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모스크바 대공국의 산업 경제 부분을 담당했던 전형적인 슬라브 족의 가문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15세기 말부터 러시아 문헌에 등장하였고 이들은 그때부터 볼가 강 동부 지역에 대한 개발권을 취득하고 있었다. 물론 다량의 원시 농업 수준이 높아져 농업으로 생산량을 극대화시켰던 가문이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우랄 산맥 서부의 광산을 개발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바실리 3세의 명령에 의해서 볼가 강 동부 지역의 지리와 천연자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530년대에 우랄 산맥 일대에 대한 자원 조사를 시도하여 이 지역에 대단위의 금과 은(銀) 및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개발을 건의했고 바실리 3세는 이를 허가하여 많은 죄수와 노예들을 보내 노역을 시켰으며, 후에는 산맥 내 굴에서 사금을 채굴하는 작업도 행해졌다.
그러면서 축적한 경제력으로 제법 화려한 궁정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광산 개발의 도중에 시비르 칸국의 군사들이 광산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을 습격하여 광산업에 큰 차질이 생겼다. 그리고 야로슬라블 일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로 시비르 칸국의 타타르 기병들이 광산 노동자들이 사는 우랄 정착촌을 습격하여 약탈을 일삼은 것이었다. 기동성이 빠른 타타르 족들의 약탈은 스트로가노프 가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분개한 스트로가노프는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시비르 칸국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여 이에 대한 허가를 받았고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러시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우랄 산맥에 무려 16개의 요새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1560~1570년 사이에 시비르 타타르 족의 침략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이반 4세에 요청하여 다수의 코사크 인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들 코사크 인들은 타타르와 투르크의 혈통들로 매우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들 중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볼가 강 일대를 노략질하던 코사크의 수령이었는데 매우 용맹한 인물이었다.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만나 우랄 산맥 일대를 수비하고 시비르 칸국과 더불어 시베리아 일대를 점령한다면 사면 뿐 아니라 코사크 인들에게 시베리아의 영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는 승낙 했고 그들은 우선 사면 받은 상태에서 우랄 산맥의 요새들에 배치되었다. 코사크 인들이 우랄 지역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쿠춤 칸은 약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우랄 요새 중 하나인 니즈니 타길(Нижний Тагил)을 공격했다. 이는 전폭적인 시비르 군의 러시아 공략이 아니라, 코사크 군의 전투력이 어떤지에 대해 시험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에 예르마크는 불과 2천의 군대를 주둔시켜 시비르 군에 대항했다. 당시 니즈니 타길의 수성전은 예르마크 시베리아 정복의 시발점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전투를 예르마크가 승리함으로써 시비르 칸국을 비롯한 시베리아 민족들의 전투력 또한 시험했었기 때문이다. 저비용 고효율적인 전투를 벌이며 정복할 것인지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 국운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 할지를 니즈니 타길에서 결정했던 것이다. 그 무렵 볼가 강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코사크 족 무리들 중 1,300여 명이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수장인 예르마크 티모페에비치와 이반 콜트소가 토벌되어 정부에 포로가 되었어도 이들이 이끌던 해적들과는 다른 집단의 해적들이었던 것이다. 우선 우랄 지역은 삼림이 울창하고 볼가 강 지역은 평야들이 많았다. 그러한 지형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었기 때문에 이들 해적들의 약탈이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르마크가 이들을 설득했고 볼가 강의 해적 집단인 모든 코사크 인들이 마침내 예르마크의 휘하에 들어왔다. 이들 부족의 수장은 로만 그랴노프(Roman Grianov)로 코사크 족 한 분파의 족장인 헤트만(Hetman)의 직위에 있었고, 볼가 강 중류 일대에서 4~5개 부족이 그를 추종하고 있었다.
그 중 이반 콜트소의 종족들은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는 노가이(Nogai) 칸국을 공격한 죄목으로 인하여 러시아 왕실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그의 부족들은 로만 그랴노프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예르마크와 콜트소는 그랴노프를 설득하여 이교도이자 무슬림인 시비르 칸국과의 전쟁에 동참하면 차르의 용서를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고, 그랴노프의 코사크 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예르마크에 대해 객관적 사료는 현재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러시아의 민담이나 민요, 민화 등에 아주 많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후대의 사람이 구술로 전해져 오는 내용들이 많아 사료적인 부분에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르마크는 러시아를 오늘날 세계 최대 영토의 국가로 만들어준 인물이었고 그의 통솔력과 지도력이 매우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모든 코사크 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며 서로 반목하고 있었던 코사크 인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랴노프는 볼가 강 중류에서 시비르 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공격했고 포위된 시비르 군과 쿠춤 칸은 간신히 탈출하여 수도인 토볼스크로 도주했다.
이로 인하여 예르마크와 코사크 인들은 타타르 족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578년 말,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에 휘하의 코사크 기병대들의 처우에 대하여 타타르 족에 대한 약탈과 화포, 식량, 화승총을 제공을 조건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는 그가 거느리고 있는 코사크 집단이 최소한의 무장과 생존 보장을 위해 내세운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약속이었으며 그러한 스트로가노프와 차르인 이반 4세의 큰 결정이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스트로가노프는 이러한 예르마크의 조건에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물론 상인으로써 지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첫째로는 군사 무기에 대해서는 그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둘째로는 이들이 배신하여 역으로 러시아를 공격할 때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코사크 인들의 신뢰성이 약했고 그로 인하여 이반 4세의 크레믈린에서는 코사크 인들의 활용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그에 수많은 공후들이 반발하고 있었고 특히 코사크 인들의 약탈의 피해를 입은 공후들은 오히려 이들이 러시아에 해가 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르마크가 이와 같은 고민에 자신과 모든 코사크 인들의 혈서를 받아내어 러시아에 대한 충성을 결의하자 이에 스트로가노프는 직접 이반 4세와 대면하여 마침내 허가를 받아냈다. 스트로가노프는 자신의 가문과 목숨을 담보로 코사크 인들의 무장을 허용한 것이다. 비록 그 준비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예르마크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어렵게나마 이루어냈다. 이러한 그의 시베리아로의 동진은 이반 4세의 허가 하에서 이루어졌으나 젬스키소보루와 같은 각 공후 회의나 두마 각료 회의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상 이반 4세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아무리 절대 권력의 차르라고 해도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은 차르의 권위가 약화될 수 있는 부분이었고 무모한 모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험성을 극복하려면 무조건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이 성공해야만 했다. 이는 스트로가노프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실패했을 경우, 가장 먼저 책임을 받게 되어 있고 잘못하면 멸문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대해 무모하게 마구 주장할 예르마크는 아니었다. 그만큼 타타르 족을 철저하게 파악했고 군에 대한 훈련도 거의 완벽했다.
예르마크는 전략도 뛰어났고 신중했으며 모험심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예르마크는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1578년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의 영토인 카멘스크-우랄스키(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를 습격하여 약탈했다. 이는 시비르 타타르 족 군대의 수준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에 기습을 받은 카멘스크-우랄스키(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의 시비르 칸국 요새는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었다. 러시아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명망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영지로 바친 예르마크는 이제 어느 정도 시비르 칸국의 군사들을 파악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신중한 인물이었고 각 나라의 정보에도 밝은 유능한 지도자였다. 우선 예르마크는 시비르 타타르 족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주변의 네네츠 족, 한티 족, 만시 족 등의 시베리아 북부 타이가 종족들을 회유했다. 이들에게 공통의 적인 타타르 족을 몰아내고 시베리아 지역의 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이들을 러시아 측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타타르 족의 이간책도 필수적인 전략 중 하나였다.
러시아 정부의 식량 지원을 약속하고 북방 타이가 원주민들에게 우랄 지역을 통솔하는 스트로가노프 가문과 야로슬라블 대공, 블라디미르 대공의 협조 아래 식량들을 직접 지원하며 모피들을 가져가니 타이가 원주민들은 대대적으로 러시아에게 협조하고 지배하고 있던 타타르의 군 기지들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모든 준비가 끝난 예르마크는 코사크 부족의 부족장들 5명을 아타만(Aтаман)으로 삼고 코사크 정예 기병 500여명과 당시 이반 4세가 국책 사업으로 벌이던 리보니아 전쟁 도중에 포로로 잡은 독일기사단의 군사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포로 300여 명을 동원하여 1579년 2월,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칸국을 침공했다. 우랄 산맥 서쪽에 광대한 영지를 확보하며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 일대를 약탈했던 코사크 족은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 동진하여 오늘날 예카테린부르크를 침공하여 단 2시간 만에 예카테린부르크를 장악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에 사절을 보내 이곳 일대에서 모피 무역거래를 할 수 있게 허락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승낙을 받는다. 단 스트로가노프의 윤허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모피 교역으로 군자금을 벌어 시베리아 원정을 지속하라는 것이다.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금도, 병력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이는 젬스키소보루나 두마 회의에서 허가 받은 것이 아닌 이반 4세의 단독 결정이었고 스트로가노프 가문 또한 수많은 공후들의 견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타타르를 제압하고 시베리아를 장악하는데 있어 모든 물자를 현지의 약탈과 교역으로 조달해야 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와 그의 부대에게 현지에서 얻은 물품들을 모두 승전의 대가로 주면서, 당시 우랄 산맥 건너 오비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벌하는 일을 일임했다. 게다가 코사크 군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를 맡기고 군의 통솔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부분의 양면에는 만약에 잘못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성공하면 이반 4세와 스트로가노프의 절대적인 입지 강화와 더불어 이반 4세는 그의 통치권을 완전히 굳히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대신 러시아 정부에서 대포와 식량, 화승총 등 전쟁물자 일체의 보급들을 제공하긴 했지만 전선이 넓어지면서 보급의 현지 조율은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러시아는 광대한 시베리아를 서서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는 서구 열강 제국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고 약탈과 침탈이 아닌 합병정책으로 광대한 시베리아를 확보해나갔다. 그러나 중앙아시아는 달랐는데 이는 시베리아보다 더 강력한 중앙정권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Stroganov, a wealthy mining family in the Ural Mountains of Russia
-Jeong Gil-seon, columnist
Nothing is exactly known about how the Stroganov family came into existence. However, there is no doubt that it is a typical Slavic family that was in charge of the industrial economy of the Grand Duchy of Moscow. The Stroganov family has appeared in Russian literature since the late 15th century, and since then they have been acquiring development rights to the area east of the Volga River. Of course, this was a family that maximized production through agriculture as the level of primitive agriculture increased. The Stroganov family of the Moscow Principality was making enormous profits by developing mines in the western Ural Mountains. In the 16th century, the Stroganov family under the orders of Vasily III conducted a survey of the geography and natural resources of the region east of the Volga River. In the 1530s, an attempt was made to survey the Ural Mountains for resources, and it was confirmed that there were large deposits of gold, silver, and iron ore in this area. Accordingly, the Stroganov family proposed development, and Vasily III approved it and sent many prisoners and slaves to work. Later, gold panning was also carried out in oysters within the mountain range.
Meanwhile, with the economic power he had accumulated, he was able to build a fairly splendid palace. However, during the development of the mine, the soldiers of Sivir Khanate attacked the area where the mine workers lived, causing a major setback to the mining industry. And what happened while attacking and plundering the Yaroslavl area was that the Sivir Khanate's Tatar cavalry attacked the Ural settlements where mine workers lived and plundered them. The raids of the mobile Tatars inflicted great damage on the Stroganov family. Stroganov, who was indignant at this, requested and received permission from Ivan IV, the tsar at the time, to subdue the Sivir Khanate, and the Stroganov family installed as many as 16 fortresses in the Ural Mountains with the support of the Russian army. However, between 1560 and 1570, the Sivir Tatar invasions became more severe. Accordingly, Stroganov requested Ivan IV to accept a large number of Cossacks. These Cossacks were of Tatar and Turkish descent and had very strong fighting skills.
Of course, among them, Yermak Timofeevich was the leader of the Cossacks who plundered the Volga River area and was a very brave man. Accordingly, Stroganov met with Yermak Timofeevich and offered not only amnesty but also the territory of Siberia to the Cossacks if they defended the Ural Mountains and occupied the Siberian area along with the Sivir Khanate. Yermak Timofeevich agreed, and they were first granted amnesty and placed in fortresses in the Ural Mountains. Kuchum Khan, who heard that the Cossacks were deployed in the Ural region, led an army of about 10,000 men and attacked Nizhny Tagil (Нижний Тагил), one of the Ural fortresses. This was not a full-scale invasion of Russia by the Sivir army, but was more in the nature of testing the combat power of the Cossack army. Accordingly, Yermak stationed only 2,000 troops to oppose Sivir's army. At that time, it is reasonable to view the Nizhny Tagil water battle as the starting point of Yermak's conquest of Siberia.
This is because Yermak's victory in this battle also tested the fighting power of the Siberian peoples, including the Sivir Khanate. It was at Nizhny Tagil that a decision was made whether to conquer through low-cost, high-efficiency battles or to risk the fortunes of the country by mobilizing a large army. At that time, about 1,300 of the Cossacks who were pirates along the Volga River were still present. Even though the leaders, Yermak Timofeevich and Ivan Koltso, were subdued and taken prisoner by the government, they were a different group of pirates than the pirates they led. First of all, the Ural region was densely forested, and the Volga River region had many plains. Because the village was formed around such a geographical area, plunder by these pirates was easily carried out. However, Yermak persuaded them, and all the Cossacks, a group of pirates on the Volga River, finally came under Yermak's command. The head of these tribes was Roman Grianov, who held the position of Hetman, the chief of a branch of the Cossacks, and four to five tribes followed him in the middle Volga River area.
Among them, Ivan Koltso's tribe had been sentenced to death by the Russian royal family for attacking the Nogai Khanate, which was allied with Russia, and his tribesmen were under the control of Roman Gryanov. In response, Yermak and Koltso persuaded Gryanov and offered him a chance to receive the Tsar's forgiveness if he joined the war against the pagan and Muslim Sivir Khanate, and Gryanov's Cossacks accepted. Although there is currently little objective historical information about Yermak, he appears as a legendary figure who appears in many Russian folk tales, folk songs, and folk tales. Although the historical records are not accurate as many of the information is passed down orally by later generations, Yermak was a person who made Russia into the country with the largest territory in the world today, and his commanding and leadership skills seem to have been outstanding. The influence he had on all Cossacks resulted in uniting the Cossacks who were divided into various tribes and were at odds with each other. Gryanov blocked the Sivir army's retreat route in the middle Volga River and attacked its rear, and the surrounded Sivir army and Kuchum Khan barely escaped and fled to the capital, Tobolsk.
This gave Yermak and the Cossacks some confidence in the Tatars. At the end of 1578, Yermak made a condition for the treatment of the Cossack cavalry under Stroganov by plundering the Tatars and providing artillery, food, and matchlocks. This was the first promise in Russian history made by his Cossack group to ensure minimum armament and survival, and the big decision of Stroganov and Tsar Ivan IV led to Russia's conquest of Siberia. It is said that at first Stroganov was quite hesitant about Yermak's conditions. Of course he had leadership as a merchant, but firstly military weapons were beyond his authority. Second, they could not bear responsibility if they betrayed and attacked Russia. At that time, the reliability of the Cossacks was weak in Russia, and as a result, the debate over the use of the Cossacks was intensifying in Ivan IV's Kremlin. Many princes were protesting against this, and especially those who had suffered damage from the Cossacks' plunder were emphasizing that they would be harmful to Russia.
However, when Yermak resolved to remain loyal to Russia by obtaining a blood oath from himself and all Cossacks, Stroganov personally met Ivan IV and finally received permission. Stroganov risked his family and his life to allow the Cossacks to arm themselves. Although the preparation process was not smooth, because permission was granted, Yermak made preparations to conquer Sivir Khanate, albeit with difficulty. His advance to Siberia was made with Ivan IV's permission, but was in fact an arbitrary decision of Ivan IV that was not made at the princely councils such as Zemsky Soboru or the Duma Council of Ministers. No matter how absolute power the tsar was, such an arbitrary decision could have weakened the tsar's authority and may have been a reckless risk. To overcome this danger, Yermak's conquest of Siberia had to succeed. This was the same for Stroganov. If you fail, you will be held accountable first, and if you do something wrong, you could be destroyed. But Yermak was not one to insist recklessly on these conditions. He knew the Tatars thoroughly and the training of his army was almost perfect.
Yermak was a man of great strategy, caution, and a great sense of adventure. Yermak crossed the Ural Mountains with 3,000 troops in 1578 and raided and plundered Kamensk-Uralsky (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 the territory of the Sivir Khanate. This was an experiment to check the level of the Sivir Tatar army and use an appropriate strategy. As a result, the Sivir Khanate fortress of Kamensk-Uralsky (Каменск-Уральский) was taken by surprise more easily than expected. Yermak, who donated the territory to the prestigious Stroganov family as a patron of Russian culture and art, was now able to understand the soldiers of Sivir Khanate to some extent. He was a cautious person and a capable leader who was well-versed in information about each country. First, in order to completely subdue the Sivir Tatars, Yermak appeased the surrounding taiga tribes of northern Siberia, such as the Nenets, Khanty, and Mansi. The idea was to drive out their common enemy, the Tatars, and achieve peace in the Siberian region. And he succeeded in attracting them to the Russian side more easily than expected. Separation between the Siberian natives and the Tatars was also an essential strategy.
The Russian government promised food support, and with the cooperation of the Stroganov family, which controls the Ural region, the Grand Dukes Yaroslavl, and the Grand Dukes Vladimir, they directly provided food and took furs to the northern taiga natives, so the taiga natives fled to Russia in large numbers. They began raiding the Tatar military bases that were cooperating with and under their control. Thus, after completing all preparations, Yermak appointed five Cossack tribal chiefs as ataman (Aтаман) and took over 500 elite Cossack cavalrymen and soldiers of the German Knights captured during the Livonian War, which was a national project of Ivan IV at the time. , and mobilized about 300 prisoners from the Duchy of Poland and Lithuania and finally crossed the Ural Mountains to invade the Sivir Khanate in February 1579. The Cossacks, who had secured vast territories west of the Ural Mountains and plundered the Volga and Dnieper rivers, finally crossed the Ural Mountains and invaded present-day Yekaterinburg, taking control of Yekaterinburg in just two hours. Yermak, who controlled this area, sent an envoy to Stroganov to request permission to conduct fur trade in the area and received approval. However, there was a proviso attached to Stroganov's license. The plan was to raise military funds through the fur trade in Yekaterinburg and continue the Siberian expedition.
Yermak's Cossacks could receive neither funds nor troops from the Russian government. This was Ivan IV's sole decision, not approved by the Zemsky Soboru or Duma meetings, and the Stroganov family also feared the checks of numerous princes. In the end, Yermak's Cossacks had to procure all supplies through local plunder and trade in order to subdue the Tatars and take control of Siberia. Stroganov gave Ermak and his troops all the locally acquired goods as compensation for victory and tasked them with conquering the Sivir Khanate, which at the time controlled the Ob River basin across the Ural Mountains. Moreover, he left independent command of the Cossack army and did not interfere in any way with its command. Of course, both sides of this also had the meaning of avoiding responsibility even if something went wrong. If successful, it would strengthen the absolute position of Ivan IV and Stroganov and secure political legitimacy that would completely solidify his rule. Instead, the Russian government provided supplies of all war materials, including cannons, food, and matchlocks, but as the front line expanded, local coordination of supplies was left to its own devices.
In this way, Russia was able to gradually take over vast Siberia as its own territory. This was a completely different approach from the imperialism of Western powers, and a vast area of Siberia was secured through a policy of annexation rather than plunder and invasion. However, Central Asia was different because it had a more powerful central government than Siberia.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