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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생각이, 나의 삶을 안내하는 바로미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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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9-11

▲ 이서영     ©브레이크뉴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실험이 있다. 그들은 노동의 강도가 높아 늘 피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피곤해 보였고 지쳐보였다. 연구자들은 두 그룹으로 피험자들을 나눈 뒤 한 그룹은 하던 그대로 일을 하게 했고 다른 그룹에게는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연구자들은 그들에게 강도 높은 노동이 사실은 운동의 효과가 있으며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근육이 단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후로 그들의 노동에 대한 견해는 아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노동과 운동이 병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룹에서는 예전과 같은 피곤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으며 일을 대하는 자세가 경쾌하게 바뀌어 있었다. 단지 몇 가지 정보만 알려 주었을 뿐인데 일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 상태와 건강까지 바뀐 것이다.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를 갖지 못하므로 삶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삶은 단지 물질을 주고받는 표면적인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늘 부정적인 투사를 하면서 살게 된다.


생각이 바뀌기 위해서는 '무지의 지', 즉 내가 나의 삶에 대해 지극히 아는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안다는 것은 새로운 도구를 갖는다는 것이다. 알아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는다. 깨닫기 시작하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간다. 양자물리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의 실험이 어떤 결과에 도달한다면 그 결과 속에는 특정한 연구자들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똑같은 실험이라도 어떤 연구자가 연구에 참여했는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순간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멈춰 있으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박제처럼 그저 존재할 뿐 살아 생동하지 않는 그림 한 컷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다면? 나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 점점 바뀌기 시작한다. 내게 오는 사람들이 점점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바뀌고 풍경들이 바뀌면 내 삶의 배경 또한 점점 달라진다. 10년 만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 친구와 마주쳤다. 친구가 말했다. "우와, 너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구나.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이만큼 바뀔 수 있었니? 내게 그 비밀 좀 알려주지 않겠니?"

 

친구는 10년 전 그대로였다. 헤어 스타일, 옷 입는 법, 신발 모양까지. 놀랄 때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 찡그리곤 하던 표정 또한 그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무엇보다 눈빛이 그대로였다. 늘 과거만 바라보는 듯한 눈빛. 생동감보다는 불안과 초조가 엿보이는 눈빛.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듯한 그런 눈빛. 왜일까? 그는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내일이 같은 '생각'으로 시간의 탑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동안 그 이전 10년과 다름 없이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은 가차없이 버렸으며 가는 곳만 다녀오고 또 다녀왔다. 그는 익숙한 커피, 익숙한 음식, 익숙한 풍경이 좋았다. 괜시리 낯선 풍경으로 들어가 뻘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듣던 음악만 들었으며 새로운 음악이 가까이 오면 귀찮은 표정으로 도망갔다. 그는 노래방에 가면 30년도 넘게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불렀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현재 이 순간에서 과거의 그 순간으로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는 '지금' 노래를 부르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 '과거'의 한 지점으로 돌아가버린다. 우리는 스스로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늘 머무르고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허상이다. 우리는 현재에 발을 딛고 미래를 바라보는 듯 보이지만 대개는 과거에 속해 있다. 퇴행이다. 그러나 자신이 퇴행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할 뿐더러 자신은 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되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내 삶의 근거가 현재가 아니라 대부분 '과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면 아마도 경악하여 파랗게 질릴지도 모른다. 사실이 그렇다. 내가 삶의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자각한다는 것은 경천동지의 순간일 수 있다.


안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험이 부재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을 포함한 지식이다. 경험을 몸으로 하게 되면 이것을 '체험'이라 한다.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 즉 안다는 것은 모든 모험의 첫 관문이다. 모든 사랑의 첫 관문이다. 모든 지혜의 첫 관문이다. 작금의 시대에는 모험도, 사랑도, 지혜도 찾아보기 힘들다. 지식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이가 손으로 꼽을 만큼 드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에서 '책'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려간다. '책'이라는 단어가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다. 몸으로 이루어가는 노동은 천하게 바라본다. 21세기의 종교는 이미 '돈'이다. 돈은 새로운 신으로 등극한지 오래다. 19세기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발설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사실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발설한 니체가 도대체 왜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지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를 외면하고 배척했다. 자본주의라는 신은 19세기에도 이미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교회 또한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니 모태 신앙이었던 니체, 신의 아들이므로 비가 와도 뛰지 않겠다던 니체,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와 두 외삼촌까지 목사였던 니체, 4대째 목사 집안이었으며 성직자만 20명 넘게 배출한 집안의 아들 니체에게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마치 '신이 죽어버린' 것처럼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이다. 물질은 신이 아니다. 돈은 신이 될 수 없다. 돈은 생존하기 위해, 인간다움을 잃지 않도록 하는 최소의 단위일 뿐 돈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비전이 없다. 점점 죽어가고 있는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사막화되어 가는 지구를 바라보듯 책을 자신의 삶에서 놓아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정신을 다독이고 건강하고 튼튼하게 할 마음밥은 먹지 않고 늘 몸밥만 배부르게 먹고 또 먹고 목으로 손을 집어넣어 토하고 다시 먹는 비만의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목을 메고 요요를 경험하면서도 다시 다이어트에 미친 듯 몰입하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 마음 성형은 생각해본 적 없으나 늘 몸뚱이 성형은 쌍커풀까지도 바꿔야만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미몽의 세상을 깨울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뎅ㆍ뎅ㆍ뎅.

 

생각 하나 바뀌는데 평생이 걸릴 수 있다. 아니, 잠깨지 않은 가사 상태로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저기 떼지어 걸어가고 있다. 언데드. 생각 하나 바꾸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뀐다. 이 생각을 바꾸는 힘, '책' 속에 길이 있다. 당신의 진정한 삶에 이를 오롯한 산책길.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 <책 읽어주는 여자 블루노트> 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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