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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의 독립 과정

정길선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2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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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정길선 박사     ©브레이크뉴스

소련 발트 해 연안의 3국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1990년 9월 6일에 전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소련의 장래를 결정했던 중요한 사건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 애초에 리투아니아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나 예상보다 앞당겨 독립을 실시한 이유는 9월 12일에 소집할 예정이었던 소련 최고 회의에서 리투아니아에 독립에 대한 움직임에 모종의 조치가 생겼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의회는 1990년 선거에서 총 141개의 의석 중에 130석만 확정되었을 뿐, 11석 자체는 미정인 상태로 1990년의 독립 선언은 의회가 완전히 구성되기도 전에 급히 감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련 최고 회의는 9월 12일의 회의에서 최고 회의 의장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등 연방 탈퇴 움직임에 대해 비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안을 심의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은 법적으로 1918년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을 재확인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에 앞서 1990년 5월과 8월, 1940년 소련의 리투아니아 합병과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무효화를 각각 선언함으로써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속한 원인을 무효화시키는 방법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1991년 8월 말, 소련 최고 회의에서 결정된 연방 이탈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 소련 최고 회의는 그 동안 소련 헌법의 미비점인 연방 탈퇴를 법적으로 보완한다는 명분으로 연방 이탈법을 제정했다. 

 

연방 이탈을 공화국 단계와 연방 단계의 두 가지 단계로 나누고 각 과정에 여러 독소조항을 마련하여 사실상 연방 이탈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이와 함께 종래의 국명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투아니아 공화국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삭제했다. 그리고 의회의 심의결과 만장일치로 리투아니아 공화국 변경건이 통과되면서 리투아니아 공화국이라는 국명을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최고 위원 회의장에 사상 최초로 비(非) 공산당원인 사유디스 지도자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Vytautas Landsbergis)를 선출했다.

 

그동안 리투아니아의 분리ㆍ독립 운동을 주도해 왔던 공산당 제1 서기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Algirdas Brazauskas)는 그의 점진적인 연방 이탈론이 의원들의 지지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 최고 위원회 의장직에서 탈락하게 된다. 브라자우스카스는 1989년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소련 공산당으로부터의 분리를 주도하는 등, 리투아니아 인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난국을 합리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인물로 꼽혔다. 

 

이에 대해 새로 최고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란츠베르기스는 사유디스의 지도자로서 당장 연방으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급진적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브라자우스카스의 생각과는 달리 이와 같은 급진적인 방식은 연방당국과 강한 충돌을 야기했다. 연방당국은 일찍부터 리투아니아 독립의 움직임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시하고 성급한 행동을 자제해 줄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도 당시로써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막을 별다른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소련 지도부는 리투아니아 문제에 대해 비(非) 군사적 해결 원칙을 거듭 천명한 바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또한 군사력을 동원하여 독립적인 움직임을 저지할 때 국내외적으로 소련의 피해는 엄청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련 내 전 소수 민족에게까지 독립의 기운이 파급되어 소련 전체가 일종의 내란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연방 자체가 붕괴될 가능성마저 재기되었다. 따라서 소련 당국으로써는 보다 폭넓은 자치 허용 등으로 회유하는 한편, 굳이 연방으로부터 벗어나려 할 경우 그동안 소련이 제공한 경제적 지원에 대해 배상을 하도록 요구하는 강경책을 썼다. 

 

한편 고르바초프는 리투아니아에 대해 지난 50년간 소련이 제공한 각종 산업 시설 및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대가로 210억 루블(미화 340억 달러)을 배상할 것을 제안한 바 있으나 리투아니아 측으로부터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한편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은 이웃 국가인 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로 독립 선언이 잇달아 확산될 것이며, 남부 카프카스 지방 소수 민족들에게도 이는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급진주의자들 가운데 연방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급진 개혁파 정치가이자 역사학자인 유리 아파나셰프(Юрий Афанасьев)는 소련 민족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은 연방의 해체와 각 민족 국가들의 국가 연합 뿐이라고 주장했다. 발트 해의 소국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된 소련의 민족 독립 도미노 현상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인 대세가 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 공화국 최고 회의 의장 란즈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탈소 독립 선언이 결코 연방당국과의 협상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밝히게 된다. 란츠베르기스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대변인 이반 마슬레니코프(Иван Масленников)와 대화를 나누면서 리투아니아의 독립 결정이 원상 복구되지 않는 이상 소련의 강경한 입장은 계속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어 독립 선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에 관해서는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밝혔다.

 

이반 마슬레니코프는 "소련이 경제 제재 조치 등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 취소를 전제로 한 최후 통첩을 고수할 때는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죽음만이 가능할 뿐" 이라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자체도 완전한 독립이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 지도부는 완전한 독립을 전제로 모스크바 측과 과도기 과정의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에 앞서 소련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탈소 독립 선언을 유보하지 않는 한 강경 대응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이반 마슬레니코프 소련 대통령 대변인이 밝히기도 했다. 결국 바리케이드 사건(The Barricades)이 벌어지며 소련군이 침공했고 이후에 리투아니아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소련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리투아니아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Lithuania's independence process

 

-Jeong Gil-seon, columnist

 

The sudde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by Lithuania, one of the three Baltic countries of the Soviet Union, on September 6, 1990 should be seen as the beginning of an important event that determined the future of the Soviet Union. Initially, it was only a matter of time before the Lithuanian parliament declared independence, but the reason independence was carried out earlier than expected was because it was expected that the Supreme Council of the Soviet Union, which was scheduled to convene on September 12, would take some kind of action toward independence in Lithuania. .

 

At the time, only 130 of the 141 seats in Lithuania's parliament were confirmed in the 1990 election, and 11 seats themselves remained undecided, so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1990 appears to have been hastily carried out before the parliament was even fully formed. Meanwhile, at a meeting on September 12, the Supreme Council of the Soviet Union deliberated on a bill that would allow emergency measures to be taken against movements to withdraw from the Union, such as granting emergency powers to the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At that time, Lithuani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ook the form of legally reaffirming Lithuani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 1918.

 

Prior to this, in May and August 1990, the Soviet Union's annexation of Lithuania in 1940 and the 1939 German-Non-Aggression Treaty were declared null and void, thereby nullifying the cause of Lithuania's belonging to the Soviet Union. Therefore, in theory, it did not have to be subject to the law of secession from the Union decided at the Supreme Council of the Soviet Union at the end of August 1991. At the time, the Supreme Council of the Soviet Union enacted a law on secession from the Union under the pretext of legally supplementing the withdrawal from the Union, a deficiency in the Soviet Constitution.

 

Separation from the federation was divided into two stages, the republic stage and the federal stage, and several toxic provisions were prepared for each process, making departure from the federation virtually impossible. The Lithuanian parliament also deleted Soviet Socialism from the previous name of the country, the Soviet Socialist Republic of Lithuania. And as a result of deliberation by the National Assembly, the change to the Republic of Lithuania was unanimously passed, giving the country the name of the Republic of Lithuania. In addition,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a non-Communist member, Sayudi leader Vytautas Landsbergis, was elected to the Supreme Council.

 

Algirdas Brazauskas, First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who had been leading Lithuania's secession and independence movement, was eliminated from the position of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as his theory of gradual secession from the Union did not receive support from lawmakers. Brazauskas not only received widespread support from Lithuanians, including leading the separation of the Lithuanian Communist Party from the Soviet Communist Party in December 1989, but was also considered a person who could rationally resolve the crisis as he was personally close to Secretary General Gorbachev. .

 

In response to this, Landsbergis, who was newly elected as the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was in the radical position of saying that as the leader of the Sayudis, they should immediately break away from the federation. Therefore, contrary to Brazauskas's thoughts, this radical approach caused strong conflict with federal authorities. Federal authorities expressed their position early on that they could not recognize Lithuanian independence movements and warned people to refrain from hasty actions. However, even the Soviet Union could not find any tricks to prevent Lithuania's independence at the time. This was especially true because the Soviet leadership had repeatedly declared the principle of a non-military solution to the Lithuanian problem.

 

In addition, when military power was mobilized to block independent movements, the damage to the Soviet Union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would be enormous, so it was highly likely that the spirit of independence would ultimately spread to all ethnic minorities in the Soviet Union, causing the entire Soviet Union to fall into a kind of civil war. Accordingly, even the possibility of the Union itself collapsing was revived. Therefore, the Soviet authorities took a hard-line policy of appeasement by allowing broader autonomy, while demanding compensation for the economic support provided by the Soviet Union if they attempted to escape from the Union.

 

Meanwhile, Gorbachev proposed compensation of 21 billion rubles (USD 34 billion) to Lithuania in return for various industrial facilities and social overhead capital provided by the Soviet Union over the past 50 years, but received a cold response from Lithuania. Meanwhile, it was clear that Lithuani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ould spread to neighboring countries Estonia and Latvia, and that this would also have a significant impact on ethnic minorities in the Southern Caucasus region.

 

Some radicals advocated the progressive dissolution of the Union. Yuri Afanashev (Юрий Афанасьев), a radical reformist politician and historian, argued that the only way to solve the Soviet national problem was the dissolution of the Union and the union of individual nation-states. The domino effect of national independence from the Soviet Union, which began in Lithuania, a small country in the Baltic Sea, has now become an irreversible historical trend.

 

Meanwhile, Landsbergis, Chairman of the Supreme Council of the Republic of Lithuania, clarifies that Lithuania's declaration of de-Soviet independence can never be the subject of negotiations with federal authorities, but that a transition period is needed until complete independence is achieved. In a conversation with Soviet President Gorbachev's spokesman Ivan Maslenikov, Landsbergis threatened that the Soviet Union's hard-line stance would continue unless Lithuania's decision to become independent was restored. He then stated that negotiations could take place on everything except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tself.

 

Ivan Maslenikov strongly stated, "If the Soviet Union sticks to its ultimatum premised on the cancellation of Lithuania'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including economic sanctions, there can be no negotiations; only death is possible." However, since Lithuania itself needed time to become fully independent, the Lithuanian leadership announced that it was willing to discuss issues of the transition process with Moscow on the premise of complete independence.

 

Meanwhile, Soviet President Spokesperson Ivan Maslenikov said earlier that the Soviet Union would not change its hardline policy unless the Republic of Lithuania withheld its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rom Soviet Russia. In the end, the Barricades incident occurred and the Soviet army invaded. Later, due to Lithuania's strong resistance, the Soviet army withdrew, ending in Lithuania's victory. This makes Lithuania completely independent. lukybaby7@gmail.com

 

*Writer/ Jeong Gil-seon.

 

 

Novatopos member, historian, archaeological anthropologist, columnist, research professor at the Institute of Eurasian Archeology and Anthropology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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