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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99) - 메디치가와 바이올린 이야기(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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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6-15

현대의 ‘바이올린’(violin) 악기와 같은 악기를 최초로 제작한 제작자는 이탈리아 ‘크레모나’(Cremona) 도시의 장인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05~1577)입니다. 이와 함께 ‘브레시아’(Brescia) 도시의 장인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ò, 1542~1609) 그리고 ‘펠레그리노 미켈리’(Pellegrino Micheli. 1520~1606) 같은 악기 제작자도 비슷한 시기의 제작자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미술작품에서 바이올린 악기가 최초로 그려진 작품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에서 활동하였던 화가 ‘가우덴초 페르라리’Gaudenzio Ferrari. 1471~1546)의 1529년 작품으로 파악됩니다. 작가의 ‘오렌지 나무의 성모마리아’(Madonna of the Orange Trees) 작품에 3개의 현으로 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어린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이올린 악기가 최초로 기록으로 등장한 내용은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종교음악가 ‘필리베르 장브 드 페르’(Philibert Jambe de Fer, 1515~1566)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1564년 리옹에서 출판하였던 저서 ‘음악 개설(요약)’에서 화음과 음색 그리고 9개의 구멍이 있는 플루트와 함께 비올라와 바이올린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3개의 현으로 제작된 바이올린이 아닌 4개의 현으로 제작된 바이올린의 조율에 대한 기록도 남기고 있습니다.

 

▲ (좌)  ‘안드레아 아마티’ 제작 1559년 바이올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중)  ‘가우덴초 페르라리’ 1529년 작품 Madonna of the Orange Trees  (우)  ‘필리베르 장브 드 페르’ 1564년 저서 ‘음악 개설’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프랑스 ‘샤를 9세 왕’’(Charles IX. 1550~1574)은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의 영향으로 음악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며 음악가 ‘필리베르 장브 드 페르’는 ‘샤를 9세 왕’’에게 음악을 헌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 왕실 기록에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프랑스 ‘샤를 9세 왕’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 왕후가 이탈리아 ‘크레모나’ 도시의 악기 제작자인 ‘안드레아 아마티’에게 궁전에서 사용할 여러 현악기와 함께 바이올린 악기 제작을 의뢰한 내용이 확인됩니다. 당시 ‘안드레아 아마티’가 제작한 악기가 영국의 가장 오랜 박물관인 옥스퍼드의 애쉬몰리언 박물관(AshmoleanMuseum)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바이올린 제작의 선구자로 ‘안드레아 아마티’가 기록되는 배경입니다.
 
캐서린 왕비’로 불리는 ‘카트린 드 메디치’ 왕후는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후손으로 프랑스 ‘샤를 9세 왕’의 아버지 ‘헨리 2세’ 왕(Henry II-French. 1519~1559)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습니다. ‘헨리 2세’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샤를 9세 왕’이 열 살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섭정 정치로 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입니다. 당시 1572년 그 유명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 ‘위그노’(Huguenot)의 학살 사건인 ‘성 바돌로매의 학살’ 사건에 실질적인 배후자로 의심받을 만큼 국정에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트린느 드 메디치’에 대한 여러 평가가 많지만, 예술과 문화의 후원에 대한 큰 업적도 역사에 담긴 내용입니다.

 

▲ (좌)  프랑스 ‘헨리 2세’ 왕 초상 프랑수아 클루에’(François Clouet) 作    (중) 프랑수아 클루에 1555년 作 ‘카트린느 드 메디치’ 초상   (우)  ‘샤를 9세’ 초상 ‘프랑수아 클루에’ 作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렇듯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하여 최초의 바이올린이 제작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메디치가’의 창시자 ‘조반니 드 메디치’(1360~1429)의 증손자인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를 살피게 됩니다. ‘로렌초 드 메디치’는 증조부 ‘조반니 드 메디치’와 조부 ‘대 코시모 메디치’가 헌신적인 열정으로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고의 은행으로 세워놓은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메디치가의 역사상 가장 활동적인 예술가 후원의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당대의 화가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다빈치’를 비롯하여 미술과 문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열성적인 예술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로렌초 드 메디치’가 당시 ‘크레모나’ 도시에 유능한 청년 악기 제작자이었던 ‘고토라도 아마티’(gotardo Amati. 1476~1540)에게 여러 악기를 주문하여 음악가들을 후원하였던 것입니다. ‘카트린 드 메디치’의 주문으로 최초로 바이올린 악기를 제작한 ‘안드레아 아마티’의 아버지가 ‘고토라도 아마티’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어온 메디치가의 음악에 대한 후원과 관심은 ‘로렌초 드 메디치’의 둘째 아들로 교황이 되었던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 시대에 절정을 맞게 됩니다. ‘레오 10세 교황’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후원은 거의 광신에 이를 만큼 열정적이었습니다. 다양한 악기의 제작에 대한 후원은 물론 인근 나라에서 초청한 음악가, 가수, 연주자에 대한 지원으로 교황청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를 만큼 열렬한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이러한 증조할아버지 ‘로렌초 드 메디치’와 작은할아버지 ‘레오 10세 교황’으로 이어진 열정적인 음악 사랑을 담은 메디치가의 후손 ‘카트린 드 메디치’는 어머니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Madeleine de La Tour d' Auvergne. 1498~1519)가 자신을 낳은 3일 후에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 아버지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드 메디치’(Lorenzo de 'Medici, Urbino, 1492~1519)도 어머니가 사망한 18일 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픔을 안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메디치 가문의 딸 ‘카트린 드 메디치’에 의하여 최초의 바이올린이 제작된 사실은 많은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 (좌)   ‘보티첼리’ 작품 ‘동방 박사의 숭배’ 속에 ‘로렌초 데 메디치’   (중)   ‘레오 10세’(Pope Leo X.) 교황    (우)  ‘루크레지아 토르나부오니’ (워싱턴 DC. National Gallery of Art 소장) (Domenico Ghirlandaio.1475 년 作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현악기의 고장이며 바이올린 악기의 선구적인 제작이 이루어진 이탈리아 ‘브레시아’(Brescia) 도시와 ‘크레모나’(Cremona) 도시의 악기 제작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자네토 미켈리’(Zanetto Michel. 1480~1560)와 ‘펠레그리노 미켈리’(Pellegrino Micheli. 1520~1606) 부자와 같은 선구적인 현악기 제작 장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브레시아’ 도시에서 제작된 바이올린에 대한 기록은 ‘자네토 미켈리’의 1530년 제작설과 함께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한 아들 ‘펠레그리노 미켈리’의 전설적인 비올라 악기와 바이올린 제작에 대한 기록이 그 자료적 실물이 보존되지 못하여 전설처럼 역사와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류트와 바이올린 제작자 ‘조안 마리아 다 브레사’(Joan Maria da Bressa)와 그의 아들 ‘조반 자코모 달라 코나’(Giovan Giacomo Dalla Corna. 1485~1560)와 같은 부자의 장인들도 선구적인 제작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아울러 ‘조반니 안드레아 베로나’(Giovanni d’Andrea da Verona, 1457~1525)에 의하여 1511년 제작된 바이올린의 원형 ‘리라 다 브라치오’(Lira da braccio)가 오스트리아 ‘빈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당시 기존의 현악기에서 바이올린이 제작된 사실들이 확인되지만, 기존의 현악기에서 바이올린으로 발전한 배경에 대한 음악가의 연관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바이올린 악기의 제작은 4代를 악기 제작으로 이어온 ‘아마티 가문’(Amati)에 의하여 이루어진 내용이 가장 타당합니다. 이는 1代 ‘고토라도 아마티’(gotardo Amati. 1476~1540)에서 출발하여 2代인 아들 ‘안드레아 아마티’(Andrea Amati. 1505~1577)가 최초의 바이올린을 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3代인 두 아들 ‘안토니오 아마티’(Antonio Amati. 1537-1607)와 ‘지롤라모 아마티’(Girolamo Amati. 1551~1630)가 뒤를 이었습니다. 이후 ‘지롤라모 아마티’의 아들 ‘니콜라 아마티’(Nicola Amati. 1596~1684)가 악기 제작 4代의 역사를 펼치면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니콜라 아마티’의 공방에서 ‘안드레아 과르네리’(Andrea Guarneri. 1626~1698) 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가 공부하여 역사에 남는 명품 바이올린 악기가 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 (좌)  ‘가스파로 다 살로’ 동상   (우)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함께 할아버지에서부터 악기 제작으로 대를 물려온 음악 가족의 악기 제작자 ‘가스파로 다 살로’(Gasparo da Salò, 1542~1609)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전개될 인물입니다. 필자가 메디치가의 음악  부분에 대한 자료를 찾아 유럽의 주요한 도서관에 공개된 자료를 인터넷 열람하면서 가장 자료를 찾기 힘든 인물이었지만 많은 이야기가 감지된 인물이 ‘가스파로 다 살로’였습니다. 이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음악인이 존재하였으며 그가 제작한 악기에 대하여 훗날 바이올린의 역사적인 명장으로 등장하는 ‘안드레아 과르네리’와 그의 손자 ‘주제페 과르네리 델 제수’ 그리고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명인들이 ‘아마티 가문’의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그가 제작한 악기의 연구에서 오늘날의 명품 악기가 탄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은 역사적으로 단선음악이 다성음악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현대의 바이올린과 같은 풍부한 음색을 가진 악기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던 내용에서 당시 바이올린 악기 제작자들이 상당한 음악적 지식을 가져야 했던 점을 생각하면서 음악 가족으로 구성된 악기 제작자 ‘가스파로 다 살로’ 에 필자의 관심이 많았던 내용입니다.

 

이는 화성과 화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단선음악과 달리 선율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대위법적인 다성음악에서 여러 파트의 선율에 담긴 음색을 연주할 수 있는 현악기의 추구가 바이올린으로 발전된 의미를 말하며 이와 같은 배경에서 초기의 3줄로 이루어진 바이올린에서 4줄로 발전된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하학적인 악기의 구조를 추구한 사실은 경탄스러운 지혜라 할 것입니다. 이는 대위법적인 음악의 이론적 그림을 그려보면 회화의 원근법적인 내용과 그 논리적 구성이 같은 사실에서 선구의 지평을 열어간 혜안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실내악이라는 음악적 환경이 주어진 시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바이올린 악기의 등장과 발전으로 조화를 뜻하는 ‘consort’ 즉 앙상블 음악이 생겨났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후 더욱 섬세한 조화를 추구하는 실내악의 중심인 현악 사중주가 이루어진 의미는 첼로와 같은 악기가 바이올린의 발전에서 가능하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서 화성과 선율을 품은 조성 음악이 생겨나면서 고전과 르네상스를 관통한 바로크 음악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이올린 악기의 역사를 헤아리면서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메디치가와 비교될 만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후원과 사랑을 남긴 여인 ‘이사벨라 데스테’(Isabella d'Este, 1474~1539)입니다. 이어서 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니다. 다음 칼럼은 (100) ‘이사벨라 데스테’이야기입니다.*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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