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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 뜰에 세워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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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태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3-13

▲ 안중근 의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옆에 가면 6미터 높이의 안중근의사 동상이 멋지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15년 11월11일 준공식을 했다. 왜 안중근의사 동상을 세웠을까? 그리고 왜 위치를 국회 헌정기념관으로 선택했을까? 2015년 초 어느 날 조각가 한분이 안 의사 동상을 제작해보고 싶다고 찾아왔다. 육군사관학교에 부지는 확보되어 있는데 제작비용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다. 평소 남 돕는 일을 즐기는 성격이라 쉽게 생각하고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막상 수 억원이 들어가는 비용을 후원하려니까 쉽지가 않았다.

 

대기업은 물론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리곤 몇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공부하게 되었다. 안 의사의 삶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한학을 공부했고 청년이 되어서는 말을 타고 사냥을 즐겨했다. 1906년 인재양성을 위해 삼흥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당시 조선은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나이어린 순종이 즉위하여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1905년 일본과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1907년 사법권도 빼앗기고 군대마저 해체되어 일본의 군ᆞ경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다. 그 당시 국민들은 지금처럼 설마설마 하면서 큰 저항도 하지 못한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일본의 회유와 협박에 끌려서 하나하나씩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갔다. 조만간 나라가 통채로 일본에게 넘어갈것이란걸 알게 된 애국지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안의사는 11명의 동지들과 구국운동을 위해 새끼손가락을 잘라 피로 맹세한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이또히로부미를 암살할 거사를 계획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얼빈 역에서 1909년 10월26일 이토를 척살하는데 성공했다.

 

1910년 한일합병 되기 바로 전해였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뤼순에 있는 일본 법정에서 1910년 2월14일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를 하지 않은 채 3월26일 겨우 32살의 나이로 나라를 위해 순국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그동안 살아온 내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했다. 1980년 25살 나이에 미국 유학을 가서 26년간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살다가 50살이 넘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사실 나라 걱정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개인의 명예와 출세를 위해 공부하고 사업을 했지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주위에 나라를 위해 정치를 하겠다고 뛰어다니는 20대30대의 젊은 청년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난 저 나이에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저 청년들은 하고 있구나.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안 의사 동상을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도 많은데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하나 못 만들어서야 어찌 후대에 얼굴을 들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돈과 부지허가 그리고 동상제작, 즉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했다. 동상제작에 필요한 고증자료 확보를 위해 남산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아갔다. 당시 안응모 이사장이 많은 자료와 도록 등을 제공해 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동상을 세울 장소는 몇 군데 추천을 받았지만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의미있는 국회에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라 부지에 사용허가를 받는 건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국회부의장인 정갑윤 국회의원 방을 찾아갔다. 안면부지의 국회의원을 찾아갈 용기는 아마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심과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 부의장에게 자초지종 설명하고 '안중근의사 동상건립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는데 총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모금이나 동상제작은 걱정 안 하시도록 할 테니 총재직만 수락해달라고 했다. 정부의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좋은 일을 하는데 돕겠다고 나섰다.

 

정 부의장 덕분에 국회동상 건립허가는 절차에 따라 순탄하게 이뤄졌다. 가장 어려운 모금은 개별적으로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취지와 의미를 설명하고 수 백명의 동참자들을 모았다. 결심하고 6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드디어 단상 높이 3미터, 동상 높이 3미터, 총 6미터의 안중근 의사 동상이 국회 헌정기념관에 세워졌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안 의사 동상들 중 가장 고증이 잘되고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조각가의 열정이 잘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가슴 뿌듯한 적이 없었다.

 

▲ 정연태     ©브레이크뉴스

외국 생활을 오래해 본 사람들은 조국의 의미를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다. 조국이란?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 회고록 '녹두꽃' 중, '해방 후 귀국전야'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서신연락조차 닿지 못했던 중원대륙에 흙바람이 휘몰아칠 때,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듯이 쏟아져내려와 가슴을 갈갈이 찢어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그래서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곳, 그곳이 내 나라였다. 내조국이었다. 그렇게 조국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다. 어린아이가 집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안에 계시듯이 조국은, 잃어버렸던 조국은 그렇게 있었다" 이 글은 '조국'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어서 공유한다.

 

2015년 11월11일 안 의사 동상 제막식 날 행사를 위해 안 의사 추모곡을 유명한 동요작곡가이신 김봉학 선생께 부탁했다. '아 님이시여'란 이 추모곡은 지금도 국회헌정기념관 동상에 가면 오른편에 노래를 듣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단지에 손을 대면 노래가 나온다.

 

안중근의사 추모곡(아! 님이시여)
-김봉학작사 ㆍ작곡-

 

“1. 산천도 놀랐던 그날의 기개 지금도 귓가에 들릴듯한데
아! 무심한 세월만 흘러 백년하고도 다섯해
대한국인 쓰고 찍은 손도장 아직도 온기가 남은듯한데
앞산에 진달래 피기도 전에 스러져간 님이시여!
그날 외치시던 대한의 독립
그렇게 갈구하던 동양평화
이제 우리가 이어받아서 찬란히 꽃피우리오!
하느님! 도마를 어여삐 여겨 하늘에 올리어 별되게 하사
행여나 우리가 갈길 잃으면 반짝이게 하소서!


2. 품었던 큰꿈도 못 펼쳐보고 바라던 소망도 못보신 채로
아! 서럽다! 푸른청춘 서른두살 짧은 생애!
대한국인 손도장 볼 때마다 가슴을 저미는 님향한 설움
온 산에 진달래 붉게 피었오
사모하는 님이시여!
오늘 우리가 누리는 평화
세계가 감탄하는 놀라운 번영
님의 뜻이여! 님의 덕이요! 영원히 잊지 않으리오!
하느님! 도마를 귀하게 쓰셔 목청 큰 천둥이 되게 하시어
행여나 우리가 딴 길로 가면 호통치게 하소서 아! 님이시여!“


가사만 읽어도 마음이 짠하게 아려온다. 오는 3월26일은 안 의사의 순국 108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에는 국회헌정기념관 동상 앞에서 정갑윤 총재-지인들과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참고로 남산에 가면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고 그곳에는 많은 도서들과 영상자료들을 볼 수 있다.


*필자/정연태. 국가혁신포럼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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