 7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최상의 염료 보랏빛의 도시 두로(Tire)에 대한 심판의 예언에서 바실리에 대한 의미가 잘 담겨 있다.
이는 로마 황제를 일컫는 칭호가 되어 라틴어 바실레프스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동방 일대에서 로마 황제는 바실레우스로 통용되었다. 이러한 세례명을 받았던 블라디미르 1세는 세례 후 천지개벽의 삶을 살았다.
병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음식물을 실은 수레를 키예프(키이우) 도시를 순회하게 하여 보살핀 일화 등 민중의 고단한 삶을 직접 헤아린 많은 기록의 역사를 남겼다. 991년에는 키예프(키이우) 스타로키예프스야 산으로 오르는 언덕에 최초의 석조건물 십일조 교회를 세웠다.
부인이었던 동로마 황제 여동생 안나(963~1011)가 1011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안나에게서 낳은 보리스(?~1015)와 글렙(990~1015)형제를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이에 아들 스뱌토폴크 1세(980~1019)의 반란이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또한, 노브고로드 공작이었던 라그네다의 아들 야로슬라프 1세(978~1054)는 조공을 거부하며 반발하였다.
1015년 블라디미르 1세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귀족들은 스뱌토폴크 1세를 석방해 대공에 오르게 하였다. 이후 스뱌토폴크 1세는 안나의 아들 보리스(?~1015)와 글렙(990~1015) 형제에 이어서 이복동생 오브루흐 공국의 스뱌토슬라프(988~1015)까지 살해하였다.
라그네다의 아들 야로슬라프 1세(978~1054)는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무참하게 형제들을 살해한 그를 응징하였다. 역사는 그에게 저주받은 뜻인 아카얀니(окая́нный) 스뱌토폴크 1세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야로슬라프 1세(978~1054)가 이끈 키예프(키이우) 대공국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의 업적은 그가 사용한 문장이 오늘날 우크라이나 국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역사가 증명한다. 나아가 키예프 대공국의 역사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로 나뉜 역사의 바탕으로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은 지대하다.
야로슬라프 1세는 1019년 스웨덴 최초의 기독교 군주인 국왕 올로프 솃코눙(989~1022)의 딸 잉에예르드 올로프스도테르(1001~1050)와 결혼하였다.
당시 국경을 맞대고 대립하던 노르웨이는 1017년 스웨덴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다. 이에 스웨덴은 나라의 주요 현안을 토의하는 웁살라 원로회의를 거쳐 2018년 노르웨이 왕자와 잉에예르드 공주의 결혼을 수락하였다. 당시 스웨덴은 역사의 도시 웁살라에서 매년 겨울 디스팅(Disting)이라는 축제와 함께 스웨덴의 모든 것(Thing of all Swedes)이라는 원로회의를 열어 나라의 현안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 국왕은 마음을 바꾸어 공주의 결혼 약속을 취소하고 많은 영토까지 지참하며 야로슬라프 1세에게 결혼시켰다. 그만큼 야로슬라프 1세의 지혜로움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잉에예르드는 결혼 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인 에이레네로 이름을 바꾸었다. 야로슬라프 1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의 뜻을 받들어 1037년 키예프(키이우)에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에 존재하는 오랜 역사의 소피아 대성당을 품은 뜻이었다. 또한, 최초의 대규모 도서관이 함께 세워졌다.
살펴 갈 내용은 당시 키예프(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우면서 에이레네 교회를 함께 세운 사실이다. 이는 러시아 최초의 수녀원이었던 사실과 함께 에이레네(잉에예르드) 대공비의 오랜 역사를 깊숙하게 헤아린 믿음이 근원이었다.
오늘날 튀르키예의 고도 이스탄불에 존재하는 그리스어의 하기야 대성당과 튀르키예어 아야 소피아 등으로 불리는 성소피아 대성당의 역사를 헤아리면 에이레네(잉에예르드) 대공비의 깊은 믿음을 살피게 한다.
330년 로마 제국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360년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가 건립되었다.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도시 중심의 대궁전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세워졌다. 그러나 404년 폭동이 일어나 근처의 원로원과 함께 불타버렸다.
살펴갈 내용은 당시 인근에 거룩한 평화를 의미하는 하기아 에이레네(Hagia Eirene) 교회가 존재한 사실이다. 이 교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하여 337년에 건설되어 위대한 교회 건립 이전 총대주교청 교회로 사용되었던 교회였다. 위대한 교회와 같은 울타리에 있었지만 404년 총대주교 박해 사건으로 인한 폭동 당시 위대한 교회가 불타버릴 때 하기아 에이레네 교회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던 사유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기회가 되면 살펴 가기로 한다.
동방 4대 교부였던 37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7~407)를 만나게 된다. 그의 히브리서 강해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난이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난하게 파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명은 완전한 자유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는 강합니다. 아무도 그에게 손해나 손상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온갖 어려움을 겪습니다. 종들, 황금, 재산, 일, 끝없는 욕심, 사회적 야심, 끝없을 필요와 같은 모든 것이 그를 억누르고 사로잡습니다)
세상은 그를 황금의 입으로 평가하였다. 당시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부인 아엘리아 에우독시아 황후는 눈엣가시와 같던 그를 404년 6월 20일 추방하였다. 성난 민중은 이름만 위대한 교회를 불태웠지만, 곁에 있었던 신성한 평화를 뜻하는 하기아 에이레네(Hagia Eirene) 교회는 온전하였다.
키예프(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세우면서 최초의 수녀원을 품은 에이레네 교회를 함께 세운 에이레네(잉에예르드) 대공비의 역사를 헤아린 깊은 믿음이 가슴을 걸어온다.
이어 러시아 역사에서 최초로 세워진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에 존재하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1051년 야로슬라프 1세 시대에 설립되었다. 키이우 동굴 수도원으로 불러온 수도원은 중세에서 근대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정신적 바탕이다. 나아가 동 슬라브족의 오랜 관습법을 성문화한 법전 루이스카야 프라우다(Russkaya Pravda)의 바탕을 일구어 바른 기틀을 세웠으며 성경의 슬라브어 번역으로 대중의 접근이 가능하게 하였다.
역사는 야로슬라프 1세에 대하여 어질고 총명한 사람이었다는 현자(賢者-му́дрый) 야로슬라프 1세로 기록하고 있다. 신성한 내조 에이레네(잉에예르드)(1001~1050) 대공비가 존재한 까닭이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re are not many records of Roganeda, who had to live with the name Г р а в а сл이르는, which is a woman of sorrow.
After the failed assassination of his husband Vladimir I, the head of the Grand Duchy of Kyiv, his young son Izzia Slaf (977-1001) saved his life by protecting his mother without fear of death. Since then, his mother and younger brother Yaroslav have been deported to the modern-day Belarusian city of Jaslawe. In 988, he inherited the Principality of Polotsk with his mother's pain as a self-governing decree, and his mother, Rogneda (960-1000), was regent on behalf of young Izzia Slaf.
Rogneda, who was dedicated to the revival of the principality of polotsk, retired from regency in 997 when Izzia Slaf turned 20 and became an anastasia, a nun, and lived in a monastery before dying in the millennium year 1000. In 1001 the following year, her eldest son, Ijia Slaf (977-1001), also died at the young age of 23. Several chronicles conveyed him as a character with a gentle personality and a merciful character after living a short life.
In addition to his many wives, Vladimir I was a person who left a female bias in implementing a system that had women in groups in each city. However, he was baptized and married to Anna, the younger sister of the Eastern Roman emperor, in 989, and after declaring the Orthodox Church as the state religion, he lived a devout Christian life. His baptismal name was Vasily.
The Bible's Old Testament prophecy, Ezekiel 26:7 (The LORD said, "I will have King Nebuchadnezzar of Babel come from the north with horses, chariots, cavalry, army and a large group of people, and attack Duro.) The meaning of Vasily is well contained in the prophecy of the judge of the best dye purple city on the Mediterranean coast, Tire.
It became a title referring to the Roman emperor and was also used as the Latin Vasileps, but in the East, the Roman emperor was commonly referred to as Vasileus. Vladimir I, who received this baptismal name, lived a life of heaven and earth after baptism.
For the sick and underprivileged, he has left a lot of records that directly understand the hard lives of the people, such as anecdotes of touring the city of Kyiv (Kiiv) and taking care of them. In 991, the first stone building, the eleventh-day church, was built on a hill climbing to the Starokyepsya mountain in Kyiv (Kyiv).
When his wife, the younger sister of the Eastern Roman emperor Anna (963-1011), died in 1011, he considered Boris (?-1015) and Gleb (990-1015) brothers born to Anna as successors. As a result, the rebellion of his son Svyatopolk I (980-1019) was discovered and imprisoned. Also, Jaroslav I (978-1054), son of Ragneda, Duke of Novgorod, refused to pay tribute and protested.
When Vladimir I died of illness in 1015, the nobles released Svyatopol I and sent him to the Grand Duke. Subsequently, Svyatopolk I killed his half-brother Svyatoslav (988-1015) of the Principality of Obruch, following Anna's sons Boris (?-1015) and Gleb (990-1015).
Since then, the Grand Duchy of Kyiv (Kyiv) led by Yaroslav I (978-1054) has reached its prime. His achievements are evidenced by the history of the sentence he used today as the head of Ukraine. Furthermore, the history of the Grand Duchy of Kyiv is based on the history divided into Ukraine and Russia today, and Russia has great respect for him.
Yaroslav I married Inyerd Olofsdoter (1001–1050), daughter of King Olof Shetconung (989–1022), the first Christian monarch of Sweden, in 1019.
Norway, which was at the time at the border, proposed a marriage alliance to Sweden in 1017. In response, Sweden accepted the marriage of the Prince of Norway and Princess Inyerde in 2018 after a Uppsala senior meeting to discuss major issues in the country. At that time, Sweden held a senior meeting called The Thing of all Swedes every winter in the historical city of Uppsala to deal with the country's current issues.
However, the Swedish king changed his mind and canceled the princess' wedding appointment, brought many territories, and married Jaroslav I. As such, Jaroslav I's wisdom was widely known.
After her marriage, Inyerard changed her name to Eilene, the goddess of peace in Greek mythology. Yaroslav I founded Saint Sophia Cathedral in Kyiv in 1037, following her will as a devout Christian. It meant the long-standing Sophia Cathedral in Constantinople. Also, the first large-scale library was built together.
What we will look at is the fact that the Eirene Church was established together while establishing Saint Sophia Cathedral in Kyiv (Kiiv) at the time. This was based on the belief that it was the first convent in Russia and deeply understood the long history of the Grand Duke of Eilene (Inejerd).
Looking at the history of the Greek Cathedral of Hagiya in Istanbul, the capital of Turkiye today, and the Cathedral of Saint Sophia, called Turkiyere Aya Sophia, let us examine the deep faith of the Archduke Eirené.
After the Roman capital was moved to Constantinople in 330, the Great Church (Με γαη Ἐκκλλ ησι ́α)360ᄂᅀᅀᅵᆫ) was founded by Constantine II in 360. The church was built on a hill not far from the Grand Palace in the center of the city of Constantinople. But in 404, a riot broke out and burned down with a nearby senate.
What we will look at is the fact that Hagia Eirene Church, which means holy peace, existed nearby at the time. It was built in 337 by Roman Emperor Constantine I and used as the Patriarchal Church before the construction of the great church. Although it was on the same fence as the great church, not many people know why the church of Hagia Eireannes remained intact when the great church was burned down during the riot caused by the persecution of the patriarch in 404. I'll look at it when I get the chance.
He met Johann Christomus (347–407), the 37th Patriarch of Constantinople, who was the 4th Governor of the East. His Hebrew strength is strong, and the main contents are as follows.
(If poverty were to deprive you of your freedom to speak, Christ would not have sent his disciples in poverty. Because their mission is to speak with complete freedom. The poor are strong. Because no one can do any damage or damage to him. But the rich go through all kinds of difficulties. The bells, the gold, the wealth, the work, the endless greed, the social ambition, the endless need, everything stifles and captivates him.)
The world judged him as the mouth of gold. At that time, Empress Aelia Eudoxia, wife of the Eastern Roman emperor Arcadius, expelled him on June 20, 404, as if he were an eyesore. The angry people burned the great church only in its name, but the Hagia Eirene church, which meant sacred peace, remained intact.
The deep faith in the history of the Grand Duke of Eirené (Inejerd) who built the first convent together while building the Hagia Sophia Cathedral in Kyiv (Kiiv).
The Pechersk Monastery, which is located in Kyiv (Kyiv), Ukraine, which was the first in Russian history, was established in 1051 during the era of Yaroslav I. The monastery, which was called the Kyiv Cave Monastery, is the spiritual foundation of Russia and Ukraine from the Middle Ages to modern times. Furthermore, it built a correct foundation based on the code "Russkaya Pravda," which codified the old common law of the East Slavic people, and made it accessible to the public through the Slavic translation of the Bible.
History records Yaroslav I as a sage (賢 - му дрыи ̆) who was a dim and intelligent person. This is why there is an anti-aircraft monument of the sacred Naejo Eilene (Inyerard) (1001-1050). artwww@naver.com
Author: Lee Il Young
the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a column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