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예술혼을 위하여 (167) - 일본 음악사 이야기

- 작게+ 크게

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3-12

1603년부터 1868년까지 865년간 일본을 통치하여온 ‘에도 막부 시대’ 가 막을 내리고 명치유신 시대’(明治 時代. 1868~1912) 가 열린 이후 일본에서는 변화의 물결이 높게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 최초의 근대 음악학교 ‘도쿄음악학교’가 설립되어 1890년 개교식이 열렸습니다. 당시 개교식에서는 일본의 전통현악기 ‘고토’(箏) 의 선율로 이루어진 노래 ‘도시의 봄’(都の春)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 ‘메이지 시대’(明治 時代. 1868~1912)를 맞아 도시에 찾아온 봄처럼 학교의 미래를 찬양하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일본 ‘규슈’(九州) 에 도시 ‘사가번’(佐賀藩) 의 마지막 영주이었던 ‘나베시마 나호이로’(鍋島直大. 1846~1921)가 작사하였습니다. 이 음악의 작곡은 ‘야마세파’(山勢派) 의 3대 당주인 ‘야마세 쇼인’(山勢松韻. 1845~1908)이 당대의 음악가 ‘나가세 마사오이치’(長瀬勝男一. 1894~1907)와 ‘쿠시다 에이세이’(櫛田栄清, 1845~1905)와 협력하여 작곡하였습니다. 이러한 음악 ‘도시의 봄’(都の春)이 ‘일본 최초의 근대 음악학교 ‘도쿄음악학교’의 개교식에 흐른배경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 (좌로부터) 구 도쿄음악교학교 / ‘나베시마 나호이로’(鍋島直大)/ ‘야마세 쇼인’(山勢松韻) 출처: https://en.wikipedia.org / https://www.asahi.com/articles/photo/AS20170817002011.html     © 브레이크뉴스

 

 

오랜 막번(幕藩) 체제의 그릇된 세습을 타파하고 서양문물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라는 시대적 부흥을 목표로 각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물밀 듯이 밀려드는 서양문화의 도입에서 가장 빠르게 이를 흡수하고 융화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관계 당국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유한 전통의 보존과 계승을 안고 혁신이라는 바람을 안아야 하는 점에서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본의 가장 많은 이야기가 있는 메이지 유신의 시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음악사를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일본 음악의 역사는 크게 에도 시대까지의 음악을 전통음악으로 간주하여 메이지 시대 이후 서양음악에 영향을 가진 음악과 구분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나라(奈良) 시대 720년에 편찬된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으로 살펴보면 453년 일본의 19대 ‘인교 천황’(允恭天皇)의 장례식에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58)이 악공 80 여명과 여러 악기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서 ‘일본서기’는 이를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의 전체적인 내용이 일본 역사에 유리하게 기술된 사실을 인식하여 기록의 참고로 삼습니다.

 

이는 일본열도의 세력 ‘야마토왜’(大和倭) 가 4세기 후반 한반도 남쪽에 진출하여 백제와 신라와 가야를 지배하면서 가야에 임나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까지 지배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왜곡한 주장은 오늘날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연구를 17세기부터 시작하여 여러 문헌을 아전인수 격으로 인용하여 19세기 말 즉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이를 정리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 이를 전략적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를 엄밀하게 돌이켜 보면 일본이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하였으나 종전 이후 주요 강대국에 밀려 전쟁 포상의 배분에서 제외되었던 사실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내용입니다. 이에 일본은 세계적으로 팽배하였던 식민지정책 즉 빼앗아 삼키면 된다는 강대국의 전략을 답습하여 우리나라를 침탈한 사전의 치밀한 계획을 살피게 됩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 식민 지배를 국제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와 같은 ‘임나일본부설’을 활용하였던 사실에서 분명하게 증명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월북 역사학자 ‘김석형’(金錫亨. 1915~1996)이 오랜 연구를 통한 한반도 분국설(分國說)에 의하여 일본이 주장하는 허구의 실체를 낱낱이 반박하였습니다. 월북 역사학자 ‘김석형’은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삼한 시대와 삼국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국인에 의하여 삼한과 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이 일본열도 곳곳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임나일본부’는 일본에 설치된 가야국의 분국인 임나에 설치되었던 가야국의 기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변조되었다는 내용을 세계 학술계에 발표한 일본 ‘와코대학’(和光大学) 교수이었던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진희 교수’(李進熙. 1929~2012)의 연구와 함께 국내외 역사학계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월북 역사학자 ‘김석형’은 대구에서 태어나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과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수감 중 일본이 패망하여 풀려났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조교수를 거쳐 1946년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가 되어 우리나라 고대사와 일본의 그릇된 식민사관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학자입니다.
 
일본의 사학계도 이와 같은 ‘임나일본부설’ 대한 문제를 인식하여 지난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상호 간에 '임나일본부' 용어사용 금지에 대한 공동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교과서에 그릇된 역사관의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싣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러한 일본의 그릇된 ‘임나일본부설’에 대하여 살펴오면서 일제 강점기 시대에 우리의 역사적 사료를 침탈하여 마음대로 주무르고 반죽하면서 이러한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치밀한 계획이 존재하였던 사실을 감지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별도로 다루기로 합니다)

 

다시 이어서 우리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진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554년 일본 궁중에 와있던 백제 음악인과 교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523~554) 시대의 팔 품의 관직을 가진 삼근(三斤)이라는 음악인이 일본에 건너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554년 이전에 이미 여러 백제 음악인이 일본 궁중에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전하는 기록으로 당시 일본에는 궁중 연희를 치를만한 악기와 음악인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후 백제 무왕‘(600~640) 시대의 예인 ’미마지‘(味摩之)가 서기 612년에 탈춤 ’기악‘(伎樂) 을 일본에 전하여 일본 전통 가면극 ’기가쿠‘(伎樂, Gigaku)가 존재한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게 수준 높은 음악이 존재한 고구려 음악이 일본에 전해진 기록은 684년 제40대 천황(天武天皇.?~686) 때입니다. 이는 ‘고마가쿠’(高麗樂) 로 전해져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雅樂-Gagaku)중 ‘신소우도쿠’(しんそうとく-進走禿) 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고구려와 백제가 당시 같은 악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본에 전해져 각기 다른 음악으로 전해진 내용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이 당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또한. 이렇게 음악을 전해 받은 나라가 음악을 전해준 나라의 지배국이었다는 황당한 역사 왜곡으로 덩어리진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담아 교육하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이와 같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록에서 증명하고 있는 중국의 ‘수나라’(隋. 581~630)와 ‘당나라’(唐. 618~907)의 음악 ‘도가쿠’(唐樂) 에 앞서 우리나라에서 전해진 ‘고마가쿠’(高麗樂) 가 바탕이 된 일본의 전통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와 함께 일본의 고유한 음악 중 무용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 ‘쿠니부리노 우타마이’(国風歌舞) 와 가요인 ‘우타이모노’(謡物) 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일본의 전통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의 ‘도가쿠’(唐樂) 와 ‘고마가쿠’(高麗樂) 는 관현악 중심의 음악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용 분야의 음악을 ‘부가쿠’(舞楽) 로 기악 합주의 독립된 음악을 ‘칸겐’(管弦) 으로 구분하며 이외의 다양한 민간 속악을 ‘호가쿠’(邦樂) 로 분류합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나라 시대’(奈良 時代. 710~794)에 중국 당나라에서 도입된 해학과 곡예의 종합적인 공연예술 ‘백희’(百戯)가 민간의 속악이라는 뜻을 가진 ‘상가쿠’(散楽)로 뿌리를 내려 ‘사루가쿠’(猿楽)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산가쿠(散楽) 속요(俗謠)에서 ‘헤이안 시대’(平安 時代. 794~1185)에 궁정 음악으로까지 발전한 ‘사이바라’(催馬樂) 이후 농촌의 모내기 철 농악에서 발달한 ‘덴가쿠’(田樂)와 한시에 선율을 붙여 읊는 ‘로에이’(朗詠)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고대 가요에서 발전한 ‘사이바라’(催馬樂) 와 한시에 선율을 붙여 읊는 ‘로에이’(朗詠) 의 역사를 헤아려 보면 ‘나라 시대’에서부터 전해온 ‘아즈마오비노우타’(東遊歌) 가 전통적인 의식에서 이루어진 음악인 점과 달리 ‘사이바라’(催馬樂) 와 ‘로에이’(朗詠) 는 서민의 생활상에서 빚어낸 음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헤이안 시대에 ‘로에이’(朗詠) 음악을 뜻하는 ‘에이교쿠’(郢曲) 가 궁중의 가요에서부터 속요에 이르는 모든 가요를 통칭한 사실과 맞닿은 맥락입니다.
 
이와 같은 일본 음악의 역사를 헤아려오다 보면 일본의 대표적인 종합적인 공연 예술 ‘사루가쿠’(猿楽)를 만나게 됩니다. ‘사루가쿠’는 원숭이 음악이라는 한자어의 뜻처럼 흉내 내기와 서커스와 같은 해학적이며 기능적인 공연 예술입니다. 이는 일본 궁중에서도 많은 공연이 이루어져 나라 시대 이전 701년 ‘다이호’(大宝) 1년에 궁중에 설치된 음악교습소 ‘가가쿠료’(雅楽寮)에서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와 함께 교습이 이루어지면서 나라 시대에 ‘사루가쿠’(猿楽)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상가쿠고’(散樂戸)가 생겨났습니다. 이후 782년 제50대 천황인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이 궁중에서 공연을 금지하면서 양성소 ‘상가쿠고’(散樂戸)도 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이후 ‘사루가쿠’(猿楽)는 사찰의 법회와 제례에서 의식적인 공연을 펼치는 ‘사루가쿠호우시’(猿楽法師)와 민간에서 귀족세력과 무사세력의 후원으로 공연을 펼쳐왔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헤이안 시대’(平安 時代. 794~1185)와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시대를 거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6~1573) 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 時代) 또는 ‘쇼쿠호 시대’( (織豊時代. 1568~1603)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면서 일본의 다양한 전통예능과 음악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특히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1358~1408)는 ‘사루가쿠시’(猿楽師) ‘간아미’(観阿弥. 1333~1384)와 그의 아들 ‘제아미’(世阿弥. 1363~1443)의 재능을 각별하게 후원하여 당시 크게 번성하던 ‘덴가쿠’(田樂)와 동등한 위상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좌로부터) ‘日本書紀’ / ‘사루가쿠’(猿楽) ‘간아미’(観阿弥) 동상/ 岐阜県 ‘사루가쿠’ 무대 출처 :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당시 농촌의 농악에서 발전한 ‘덴가쿠’(田樂) 가 공연으로 발전하면서 세력가의 후원으로 많은 ‘덴가쿠호우시’(田樂法師)가 양성되어 교토에 협회(本座)가 생겨나고 나라에 지부 신좌(新座)가 생겨나는 큰 번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극히 절제된 표현을 바탕으로 불교적인 정신성을 대중적으로 펼쳐간 ‘간아미’(観阿弥. 1333~1384)의 ‘사루가쿠’(猿楽)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특별한 인정을 받으면서 ‘사루가쿠’(猿楽)의 다른 파벌 ‘곤파루류’(金春流) 와 ‘호쇼류’(宝生流) 가 ‘간아미’의 공연 양식을 추종하였습니다. 또한, 에도 막부시대에는 이러한 ‘사루가쿠’(猿楽)를 사무라이 무사의 필수적인 교양 ‘사무라이시기가쿠‘(武家式樂)’로 지목하면서 오랫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자리하였습니다.

 

이렇듯 일본의 음악은 음악과 공연이 어우러지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하여왔습니다. 이러한 음악 예술을 아우른 명칭이 ‘노’(能) 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루가쿠노’(猿楽能)에서 전해진 ‘노’(能) 는 ‘하야시’(囃子) 라는 반주의 음악과 노래 ‘우타이’(謡) 그리고 춤과 연기를 뜻하는 ‘쇼사’(所作) 로 이루어진 공연예술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 가무극 ‘노’(能)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전통 가면극인 ‘노가쿠’(能楽) 가 탄생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이러한 ‘노’(能) 형식의 연극무대에서 무대장치를 바꾸어야 하는 극과 극 사이에 관객의 분위기를 이끄는 해학극 ‘교오겡’(狂言) 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오겡’(狂言) 은 무로마치 시대에 기록으로 전해지는 ‘곡케이’(滑稽) 에 바탕을 둔 예능으로 ‘제아미’(世阿弥. 1363~1443)가 ‘사루가쿠노’(猿楽能)공연 에서 막간극으로 펼치면서 이후 독립된 희극 ‘쇼오게키’(笑劇) 로 발전하였으며 13세기경 관서지방에서 새해에 복을 축원하며 잡귀를 쫓는 우리의 보름 굿 패 와 비슷한 만자이(万歲)라는 놀이패와 맞물려 ‘만자이’(漫才) 즉 만담의 역사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출발한 ‘에비스카키’(夷舁き)라는 인형놀이패에서 발전하여 이야기를 읊조리는 ‘조오루리’(淨瑠璃) 와 접목한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 인형극이 탄생하였습니다. 이후 인형극 전용 극장 ‘분라쿠좌’(文樂座) 가 생겨나는 번성을 이루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인형극 ‘분라쿠’(文樂) 가 탄생한 사실도 참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필자가 이웃 나라 일본의 음악사를 이렇듯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로 역사의 교훈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록으로 증명되는 지난 1700여 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실질적으로 훨씬 그 이전이었을 가능성도 많은 시대에 우리의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이는 지난 20여 년 전부터 일본 열도를 뒤흔든 한류의 바람인 우리의 음악과 예능이 이와 같은 오랜 역사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일깨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난 1700여 년 전 우리의 음악이 지난 한류의 열풍처럼 일본 궁중과 세간을 뒤흔든 감성의 바람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감추고 왜곡하려는 오랜 일본의 저의가 영원한 문화의 속국에서 벗어나려는 가엾은 몸부림이라는 사실에 수긍은 가지만 역사란 감출 수 없는 진실의 그림자임을 일본 정부는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에 오늘날에도 그릇된 역사 왜곡을 자행하는 ‘아베 정부’에게 훗날 후손들이 진실의 역사 앞에서 영원히 머리를 숙여야 하는 굴레를 물려주는 우를 범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전합니다. 이어 1890년 ‘일본 최초의 근대 음악학교 ‘도쿄음악학교’에 담긴 역사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다음 칼럼은 (168) ‘도쿄음악학교’ 이야기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 브레이크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