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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59) - ‘미소라 히바리’ 일본은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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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2-12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어둠에서 부흥의 등불을 밝힌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일본의 다양한 반론과 미화된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다양한 논란이 뒤엉킨 역사적인 사실을 헤아려 가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필자는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이야기를 써가면서 역설적인 방법론을 택하였습니다. 이는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의 후손이라고 전해온 소문의 배경을 확인하기에 앞서 ‘히바리’가 일본인임을 주장하는 내용에 대한 실증적인 사실성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얼핏 비슷한 논리 같지만, 필자가 세계의 오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일깨운 지혜입니다. 특히 일본이 우리의 영토 독도와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의 문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신성한 역사마저 왜곡하는 사실을 직시한 것입니다. 이는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소문의 사실성을 확인하여도 다시 그 사실성을 검증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빤한 까닭입니다. 이에 명확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사실성에 대한 거짓을 확인하게 되면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 없는 효율성을 중시한 것입니다.       

 

▲ 출처: (좌) 미소라 히비라 기사 (우) 미소라 히바리와 아버지 http://ojouclub.bbs.fc2.com/?act=reply&tid=4881260     © 브레이크뉴스

 

 

이러한 관점에서 오랜 세월이 지난 자료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962년 4월 26일 자로 발행된 일본의 주간잡지인 ‘주간실화 특보’(週刊実話特報)에 실린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필자가 게재한 사진 자료의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잡지는 3대 특집 중 하나로 ‘미소라 히바리’가 중병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美空ひばり重病の父に寄す祈り)라는 제목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담고 있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일본 최대의 영화 제작사인 ‘도에이’(東映) 에서 ‘와타나베 쿠니오’(渡辺邦男. 1899~1981)감독이 ‘히바리’의 민요시리즈 영화 중 제3탄 작품으로 ‘구마모토’(熊本) 민요 ‘오데모양’(おてもやん)을 바탕으로 ‘민요의 여행 사쿠라지마’(民謡の旅 桜島)라는 작품을 구마모토와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현지 촬영 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촬영지인 구마모토의 ‘야마가 온천’(山鹿温泉)에 ‘히바리’를 보려는 7만 명의 인파가 인근 도시에서 몰려들었을 만큼 ‘히바리’의 인기는 일본열도를 달구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히바리’에게 긴급한 상황이 감지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히바리’ 곁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던 매니저이며 어머니인 ‘가토 기미에’가 몇 일째 보이지 않으면서 그 사유를 추적하던 기자들 사이에 ‘히바리’ 아버지 위독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취재 경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진상은 당시 3월 1일부터 ‘요코하마 중앙병원’에 결핵으로 입원하고 있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상태가 악화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히바리’의 자택과 병원 그리고 촬영장을 오가며 취재하였던 기자의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자가 찾아간 ‘히바리’ 자택의 가정부에게서 상세한 상황을 얻지 못하고 병원으로 달려가 취재한 담당 의사는 현재 상태는 긴급한 상태는 아니지만 중병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어 매니저로 늘 곁에 붙어있던 어머니 ‘가토 기미에’가 남편의 간호를 위하여 병원으로 떠나 혼자 있던 촬영장의 ‘히바리’는 촬영일정에 밀려 아버지의 병실에 가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어 ‘히바리’가 구마모토 촬영에 들어가면서 만났던 아버지에게서 유언을 들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은 지켜 내고 싶다는 ‘히바리’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엇이든 나를 잘 아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하고 사랑한다는 ‘히바리’의 말을 전하면서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기자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기자는 천재 스타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조용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타의 부모라는 사실을 과시하거나 명성을 이용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딸 ‘히바리’에 대하여 깊은 배려를 하며 스타로 성장하는 딸의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온 인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부인과의 결혼 이야기에서부터 삶의 터전이었던 생선가게 이야기를 통하여 부인과 함께 딸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온 바탕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생선가게 이후 1945년 히바리 아버지가 전쟁 종전 후 군에서 돌아와 개업하였던 미소라의 초밥집(美之 壽詞) 이야기와 함께 당시 최근 부동산 회사(藤美産業)를 설립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히바리’의 천재적인 재능을 살려주기 위하여 당시 패전 이후 요코하마 해군 군악대에서 입찰에 내놓은 악기 작은 북과 기타 그리고 트럼펫 바이올린 클라리넷등을 사들이고 ‘요코하마 청년단’이 소장한 큰북을 빌려 미소라 악단을 만들었던 내용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사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기사를 매듭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히바리’ 아버지가 표면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있었지만, 그는 본래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품이었다는 내용입니다. 필자는 이와 같은 ‘히바리’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표면에 설 수 없는 처지’라고 써 내려간 일본 기자의 행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당시 기사가 쓰인 시점의 1962년 4월 26일 자 ‘히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히바리’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와 이러한 주인공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 일본의 모든 언론과 기록으로 존재하는 내용이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유튜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히바리’에 관련된 영상 자료이거나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35년간 딸 ‘히바리’의 매니저로 활약한 어머니에게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히바리의 어머니 ‘가토 기미에’와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의 불화설과 이혼설을 담으면서 ‘히바리’의 아버지는 연예 활동을 반대한 폭력적이며 방탕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세월이 흐를수록 국민가수의 삶을 추모하고 회고하는 일본의 주요한 텔레비전 방송특집의 모든 영상자료에서 이러한 내용이 기정사실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기되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일본의 가장 위대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부모에 대하여 이와 같은 극명한 변화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입니다. 특히 어머니 ‘가토 기미에’에 대한 내용은 갈수록 미화되는 이야기가 늘어나면서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에 대한 부분은 갈수록 폄하된 이미지로 변화하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여러 정황과 자료를 종합하여 보면 히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불편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히바리가 스타로 발돋움 하면서 히바리의 곁에 존재하였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를 왜곡한 부분이 너무 많았던 것입니다. 이에 히바리는 자신의 자서전에 아버지의 곁에서 어머니를 빼앗아버린 죄송함을 몇 번이고 회고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과 다르게 기록되어가고 있는 부분이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생전의 보편화한 소문과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왜곡에서 오는 현상은 아닌지 우리는 깊게 이를 주시할 일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히바리’가 구마모토 촬영에 들어가면서 만났던 아버지에게서 유언을 들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뜻은 지켜 내고 싶다며 어떤 각오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기자의 인터뷰 기사에 담긴 행간이 자꾸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사가 보도된 1962년 4월 26일 이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62년 5월 29일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는 한 살 연하의 가수이며 배우인 ‘고바야시 아키라’(小林 旭.1938~)와 약혼식을 발표합니다. 당시 ‘고바야시 아키라’ 또한 공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조명기사 출신의 아버지가 재일 한국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던 사실에서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무성한 소문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결혼 발표 후 1962년 11월 5일 25세의 ‘미소라 히바리’와 24세의 ‘고바야시 아키라’가 세간의 화제 속에 세기의 결혼식'을 치루었습니다. 이러한 사랑하는 딸 ‘히바리’ 결혼식이 이루어진 이후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 1911~1963)는 11월 어느날 병세가 악화하여 병원에 입원한 이후 다음 해 1963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히바리’의 결혼은 호적에 기재되지 않는 동거형태의 결혼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으며 결국 이러한 결혼은 1년 반이 지난 후 1964년 6월 25일 오후 3시 ‘고바야시 아키라’는 자택에서 ‘미소라 히바리’는 오후 4시 30분 신주쿠 코마 극장에서 이혼을 발표합니다. 당시 이혼의 배경은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히바리’ 어머니 ‘가토 기미에’ 와 연관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미소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키라’의 결혼과 이혼에 담긴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별로도 다루기로 하고 이혼을 발표한 6월 25일이라는 날자에 담긴 의미가 숫자의 우연이었는지는 아직은 밝혀진 내용이 없습니다.

 

필자가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삶과 천재적인 예능에 담긴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가장 큰 의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소라 히바리’의 친족 관계에서 친족의 가계와 외가의 가계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일본의 전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자랑스러운 인물로 꼽히는 ‘미소라 히바리’의 양가 부모에 대한 집안의 정확한 이력과 계보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고아가 아닌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으신 위에 할아버지가 존재하고 그 할아버지를 낳은 증조할아버지가 존재하는 것은 천륜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일반인도 몇 대에 이르는 집안의 족보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가장 주요한 인물로 추앙받는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에 대한 자료가 철저하게 빠져 있다는 것은 드러내지 못할 사정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좌)미소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키라 결혼식 (중) 촬영장에서 히바리와 부모 (우) 히바리와 어머니 출처: https://en.wikipedia.org/ http://www.so-net.ne.jp/golden/tdatt_daily/20171105/     © 브레이크뉴스

 

일본에 묻습니다. 일본 전후의 역사에 부흥의 정신으로 자리한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그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빈곤하고 몰락한 가계에서 태어났다 한들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요, 이는 ‘히바리’의 더욱 소중한 정신과 빛나는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경을 떠나 가슴을 열어 존경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미소라 히바리’의 친가와 외가의 가계가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허공의 바람처럼 떠돌고 있는 사실은 일본이라는 국격과 너무나 동떨어진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미소라 히바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가문의 계보를 행정부처가 현재 확인 할 수 있는 사실 그대로 명확하게 밝혀주어야 할 것입니다.  

 

일본 가사등록제도의 역사를 근대적 관점에서 보면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시대(明治 時代)가 열린 1868년 정부가 도쿄로 이전하기도 전인 10월 시급하게 교토 정부에서 시행된 일본의 가사등록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가사등록제도의 소중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에도시대부터 전해오던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신분별 인별장(人別帳)을 폐지하면서 근대적인 가사등록제도를 구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에 따라 일본 정부는 ‘미소라 히바리’의 양가 가계에 대한 내용을 명확하게 밝혀주기 바랍니다. 이는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뜨거운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에 일본 정부가 수여한 최고의 명예로운 ‘국민 영예상’을 수상한 수상자에게 일본 정부가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라고 생각 합니다.  다음 칼럼은 (160)‘ ’미소라 히바리‘ 하늘이 내린 재능에 담긴 이야기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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