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지금이야 한족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살고 있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중화권에선 큰 관심을 주지 않던 사실상 불모지였다. 대만 섬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대만은 원래 한족이 아닌 대만 원주민들이 중세까지 살던 섬으로, 한족이 본격적으로 들어온건 명청 교체기 시기 정성공 때가 거의 최초였다.
물론 직전엔 스페인, 네덜란드 서구 세력의 지배도 잠깐 받았고, 이후 청나라의 지배도 받았지만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대만을 넘겨주면서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여년의 대만일치시기가 도래한다. 이후 대만은 일제 총독부 아래 근대화가 이뤄졌고 역사에서 보듯 애초 독립국이라는 인식이 희박했던 대만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거부감도 타 국가들 대비 덜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했다는거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대만 민주국이나 타파니 사건(1915년), 우서 사건(1930년) 등 이시기에도 대만독립운동이나 항일 저항은 꾸준히 있었다.
이에 따른 일제의 대만인 학살과 탄압이 존재했다. 통치 초기 첫 5년 동안에 사형된 대만 주민만 3천여 명이었는데, 이는 약탈, 살인은 물론 건물이나 표지를 손상한 자 또는 미수에 그친 사람이라도 범죄자는 사형이라는 악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처음부터 저항하는 세력은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타파니 사건 당시 수백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우서 사건 당시 저항 운동의 중심에 있던 대만 원주민 시디그 족은 일제에 학살당해 2012년 기준으로도 대만에서 겨우 8천 명 정도만 존속되어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일본은 지금도 싫어한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대만도 일제에 의해 징병, 수탈을 당하는데, 이 와중에도 친일 세력은 있었다.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에게 현지인들 중 일부는 따라가길 요청했다고 한다. 물론 직후 장개석이 들어오자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는 말이 대만에서 유행했다는걸 보면 당시에도 일본이 떠나고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양면적인 시각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군인 총독이 주도하는 억압적인 통치를 주로 행한 조선과는 다르게 민간 출신 각료가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통치를 했기 때문에 대만은 일본에 대해 대체적으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대만과 조선의 역사적 맥락에서 타국의 식민지 지배가 갖는 의미의 차이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만을 중국의 일부가 아닌 별개로 놓고 본다면 대만 섬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전엔 원주민 부족 국가 수준이었고, 유럽인들 중에선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이 섬을 발견해 1600년대 가서야 네덜란드인들과 스페인인들의 치하에 놓였다.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로서 세운 정씨 왕국이 단명한 이후로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 청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후에 일제가 오고, 그 다음에는 국민정부 때 본토에서 외성인이라는 자들이 건너온 것이다. 즉, 본성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은 수많은 지배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한국은 일제강점기를 제외하면 외세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대만 입장에서는 일제 시절 역시 그동안 겪어온 식민지 시절 중 하나였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는 반면, 한국은 비교 대상이 그동안 거의 없었다보니 최악의 식민을 당한 역사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민간 정치인들은 식민지에서 행정, 입법, 사법권을 모두 가진 채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천황 직속의 총독부와 총독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20년에는 총독의 권한이였던 대만군 지휘권이 대만군 사령관에 이양된 이후,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달리 실제로 문관 총독이 임명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기운이 퍼져가던 1930년대 이전까진 이런 문관 총독들이 주로 대만 섬을 통치했다. 또한 이 때 집권한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주창하여 일본 법률이 대만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대만 총독의 법령 제정 권한을 크게 제한했다.
한편으로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일으킨 피지배민족의 민족운동을 계기로 대만총독부는 내대융합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등의 구호를 내세워 그 전까지 대만인에게 적용된 차별적인 정책들을 철폐하고, 대만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우한다고 선전하며 그 전까지 일본인만 다닐 수 있던 학교에 대만인의 입학을 허락하고 대북제국대학을 세우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물론 조선이 그랬듯 그것이 사회 전반의 차별을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근대적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대만에서는 여러 사회 운동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사회 운동은 대부분 대만인들에게 교육을 보급하는 것이거나실력양성운동 그들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1921년부터 전개된 대만의회설립운동(臺灣議會設置運動) 등이 있다. 1936년부터는 대만총독부에 군인 출신 총독이 다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전선확대로 인해 이뤄진 조치였다. 고바야시 세이조, 하세가와 기요시, 안도 리키치(安藤利吉) 모두 무관 출신이였다. 또 이즈음부터 황민화 정책이 시작되어 국어운동을 통해 철저하게 일본어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만어, 대만 원주민 언어, 객가어 사용을 탄압하고 금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만의 종교와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한족들을 병사로 뽑는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던 일본 제국은 병력 부족을 느끼게 되자 대만에서도 징병을 하였다.
군속을 포함한 약 21만 명의 대만인들이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되었으며, 그 중 3만 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결국 일본 제국은 점점 연합군에 밀리기 시작했고, 타이베이, 가오슝 등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의 항복선언(포츠담 선언 수락)으로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함에 따라 식민지배도 종료되었다.
9월 2일에는 일본 정부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GHQ의 명령에 따라 대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는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는 중화민국에 항복하였다. 10월 15일부터 국민혁명군이 대만 섬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10월 25일에 안도 리키치가 중화민국의 대만 행정장관 천이에게 항복문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대만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story of Japan's rule over Taiwan
-Jeong Gil-seon, columnist
Taiwan is now home to a large number of Han Chinese, making up the absolute majority, but until the Middle Ages, it was virtually a barren land that did not receive much attention in the Greater China region. As you can see from the history of the island of Taiwan, Taiwan was originally an island where Taiwanese indigenous people, not the Han Chinese, lived until the Middle Ages, and the first time the Han Chinese arrived in earnest was during the period of the Ming and Qing transitions.
Of course, just before that, it was briefly ruled by Western powers such as Spain and the Netherlands, and later it was ruled by the Qing Dynasty, but the Qing Dynasty, which lost in the Sino-Japanese War, handed over Taiwan to Japan through the Treaty of Shimonoseki, leading to a 50-year period of Taiwan unity from 1895 to 1945. do. Afterwards, Taiwan was modernized under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and as history shows, Taiwan, which had little recognition as an independent country in the first place, had less resistance to Japanese colonial rule than other countries.
However, just because there was relatively less resistance did not mean that there was no resistance at all. Even during this period, such as the Taiwan Democratic State, the Tapani incident (1915), and the Wuseo incident (1930), the Taiw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nti-Japanese resistance continued.
As a result, there was massacre and oppression of Taiwanese people by Japan. In the first five years of his reign, there were about 3,000 Taiwanese residents executed, and this was because there was an evil law that sentenced criminals to death, even those who looted, murdered, damaged buildings or signs, or even attempted an attempt. The forces that resisted so thoroughly from the beginning have dried up the seed. Afterwards, hundreds of people were sentenced to death during the Tapani incident, and the Taiwanese indigenous Sidig people, who were at the center of the resistance movement during the Wuseo incident, were massacred by the Japanese, and as of 2012, only about 8,000 people remain in Taiwan.
That's why they say they still hate Japan. The Pacific War broke out and Taiwan was conscripted and exploited by Japan. Even during this time, there were pro-Japanese forces. It is said that some of the locals asked the Japanese to return to Japan after their defeat in the war. Of course, looking at the fact that the saying 'the dog left and the pig came' became popular in Taiwan shortly after Chiang Kai-shek came in, it appears that there was an ambivalent view of Japan leaving and the Chiang Kai-shek Kuomintang government coming in at that time.
However, unlike Joseon, which mainly enforced repressive rule led by military governors, Taiwan had generally good feelings toward Japan because civilian ministers ruled relatively moderately.
It is important to note the difference in meaning of another country's colonial rule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aiwan and Joseon. If we consider Taiwan as a separate entity rather than a part of China, the island has almost never existed as an independent country. Previously, it was at the level of an indigenous tribal nation, and among Europeans, the Portuguese were the first to discover the island and it was not until the 1600s that it came under the rule of the Dutch and Spanish.
After the short-lived Jeong kingdom established by Jeong Seong-gong as a base for anti-Qing restoration, it became Qing territory under the rule of the Qing dynasty. After that, the Japanese came, and then during the Nationalist government, people called outsiders came from the mainland. It came across. In other word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original people, Japan may be just one of many rulers. On the other hand, Korea has rarely been ruled by foreign powers excep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rom Taiwan's perspective, the Japanese colonial era can be considered just one of the colonial times it has experienced, while Korea's history of colonialism seems to have been the worst since there were few comparisons. Japanese civilian politicians did not look favorably o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and the governor-general directly under the emperor, who wielded absolute power and held all administrative, legislative, and judicial powers in the colonies.
As a result, in 1920, the authority to command the Taiwan Army, which had been the authority of the Governor-General, was transferred to the Commander-in-Chief of the Taiwan Army, and it became possible to appoint a civil servant as the Governor-General. Accordingly, unlike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 civil servant governor was actually appointed. So, until the 1930s, when the spirit of war was spreading, these civil servant governors mainly ruled the island of Taiwan. In addition, the Takashi Hara cabinet, who took power at this time, advocated the principle of internal expansion and allowed Japanese laws to apply to Taiwan, greatly limiting the power of the Taiwanese governor to enact laws.
On the other hand, with the national movement of the subjugated peoples triggered by Woodrow Wilson's national self-determinationism, the Taiwan Governor-General abolished the discriminatory policies that had been applied to Taiwanese until then, under slogans such as internal unity, internal unity, and temporary unity. Propaganda that it would treat the Chinese and Japanese equally, took measures such as allowing Taiwanese to enroll in schools where only Japanese could attend until then, and establishing the Taipei Imperial University.
Of course, as in Joseon, it did not eliminate discrimination throughout society. Meanwhile, as Taiwanese people who received modern education under the Japanese colonial system became active, various social movements became active in Taiwan during this period. Most of these social movements were aimed at disseminating education to Taiwanese people or promoting skills development and their rights.
For example, there is the movement to establish a Taiwanese parliament that has been underway since 1921. From 1936, military-turned-governors began to be appointed again to the Governor-General of Taiwan. This was a measure taken due to Japan's reckless expansion of the front line. Seizo Kobayashi, Kiyoshi Hasegawa, and Rikichi Ando were all military officers. Also, from around this time, the policy of denationalization began and the Japanese language was thoroughly used through the Korean Language Movement, and in the process, the use of Taiwanese, Taiwanese indigenous languages, and Hakka were suppressed and banned.
Work was also carried out to change Taiwanese religion and customs to Japanese style. In particular,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broke out during this period, and the Empire of Japan, which had previously opposed recruiting Taiwanese Han Chinese as soldiers, felt a shortage of troops and conscripted Taiwanese troops as well.
Approximately 210,000 Taiwanese, including military personnel, were sent to the Southeast Asian front, and 30,000 of them were killed. However, eventually the Japanese Empire began to fall behind the Allied Forces, and Taipei and Kaohsiung were bombed by the U.S. military. On August 15, 1945, Japan lost the war with Hirohito's declaration of surrender (acceptance of the Potsdam Declaration), ending colonial rule.
On September 2, the Japanese government signed a document of surrender to the Allied Powers, and under orders from GHQ, Taiwan Governor Rikichi Ando, who commanded the Japanese troops stationed on the island, surrendered to the Republic of China. From October 15, the National Revolutionary Army began to advance on the island of Taiwan, and on October 25, Ando Rikichi delivered a document of surrender to Taiwanese Chief Executive Chen Yi of the Republic of China, officially ending Japanese rule over Taiwan.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