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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流浪)의 역사 – 절해 고도 거문도를 찾은 나라들(1)

이일영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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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서 본 거문도 & 현재 거문도 /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여행쟁이손영찬 & 거문도해풍쑥

 

근대사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보편적으로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세 이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변화에 바탕을 두어 토지를 소유한 계층과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에 대한 사회적 지배가 절대적이었던 봉건사회 이후에 전개된 시기를 말한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상품이 교류하는 시대를 열었던 대항해시대를 통하여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주종의 관계로 연속된 공동체 시대를 벗어나면서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학문과 예술을 추구한 르네상스 시대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변화를 이끌어갈 국가와 사회의 정신적 바탕으로 교회의 혁신을 요구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16세기 이후를 근세(近世-early modern)로 구분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농민과 장인 그리고 상인의 균형이 이루어진 변화와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생겨나 시민사회가 전개된 18세기 이후를 근대(近代-late modern)로 정의한다. 

 

이를 구조적 맥락으로 해체하면 혁명의 시대가 존재한다. 먼저 1769년 영국의 공학자 제임스 와트에 의하여 증기기관이 발명된 시기를 기점으로 산업혁명의 변화가 세상을 바꾸었다. 

 

나아가 영국의 13개 주 식민지였던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 후 전쟁으로 영국을 물리치고 1783년 9월 3일 미국독립혁명이 탄생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 수립으로 식민지 내부의 봉건제와 절대주의를 철폐한 사회 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독립과 혁명이 함께 이루어진 역사이다. 이어 1789년 7월부터 1794년 7월까지 민중에 의해 전개된 프랑스 시민혁명은 특권의 폐지를 통한 평등한 인권 선언이 이루어진 근대 민주주의 탄생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 설정과 정의는 여러 논란이 존재한다. 변화에 의한 시대의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로 인한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개항을 통한 변화에 바탕을 둔 개항 근대론이 보편적이다.

 

특히 역사의 거시적 상황에서 중시되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인접국 중국, 일본과 함께 지속한 오랜 쇄국(해금)의 역사가 해체된 상황과 관계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1840년 5월부터 1842년 8월까지 청나라와 영국이 격돌한 1차 아편전쟁과 1856년에서 186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하여 미국과 러시아가 지원한 2차 아편전쟁에서 청나라는 북경이 함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때 무수한 전쟁을 겪어온 경험을 쥐고 적정한 개입과 시기를 가늠하던 러시아의 중재로 1860년 10월 영국·프랑스·러시아 각 나라와 개별적으로 체결한 강화의 바람이 베이징조약이다. 

 

당시 러시아가 추구한 속내를 헤아리면 다양한 해답이 쏟아진다. 1858년 2차 아편전쟁에서 만신창이가 되어가던 청나라에 러시아는 지정학적 우군을 자처하며 아이훈조약(愛琿條約)을 요구하였다. 이는 혹한의 겨울에도 유일하게 얼지 않는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하려는 속내였다. (이곳은 고구려는 물론 그 후예인 발해가 698년부터 926까지 통치한 역사의 기록이 전하는 땅이다)  

    

이와 같은 대륙을 관통한 역사의 바람이 조선에 상륙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과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부산을 개항하면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다음 해 1883년 영국, 독일 수호통상조약,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으로 이어졌다.

 

1845년 6월이었다. 영국 국기를 휘날리는 전함이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거문도에 상륙하여 섬 안팎을 끝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1848년 출판된 ‘사마랑호 탐사항해기’에는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인 영국 해군 에드워드 벨처(1799~1877) 함장은 1840년 5월 개시된 1차 아편전쟁 참전 중 1841년 1월 25일 본국의 특명을 받고 홍콩섬을 면밀하게 탐사하였다. 이러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1차 아편전쟁 종료 후 체결된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을 통하여 홍콩이 영국에 넘어갔다. 

 

이후 벨처 함장은 아시아 주요 섬을 탐사하면서 1845년 6월 25일 제주도 동쪽 끝의 우도에 정박하여 제주도에서부터 거문도에 이르는 주요한 섬들을 탐사하였다. 

 

당시 7월 16일부터 4일간 거문도에 정박하며 측량을 통한 면밀한 탐사로 작성한 해도와 함께 상세한 보고서가 영국에 전해졌다. 보고서에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거문도는 동쪽 30km 지점에 40여 개의 무인 바위섬이 놓인 특수한 요건으로 수심이 깊고 조수의 차가 크지 않은 내항 조건으로 기항지의 적정함을 기록하였다. 나아가 섬의 이름을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 윌리엄 해밀턴의 이름을 붙인 해밀턴 항(Port Hamilton)으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영국의 거문도 탐사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 대한 높은 경계심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면서 1814년 3월 파리까지 뒤쫓아 온 러시아가 어제의 동지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위협까지 대비해야 했다. 이에 지형적 요충지인 아프가니스탄을 길들이려는 영국이 1838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제1차 아프간전쟁은 1842년 종전되었다.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당시 영국에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의 예프피미 푸탸틴(1803~1883)이라는 무역 상인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 해군 장교로 터키전쟁에서부터 코카서스 전쟁에 이르는 수많은 전쟁에 참전 후 민간인 신분으로 영국에 건너가 흑해의 러시아 함대 개선을 위한 신기술 증기선 구매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파악한 여러 자료에 의하면 그는 정보 수집이 주요한 임무였다.  

 

잠시 설명이 필요하다. 흑해는 깊은 수심의 무산소 원인으로 어둠의 바다로 불러왔다. 오늘날 튀르키예,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러시아, 조지아와 같은 여러 나라에 접한 내해로 요충지 크림반도를 품고 있다. 튀르키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유럽과 아시아를 바라보는 마르마라해를 건너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르는 경계의 물길 다르다넬스 해협을 흘러 지중해로 연결된다.

 

이곳 흑해에 러시아 흑해 함대가 창설된 것은 1783년 5월이었다. 러시아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시대에 포툠킨 장군(1739~1791)이 부동항 세바스토폴 건설과 함께 창설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로 1세(1777~1825) 황제가 즉위하여 현대식 증기선 군함 건조에 주력하여 1825년 6월 증기선 전함 유성(Метеор) 건조에 성공하였다. 이후 1년간의 해상 활동 검증을 거쳐 1826년 14문의 대포로 무장한 최초의 증기선 군함 유성은 흑해함대에 배치되었다.

 

러시아 증기선 군함 유성은 여러 전투에서 승전의 바탕이 되어 해군력의 소중함을 절감할 즈음 증기선 그레이트 웨스턴호가 최초의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838년 4월 8일 영국 서부 항구 도시 브리스톨에서 출발하여 15일 후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증기선과 달리 왕복으로 운동하는 피스톤을 사용한 복합 증기기관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는 영국의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회사 수석 엔지니어 이점바드 브루넬(1806~1859)이 설립한 그레이트 웨스턴 증기선 회사에서 개발한 증기선이었다.

 

이어 1845년에는 철로 만들어진 선체에 스크루 프로펠러를 장착한 증기선 운행에 성공하였다. 이를 설명하면 초기 증기선은 배의 양쪽이거나 뒤편에 커다란 물레방아와 같은 바퀴를 장착하여 증기기관의 동력으로 이를 돌리는 추력으로 배를 움직였다. 이러한 차이는 기존의 나무에서 쇠로 만들어진 배의 차이와 함께 쇠로 만들어진 배의 속도가 더 빠른 발전이었다.

 

러시아 해군장교 출신 예프피미 푸탸틴(1803~1883)이 민간인 신분으로 증기선 구입을 앞세워 영국에 체류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 연방 외무부와 해군성에 예프피미 푸탸틴의 자료가 영구 기밀로 봉인된 상황이 이러한 정황을 의미하고 있다.) 

 

▲ 에드워드 벨처(1799~1877)의 ‘사마랑호 탐사항해기’ 1848년 

   

당시 그는 영국의 거문도 탐사 계획을 탐지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에 돌아가 해군에 복귀한 그는 청나라의 국경선 및 해상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일본과 조선의 바다를 탐사해야 할 중요성을 알렸다. 1843년 니콜라이 1세 황제가 이를 승인하였지만, 당시 청나라와의 주요한 교역 거점이었던 캬흐타 무역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무산되었다. 

 

캬흐타 무역은 그만큼 러시아에 중요한 내용이 많은 거점이었으며 역사적으로 조선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1600년 무렵부터 러시아는 청나라 영토 헤이룽강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1651년 성을 쌓아 양군이 충돌하였다. 그러나 조총과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군에게 패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1654년 효종은 조총 사격에 뛰어난 병력 150여 명의 지원군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간 병사들은 월등한 전투력으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제1차 나선정벌이다. 나선(羅禪)은 당시 러시아의 음역이다.

 

이후 벌어진 격전에서 연속 패한 청나라는 1658년 다시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군 200여 명이 제2차 나선정벌에 나서 러시아 배 10척을 다시 물리쳤다. 

 

이에 러시아는 평화협정을 추구하여 1689년 8월 동시베리아 도시 네르친스크에서 국경선을 설정하는 협정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아무르강 하구에서 상류까지의 경계 설정을 협의하면서 러시아는 아무르강 상류에 설치한 러시아 요새 알바진(Албазин)의 폐쇄를 약속하였다. 이어 가장 주요한 양국의 무역을 허용하면서 여행 증명서를 소지한 이동을 보장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국경무역이 발전하면서 오늘날 부랴트 자치 공화국 도시인 캬흐타와 오늘날 몽골 북쪽 국경도시 알탄불라그인 추루카이투에 국경교역소를 설치하여 두 나라 모두 많은 상업적 이익을 얻었다. 

 

우리나라 거문도의 중요함을 헤아린 러시아 해군 장교 예프피미 푸탸틴(1803~1883)의 탐사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뛰어난 역량을 가졌던 그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발탁되었다. 또한, 황제의 허락을 받아 1942년 영국 런던에서 활동 중에 사랑을 맺었던 영국 해군 장교의 딸 메리 놀스(1823~1879)와 1849년 결혼하였다. 

 

1852년 10월 7일이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기지 크론시타트에서 출발하는 한 척의 범상치 않은 배가 있었다. 20여 년 전 러시아 황실의 해외 순방 전용선으로 만들어졌던 해군 호위함 팔라다(Паллада)호였다. 

 

해군 수병과 장교에서부터 무려 426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인원이 승선한 배는 해군 중장이 되어있는 예프피미 푸탸틴 장군의 지휘 아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종 행선지는 일본이었지만, 배는 영국을 향하고 있었다. (이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artwww@naver.com

 

필자: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definition of modern history varies. In general, it refers to the period that developed after the feudal society, when social control over the landowners and farmers who cultivate land was absolute based on political, economic, and social changes after the Middle Ages.

 

I summarize as follows. Various changes were made through the Age of Discovery, which opened an era of exchange between cultures and products from the East and the West. As a result, there was a Renaissance era that pursued learning and art that respected human values while escaping the era of continuous community due to the relationship of master-slave. On this basis, after the 16th century, when the religious reform that required the church's innovation based on the spiritual foundation of the state and society that will lead the change, it is classified as 近early modern. 

 

In this trend, after the 18th century, when capitalism was created and civil society developed due to the change and development of the balance of farmers, craftsmen, and merchants, it is defined as 近 modern. 

 

If this is dismantled into a structural context, there is an era of revolution. First, starting in 1769, when the steam engine was invented by British engineer James Watt, the industrial revolution changed the world. 

 

Furthermore, the United States, a colony of 13 states in Britain, defeated Britain by war after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n July 4, 1776, and the American Revolution was born on September 3, 1783. This is a history of independence and revolution in terms of social reform that abolished feudalism and absolutism within the colony as the establishment of the world's first democratic republic. Then, the French Civil Revolution, which was developed by the people from July 1789 to July 1794, was the birth of a modern democracy in which the declaration of equal human rights was made through the abolition of privileges.

 

There are many controversies over the establishment and definition of modern history in Korea. In the context of the transition of the times by change, the modern theory of opening ports based on changes through opening ports in the new international order caused by modern capitalism after the Industrial Revolution is common.

 

In particular, it is important to look at the dissolution of the long-standing history of isolation (discontinuation) along with neighboring China and Japan from a geopolitical perspective that is important in the macroscopic situation of history. 

 

From May 1840 to August 1842, the Qing Dynasty faced the crisis of Beijing's fall in the first Opium War, which was fought by the Qing Dynasty and Britain and France from 1856 to 1860, and the second Opium War, which was supported by the United States and Russia. At this time, the Beijing Treaty was a desire for strengthening individually signed with Britain, France, and Russia in October 1860, through Russian mediation, which had experienced countless wars and measured the appropriate intervention and timing. 

 

Various answers are poured out if Russia considers the inner thoughts it pursued at the time. In 1858, Russia claimed to be a geopolitical ally to the Qing Dynasty, which was devastated by the Second Opium War, and demanded the Treaty of Aihun (愛琿條約). This was intended to occupy Vladivostok, the only floating port that does not freeze even in the freezing winter. (This is the land of Goguryeo as well as its descendants Balhae's history of ruling from 698 to 926.)  

    

The wind of history that penetrated the continent landed in Joseon and opened Busan after signing the Treaty of Ganghwa Island and the Treaty on the Protection of Japan in 1876, leading to the Treaty on the Protection of the United States and the Treaty on the Protection of the United Kingdom and Germany in 1883 and the Treaty on the Protec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Russia in 1884.

 

It was June 1845. A warship flying the British flag landed on Geomundo Island, the southernmost island of Korea, and was looking endlessly inside and outside the island. 

 

The "Samarang Exploration Sailor," published in 1848, contains this history intact. The author, Captain Edward Belcher (1799-1877), of the Royal Navy, was named by his home country on January 25, 1841, during the first Opium War, which began in May 1840, and closely explored Hong Kong Island. Based on these reports, Hong Kong was handed over to Britain through the 1842 Treaty of Nanjing (條約), signed after the end of the First Opium War. 

 

Captain Belcher later explored major islands in Asia, anchoring in Udo Island, the eastern end of Jeju Island, on June 25, 1845, and exploring major islands from Jeju Island to Geomundo Island. 

 

At that time, it docked on Geomundo Island for four days from July 16, and a detailed report was delivered to the UK along with a chart drawn up by close exploration through surveying. The report recorded that Geomundo Island, which consists of three islands, is a special requirement with more than 40 uninhabited rock islands 30 kilometers east, and the port of call is appropriate with deep water and low tidal differences. Furthermore, the name of the island was recorded as Port Hamilton, which was named after William Hamilton, then vice-minister of the Royal Navy.  

 

British exploration of Geomundo Island was a preparation for high vigilance against the Russian Empire at the time. As Napoleon failed to conquer Russia, Russia, which had chased Paris in March 1814, became the subject of vigilance in yesterday's winter solstice. In particular, it had to prepare for the threat to British control of India by expanding its power in Central Asia. Thus, the First Afghan War, in which Britain invaded Afghanistan in 1838, which was trying to tame the geographical location, ended in 1842. It was a great game.   

 

At that time, there was a Russian trader named Yefpimi Puttyatin (1803-1883) who was staying in the UK. As a Russian naval officer, he moved to Britain as a civilian after participating in numerous wars from the Turkish War to the Caucasus War and was pursuing the purchase of a new technology steamboat to improve the Russian fleet in the Black Sea. However, according to various data I have identified, collecting information was his main task.  

 

I need an explanation for a moment. The Black Sea was brought to the dark sea because of the anaerobic nature of the deep water. Today, Crimea is an important inland sea facing several countries such as Turkiye, Bulgaria, Romania, Ukraine, Russia, and Georgia. It crosses the Marmara Sea, which looks at Europe and Asia through the Bosphorus Strait in Turkiye, and flows through the Dardanelles Strait, a waterway that separates the European and Asian continents, leading to the Mediterranean Sea.

 

The Russian Black Sea Fleet was established here in May 1783. During the reign of Yekaterina II (1729–1796), the last Empress of Russia, General Pottyomkin (1739–1791) was founded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floating port Sevastopol. Later, Emperor Alexandro I (1777-1825) ascended to the throne, focusing on the construction of modern steamboat warships, and succeed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steamboat т Yuseong (М р) in June 1825. After a year of verification of maritime activity, the first steamship warship, the meteor, was deployed to the Black Sea Fleet in 1826, armed with 14 cannons.

 

The Russian Steamboat Warship Yuseong was the basis for victory in various battles, and around the time when the Steamboat Great Western succeeded in crossing the Atlantic Ocean for the first time, attracting the world's attention. 

 

It departed from the western port city of Bristol on 8 April 1838 and arrived in New York 15 days later. Unlike conventional steam ships, it developed into a complex steam engine using a piston that moves reciprocally. It was a steamboat developed by the Great Western Steamboat Company, founded by the Great Western Steamboat Company, British Chief Engineer Ijbbard Brunel (1806-1859).

 

In 1845, a steamboat equipped with a screw propeller was successfully operated on a hull made of iron. To explain this, the initial steam ships were equipped with wheels such as a large waterwheel on either side or at the back of the ship and moved the ship with thrust that turned it to the power of the steam engine. This difference was a faster development of ships made of iron, along with the difference in ships made of iron from existing trees.

 

Yefimi Putyatin (1803-1883), a former Russian naval officer, stayed in Britain as a civilian with the purchase of a steamboat to examine this situation. (This is the situation in which Yevpimi Puttyatin's data was sealed in permanent confidentiality to the Foreign Ministry and the Naval Ministry of the Russian Federation.) 

 

At the time, he was detecting a British expedition to Geomundo Island. After returning to Russia and returning to the Navy, he signaled the importance of exploring the seas of Japan and Joseon, which borders the Qing Dynasty's border and maritime border. In 1843, Emperor Nikolai I approved it, but it was canceled due to concerns about the impact on Kyakhta trade, a major trading hub with the Qing Dynasty at the time. 

 

Kyakhta trade has been a base with a lot of important content for Russia and is historically closely related to Joseon. From around 1600, Russia began to invade the territory of the Heilong River, the Qing Dynasty, building a castle in 1651, and the two armies clashed. However, when he was defeated by Russian troops armed with guns and cannons, he asked Joseon for troops. In 1654, Hyojong sent more than 150 reinforcements, who were excellent at firing guns, and the soldiers who crossed the Tuman River defeated the Russian army with superior combat power. It's the first spiral conquest. The spiral (羅禪) is the Russian translation of the time.

 

The Qing Dynasty, which lost consecutive battles that took place afterwards, requested another round of troops in 1658. More than 200 Korean soldiers launched the second spiral conquest and defeated 10 Russian ships again. 

 

Accordingly, Russia pursued a peace treaty and signed the Treaty of Nerchinsk in August 1689 to establish a border in the eastern Siberian city of Nerchinsk. At that time, while discussing the establishment of a boundary from the mouth of the Amur River to the upstream, Russia promised to close the Russian fort Alvazin (Алба зин), which was installed upstream of the Amur River. Then, it allowed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which is the most important, and guaranteed movement with travel certificates.

 

Based on this development of border trade, both countries gained a lot of commercial advantages by establishing border trading stations in Kyakhta, today's Buryat Autonomous Republic city, and Churuqaitu, today's northern border city of Al-Tanglag, Mongolia. 

 

The exploration plan of Russian naval officer Yevpimi Puttyatin (1803-1883), who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Korea's Geomundo, fell through, but he was selected as the closest aide to the emperor, who had outstanding capabilities. In 1849, he married Mary Knowles (1823-1879), daughter of a Royal Navy officer whom he had made love with while working in London, England, in 1942, with the permission of the emperor. 

 

It was October 7, 1852. There was an unusual ship departing from Kronsitat, a naval base in St Petersburg, Russia. It was the naval frigate Pallada (П лл д ᄒᅀᅳ으ᅀᅵ), which was built more than 20 years ago as a private vessel for the Russian imperial family's overseas trips. 

 

The ship, which had a variety of personnel from navy sailors and officers to a whopping 426 people on board, was busy under the command of General Yefimi Putyatin, who became a Navy lieutenant general. The final destination was Japan, but the ship was headed for England. (We'll take a look at it later) artwww@naver.com

 

Author: Lee Il Young

the director of the Korean Art Center. a colum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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