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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사를 기탁하려고 급히 돌아오라고 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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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복 소설가
기사입력 2018-02-14

▲ 이순복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위오촉 3국이 정족지세를 이루며 중국천하를 이끌며 희대의 군략가 제갈공명이 나타나 중원을 극복하려고 소위 전후출사표를 발표하고 위촉간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마지막 생명을 불태우다가 죽고 나니 촉나라가 더는 위나라로 진격하지 못했다. 덕분에 위나라는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약해졌지만 그 대신 내부에서 크고 작은 동란이 일어났다. 
 

AD239년 사마의는 어명을 받고 관중을 지키러 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낙양으로 돌아오라는 명제의 조서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사마의가 급히 낙양의 궁궐에 이르니 명제 조예의 병이 시각을 다투고 있었다. 조예는 사마의의 손을 잡고 8살 난 태자 조방(曹芳)을 보며 당부하기를
 “후사를 기탁하려고 급히 돌아오라고 했소. 경은 조상(曹爽)과 함께 태자 조방을 보필해 주시오.”
 조예가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사마의에게 부탁하자 사마의가 고명을 받들어 아뢰기를
 “안심하소서. 선제 조비께서도 폐하를 소신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조예가 그리 고명을 내리고 죽자 태자 조방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위소제(少帝)이다. 사마의와 조상은 조예의 유언에 따라 조정의 대권을 쥐고 8세난 어린 황제인 소제를 보필했다. 그러나 함께 고명을 받은 조상은 아무런 재능도 없는 범부였으나 황제의 종실이라는 것만을 믿고 사마의를 밀어내고 조정 대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나이가 많고 명망이 높기 때문에 조상은 마음대로 전횡을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그의 의견을 듣는 척했다. 그러나 나중에 심복인 하안과 등양이 조정의 중추기관을 장악하게 하고 소제에게 청하여 사마의를 태부로 올려놓았다. 태부란 병권과 거리가 먼 문관에 불과했다. 그런 다음에 조상은 동생 조희(曹羲)를 중령군(中領軍)으로 임명하여 황궁의 경호부대인 금군을 통솔하게 하고 조훈(曹訓)도 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일부 군권을 장악하게 했다. 그와 같이 판이 펼쳐지자 사마의는 불만을 품고 위장전술을 펼치기를 자신이 중풍에 걸려 어쩌지 못한다며 아예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집에서 눌러 앉아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면서 암암리에 다른 계획을 꾸몄다. 조상은 사마의가 꾀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때 마침 심복 이승이 형주자사로 부임해 가게 되자 사마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척하면서 병의 진위 여부를 알아보게 했다. 이승이 사마의의 태부 부중에 가보니 중병에 걸려 침을 질질 흘리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승은 돌아와 조상에게 말하기를
 “사마의는 숨이 붙어 있을 뿐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제 며칠을 못 넘길 것 같았습니다 주군께서는 안심하시고 베개를 높게 하고 편히 계셔도 탈이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조상은 희색이 만면해 사마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새해가 되자 소제는 전례대로 제사를 지내려고 고평릉(高平陵)으로 갔다. 이에 조상과 동생 조희가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 따라갔다. 조상 등이 황제의 어가를 모시고 남문으로 나가 고평릉을 향해 멀리 떠나가자 사마의는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를 불렀다. 그리고는 심복 군대들을 거느리고 가서 황태후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성문을 닫고 무기고를 점령하게 했다. 또한 조상과 조희의 군영을 접수하고 그들 형제의 직무도 해제시켰다.

 이때 사마의의 주청서를 중간에서 가로챈 조상은 이를 황제인 조방에게 바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때 사마의가 시중 허윤 상서 진태를 보내서 조상이 속히 돌아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군권을 내놓는다면 용서해 준다는 명령을 전하게 했다. 조상은 하는 수 없이 고스란히 군권을 내놓고 낙양에 있는 자기 부중으로 돌아왔다.
 ‘별것도 아닌 놈들에게 핍박을 받으며 산 세월이 몇 해야?’
 

사마의는 혼자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고 소제 조방을 황궁으로 영접하고 그날 밤에 군대를 풀어 조상의 저택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하고 나서 높은 누각에서 조상형제의 거동을 주시하게 한 다음 며칠 후에 조상이 역모를 꾀한다는 보고를 올리게 했다. 그것을 구실로 조상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가문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조상이 죽은 다음에 사마의는 승상이 되어 위나라 군정 대권을 전부 다 장악했다.
 ‘권불 10년이란 말이 생각나게 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사마의의 장자 사마사가 죽고 대권을 사마소가 차지하고 그 대권을 다시 사마소의 장자 사마염이 차지하더니 위나라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니 그가 바로 진무제다. 그는 전국을 통일한 후 사마씨의 천하를 오래토록 보전해 내려가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자신의 자식이나 형제와 조카들에게 영지로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뭇 별들이 달을 옹위하듯 자식과 형제들이 황실을 보호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제의 생각과는 달리 군권을 장악한 각지 번왕들의 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서 끝내 큰 변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치황제 사마충이 즉위한 후 조정 대권을 쥔 양태후의 아버지 양준은 권모술수를 써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밀어냈다. 그리하여 황후 가남풍(賈南風)과 진나라 종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황후 가남풍은 종실의 번왕들에게 상경하여 양준을 제거하라는 밀서를 내렸다. 지방에 할거한 종실의 번왕들은 그러지 않아도 조정 대권을 쥐려는 야심을 가지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던 터라 모두 다 가만풍의 말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경성으로 올라왔다. 밀서를 받고 제일 처음으로 상경한 사람은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였다.

 

황후 가남풍은 즉시 혜제의 명의로 조서를 내려 양준이 모반했다고 선포했다. 초왕 위는 황궁 경호대의 도움을 받아 양준을 잡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그리고 양준에게 붙어 있던 관원들도 모조리 목을 잘랐다. 양준의 세력을 제거한 후 황후 가남풍은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여남왕(汝南王) 사마양을 불러 황제를 보필하도록 했다. 여남왕 양은 권세욕이 강한 자라 암암리에 초왕 위의 군권을 빼앗으려고 획책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가남풍은 종실 왕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예 모두 없앨 궁리를 했다. 그녀는 먼저 혜제로 하여금 초왕 위에게 밀서를 내리게 하여 여남왕 양을 죽여 버렸다. 그리고 초왕 위에게 조정의 주요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명을 씌워서 그를 또한 죽여 버렸다. 그렇게 해서 황후 가남풍은 서진의 대권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후 가남풍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녀는 조정의 대권이 남의 손에 넘어갈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거짓으로 임신한 척하고 남몰래 여동생의 갓난아기를 안아다가 자기 소생이라고 속여먹었다. 그리고는 원래의 태자를 폐위시켜서 독약까지  먹여 죽여 버리고 밖에서 들여온 아기를 태자로 삼았다. 그 소식이 새어나가자 종실이 물 끓듯 들끓었다. 사람들은 사마씨의 천하를 빼앗으려는 가황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조왕(趙王) 사마윤(司馬倫)이 가장 먼저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궁으로 들어왔다. 조왕 윤은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을 무시하고 가황후를 폐위시키고 독살하였으며 혜제마저도 폐하고는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었다.
 

그때 허창을 지키고 있던 제왕 경은 조왕 윤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만이 많았다. 그는 각지에다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왕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냈다. 조왕 윤이 순식간에 조정을 장악해 버리자 정권욕이 큰 야심이 가득한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이 제왕 사마경과 연합하여 조왕을 공격했다. 3왕의 연합 공격을 받고 조왕 윤은 패배하였으며 결국 살해당했다. 낙양으로 들어온 제왕 사마경은 조정 대권을 틀어쥐고 밤낮 주색에 빠져 지냈다. 이를 틈을 타서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장사왕 사마예를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제왕 사마경은 장사왕 사마예를 지지하지 아니하고 몇 년간을 싸우다가 결국 패하고 목이 잘렸다.
 

제왕 사마경을 죽인 장사왕 사마예는 즉시 입궁하여 조정 대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장사왕 사마예가 느닷없이 혼자서 조정 대권을 독점하자 하간왕 사마옹이 배가 아파서 가만히 있지 않고 들고 일어났다.
 ‘싸울 때는 같이 싸우고 권력은 혼자 독점하다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어디 있는가.’
 크게 격분한 하간왕 옹은 성도왕 영과 연합해서 장사왕 예를 공격했다. 장사왕과 성도왕의 군대는 낙양 부근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렇게 쌍방이 어지럽게 싸우고 있을 때 낙양성 안에 있던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이 장사왕 예를 기습하여 불태워 죽여 버렸다. 이때 성도왕 영이 낙양성 안으로 들어와 승상 자리를 차지하고 조정 대권을 틀어쥐었다.
 

이와 같이 사태가 묘하게 전개되자 동해왕 사마월이 가만히 있지 않고 들고 일어났다.
 ‘장사왕 예를 죽인 공로는 자신에게 있는데 엉뚱한 성도왕 영이 조정 대권을 독차지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는가.’
 

동해왕 월은 혜제의 명의를 빌어 성도왕 영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성도왕 영은 혜제를 데리고 낙양을 떠나 장안으로 도망쳤다. 그때 장안은 하간왕 옹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간왕 옹은 실력이 약해서 도망쳐온 성도왕 영을 배제하고 자신이 혜제를 통제했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 조정은 하간왕 옹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동해왕 월은 왕준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왕준과 연합하여 관중을 들이쳤다. 그런 다음에 하간왕 옹을 격파하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동해왕 월은 혜제와 성도왕 영과 하간왕 옹을 데리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들 셋을 모두 죽였다. 그런 다음 사마치(司馬熾)를 황제로 올려놓으니 그가 바로 회제(懷帝)이다.
 AD307년 회제가 즉위하여 연호를 영가라 했다. 황권을 빼앗기 위한 8왕의 골육상쟁이 비로소 한 단락을 매듭짓게 되었다.
 ‘팔왕(八王)의 난은 16년 동안 온 나라를 전란 속에 빠뜨렸다.’
 8왕 중에서 일곱이 죽어서 국력은 형편없이 쇠약해졌다. 또한 이 틈을 타서 북방과 서부의 소수민족이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로 말미암아 서진왕조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 만신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마씨의 기둥 이라할 수 있는 7왕이 죽었으니 인물들이 사라진 사마씨의 앞날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계속>wwqq1020@naver.com


*필자/이순복.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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