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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수기]나는 갤러리 관장, 작가와 인연이 되면 영원히 놓아줄 생각이 없다!

김수열 아산갤러리 관장 l 기사입력 202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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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수열 아산갤러리 관장.   ©브레이크뉴스

갤러리로서의 내 삶은 참 고달팠다. 내가 좋은 작가라고 생각하면,  컬렉터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 동 떨어져 있었다. 지식 없이 무작정 갤러리를 오픈하고, 1년이 지날 즈음 갤러리의 역할을 알게 되면서, 나는 실험적이고 미술사적 가치 있는 작가를 발굴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었다.  

 

2006년 그리고 곧바로 시작한 일이 미술사 재평가 작업이었다.

 

가장 첫 번째 전시로 한국의 초(超)현실주의에 대해 연구하면서 최효순 작가를 알게 되었다. 홍대 출신으로, 당시 아무도 가지 않던 극사실화에 매달려 대상 수상작이 없던 해의 최고상인  금상 수상을 하면서 훗날 후배들의 이정표가 된 작가이다.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된 기획전은  잠깐이었으나 정말 대단한 광풍을 몰고 오면서, 전시 오픈도 하기 전 모든 작품이 솔드 아웃 되었고, 그려 달라는 주문이 빗발치기 시작했었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주문을 받았고, 그런 내 행동을 선생님은 당신을 상업 작가로 전락 시킨 치욕으로 받아들이면서 모든 주문을 해약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었다. 평생 작업에만 매달리며 1년에 겨우 몇 점 완성 시킬 만큼 사력을 다한 작품들이  그동안 팔릴 것 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창고가 텅 비어 갔으니 선생님은 맨붕에 빠져 다시 초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그 전시로 인해 정말 많은 대가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한결같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절대 팔리지 않을 작품을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다 팔았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며 나에 대해 궁금해 하셨다. 그때 그 칭찬들이 너무나 뿌듯했고, 본격적으로 전시다운 전시를 기획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시가 이루어지는데<어게인 다섯 가 지 흰색 전> 이었다. 이 전시는 1975년 일본 동경 화랑에서 열린 <다섯 가지 흰색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전이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미술사적 중요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했고, 이 전시를 위해 일본 동경 화랑으로 달려가 당시 전시작을 구매해 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시는 너무나 초라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동엽 선생님과 박서보 선생님의 작품을 제외 하면 작품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에 언론 플레이도 못해 보고 끝났었다. 곧바로 이동엽 선생님의 개인전으로 들어가면서 이번에는 메이저 갤러리들에게 이목을 집중 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아이러니 하게도 3개월짜리 전시가 1달만에 내려야 하는 결과를 불러 왔다.

 

전시가 시작되고 몇일 후 부터, 전시장이 아닌 선생님의 작업실로 메이저 갤러리들의 방문이 시작 되었고,  직접 그림을 사 갔다는 연락이 하루 같이 날라 왔다.  이윽고 서울의 유명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면서 갤러리에 전시중인 작품의 철수 요청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이 나는 너무나 반가워 쾌재를 불렀지만, 작품이 철수 된 빈 전시장을 보면서 메이저 갤러리들의 횡포가 내심 괘씸하기도 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이동엽 선생님은 우리 갤러리와도 이미 전속 관계가 형성된 상태였다. 당시의 사정을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이동엽 선생님 옆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선생님을 떠나보내면서 나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좋은 작가를 만들어도 내 손에 작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시장을 만들고 작품을 공유 하려면 작가가 다작이 되어야 한다." "모든 작가는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때는 남이다."

 

이 세 가지로 인해 나의 고난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미술사적 재평가 가능한 안 팔리는 작가를 찾아야 한다." "작가의 작품을 최소 1000점은 확보 가능 하여야 한다." 

 

때 마침, 최효순 이동엽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분이 이건용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이건용 선생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참 납득이 어려웠다.(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가인데 화가는 아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행위 예술가였다. 그때 머리속으로 번쩍 떠오르는 게 있었다. “ 작(多作)을 넘어서 이분 자체가 작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선생님은 나에게 대해 호감을 느끼고 계셨다. 내가 한번은 "선생님은 왜 저랑 함께 하시겠다 마음 먹으셨나요?"라고, 하고 여쭤보니, 선생님의 답변이 "평생 한 점도 안 팔린 제자의 작품을 싹 다 팔아 재끼지를 않나, 또 평생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 같던 작가를 꺼집어 내어 빛을 보게 만들지를 않나~!!, 내가 김관장 같은 사람을 만나야 세계적인 작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 예상대로 선생님 자체가 작품이었다. 그렇더라도 우선 작품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도통 그림을 그리지 않으시니 가지고 있을 작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선생님의 잡동사니라도 작품화해야 했다. 선생님이 입고 계신 작업복에서 부터 선생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것에 사인을 요구했고, 하물며 선생님이 드시다 남은 식사까지 작품화 시켰다. 그렇다 보니 아카이브에 눈을 떴고, 선생님의 지나간 흔적을 쫓아 아카이브화 시키는데 내 모든 시간을 걸었다. 특히 선생님이 그동안 일회성으로 생각하신 퍼포먼스들의 결과물을 가져와 작품화 시켰고, 이런 내 모습에 신이 난 선생님은 더 재미난 작업으로 화답하셨다. 당시 사모님은 투정 섞인 목소리로 "아니 이 양반은 화가도 아닌데 당신네가 바람을 넣어서 아주 못쓰게 만들어 놨다." 면서, 우리 부부를 보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고 드디어 선생님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단 뜻이다.(사모님의 눈에도 작품으로 보이면서 지금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매니저 역할을 하고 계신다.)

 

이때 내가 소장한 것은 아카이브성 작품들과 각종 사진들 이지만 그 수량이 거의 1,000여점에 달했고, 그 중 팔고자 하면 팔아먹을 작품도 거의  절반은 준비된 상태였다. 때문에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다음 작가를 또 찾아야 했다. 시대적 흐름으로 보면 민중미술이었다. 그런데 민중 미술은 그 역사가 너무 짧고, 또 작가층도 얇아서 재(再)평가적 의미 보다는 보다는 이미 몇몇 작가분에 의한 완성형에 가까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팝아트였다. 문제는 작가를 찾는 일이다. 더 이상 작가를 떠나보내지 않고 내가 최종 승리자가 되려면 더 까다로운 조건이 형성 되어야 했다. 미술사적이고, 잘 안 팔리고, 살아 있을 때는 뜰 가능성이 매우 낮아야 했다.

 

정말 그런 분을 만났다. 남들은 화가가 아니라고 하는데, 평생 화가로 그림을 그려왔고,  팝아트가 아니라고 하는데 본인은 팝아트라고 우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냥 팝아트가 아니라 한국적이기도 하다. 호불호가 강해서 전시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조영남 선생님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하며 선생님의 작품 관리는 내가 하고 있다.(이제 돌아가시기만 하면? 돈 덩어리다?) 지금의 인기작가나 불루칩들은 몇 백 년은 커녕,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다 사라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조영남 선생님은 끊임없이 재평가 받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을 작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작가와 한번 인연이 되면 영원히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우리 갤러리는 모든 작가가 첫 인연과 함께 지금까지 함께 해 오고 있다. 작가가 떠나면 작품이 남아서 함께 호흡하면서....soo@asangellery.co.kr

 

*김수열 아산 갤러리 관장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Experience] I am a gallery director, and I never intend to let go once I have a connection with an artist!

-Kim Soo-yeol, Asan Gallery Director

 

My life as a gallery owner was really hard. Even though I thought I was a good artist, I was too far away to attract collectors’ attention. I opened a gallery without any knowledge, and after a year, I came to understand the role of a gallery, and I had the ambition to discover experimental and art-historically valuable artists.

In 2006, I started re-evaluating art history.

I got to know artist Choi Hyo-soon while studying Korean surrealism for my first exhibition. She was from Hongdae, and she became a milestone for her juniors by focusing on hyper-realism, which no one had done at the time, and winning the gold prize, the highest award in a year when there were no grand prize winners. The exhibition that started based on that fact was short-lived, but it really caused a huge storm, and before the exhibition even opened, all the works were sold out, and orders to paint them started pouring in. I was so excited that I accepted the orders, and the teacher took my actions as a disgrace that I had reduced him to a commercial artist, and ended up canceling all the orders. He had never thought that the works that he had devoted his entire life to, which he had only completed a few pieces a year, would sell, but when the warehouse was emptied overnight, the teacher was devastated and returned to the wilderness.

At that time, I met many great artists because of that exhibition, and they all told me that they couldn't believe that I had sold all the works that would never sell in a place outside of Seoul, and they were curious about me. I was so proud of those compliments at that time, and I wanted to plan a proper exhibition.

And then the second exhibition was held, <Again, Five White Exhibitions>. This exhibition was very important in art history because I knew very well that the <Five White Exhibition> held at a Tokyo gallery in Japan in 1975 was the first overseas exhibition of our country, and I even rushed to the Tokyo gallery in Japan to purchase the works on display at that time.

However, the exhibition ended very shabbily.

Except for the works of Professor Lee Dong-yeop and Professor Park Seo-bo, the works were so poor that I could not even make a media play. I went straight into Professor Lee Dong-yeop’s solo exhibition, and this time I focused my attention on major galleries.

However, that joy was short-lived, and ironically, the three-month exhibition ended up having to be closed after only one month.

A few days after the exhibition began, major galleries began visiting the artist’s studio instead of the exhibition hall, and I received calls from them saying that they had purchased the paintings directly. Soon, I signed an exclusive contract with a famous gallery in Seoul, and I received a request to remove the works on display at the gallery. That fact made me very happy and cheered, but when I saw the empty exhibition halls where the works had been removed, I was secretly annoyed by the tyranny of major galleries.

It is a story of the past, but Professor Lee Dong-yeop had already formed an exclusive relationship with our gallery. Many of you may know the circumstances at the time, but this happened when I was always by Professor Lee Dong-yeop’s side. As I said goodbye to him, I had a great realization.

“No matter how hard I try to make a good artist, if I don’t have a work in my hands, it’s nothing.” “In order to create a market and share works, the artist must be prolific.” “All artists are just others when their paintings start selling.”

These three things were the beginning of my difficult path.

“First, I must find an artist who is not selling and can be reevaluated in art history.” “I must be able to secure at least 1,000 works from the artist.”

At that time, the person I met through Professor Lee Dong-yeop, Choi Hyo-sun, was Professor Lee Gun-yong. However, I had a hard time understanding what he said about Mr. Lee Geon-yong. (He is a very important artist in art history, but he is not a painter.) So I looked into it and found out that he was a performance artist. At that time, something flashed into my head. “Beyond his many works, this person himself is a work of art.” The teacher happened to have a crush on me. I once asked him, “Why did you decide to work with me?” and he answered, “You must sell all the works of your students who have not sold a single piece in their entire lives and make them shine. You must also bring out artists who seem to have disappeared into the darkness and make them shine~!! I became convinced that I would become a world-class artist if I met someone like Director Kim.”

As I had expected, the teacher himself was a work of art. Even so, I had to have a work of art first, but since he did not paint at all, I had no work to keep. I had no choice but to turn even the teacher’s miscellaneous items into works of art. I demanded his autograph on everything he used, from the work clothes he was wearing, and even made his leftover meals into works of art. That’s how I opened my eyes to the archive, and I devoted all my time to tracing his past traces and archiving them. In particular, I made works of art out of the results of performances that he had thought of as one-time things, and the teacher, who was delighted by this, responded with even more fun works. At the time, my wife sighed at the sight of us, saying in a complaining voice, “Hey, this guy’s not even a painter, but you guys screwed him up and made him so useless.” Several years passed and the teacher finally revealed himself to the world. It means that it is time to leave. (She also sees it as a work of art in my wife’s eyes, and she is now my strongest supporter and manager.)

At that time, what I had in my possession were archival works and various photographs, but the number was almost 1,000, and almost half of them were ready to be sold if I wanted to. That is why I achieved success for the first time.

But at the same time, I had to find the next artist. In terms of the flow of the times, it was folk art. However, folk art has such a short history and the artist group is so thin that it is closer to a completed form by a few artists rather than a reevaluation. That is why I thought of pop art. The problem is finding artists. In order for me to become the final winner without sending artists away, more difficult conditions had to be created. It had to be historically relevant, not sell well, and have a very low chance of becoming popular while they are alive.

I really met someone like that. Others say he is not a painter, but he has been painting as a painter his whole life, and he says it is not pop art, but he insists it is. However, in my opinion, it is not just pop art, but also Korean. Some people are cautious about even exhibiting because of strong likes and dislikes. That is Professor Cho Young-nam. I have been with him since then and I have been managing his works. (If he just passes away? A lump of money?) The popular artists and blue chips of today will all disappear in a few decades, let alone hundreds of years. Even so, I think Professor Cho Young-nam is the only artist who will survive while constantly being re-evaluated.

Once I become connected with an artist, I have no intention of letting him go. That is why all artists at our gallery have been together since the first encounter. When an artist leaves, his works remain and breathe together....soo@asangellery.co.kr

 

*Kim Soo-yeol, Director of Asa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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