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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88) -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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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5-15

프랑스 출신의 종교 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를 오가며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던 시기에 독일 루터교 신자들이 부르는 찬송을 접하게 되면서 음악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인식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어 예배음악을 구상하면서 시편과 함께 성서의 신약과 구약에서 시편과 같은 내용을 헤아려 ‘스트라스부르 시편’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 칼뱅’의 예배음악이 품은 의식을 헤아려보면 그가 루터의 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더욱 혁신적인 종교를 추구한 의식이 분명하였음이 살펴집니다. 이는 루터의 찬송가가 대체로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을 바탕으로 이를 새롭게 수정하여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였지만, ‘장 칼뱅’은 철저하게 성서를 바탕으로 거룩한 정신성을 노래하는 내용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예배음악에서 감각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감성을 차단하여 기교적인 다성음악이거나 악기의 사용을 배제한 무반주 찬송으로 일관하였던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살펴지는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 칼뱅’의 교회음악의 근원에 대하여 살펴보면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Clément Marot. 1496~1544)를 만나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인이었던 아버지 ‘장 마로’(Jean Marot. 1463~1526)의 아들인 ‘클레망 마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운문법과 다양한 학문을 공부한 후 1506년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프랑수와 1세 왕’(François I. 1494~1547)의 누나로 시인이며 작가인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공주의 후원을 받으며 작가로 활동하였습니다.

 

▲ (좌로부터) 제네바 시편. 1542 / 스트라스부르 시편. 1539)/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여기서 잠시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필자가 지난 칼럼 181편 ‘영국 헨리 8세 왕'(Henry VIII. 1491~1547)과 여섯 명의 부인들’의 이야기 중 ‘헨리 8세 왕’이 부인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 무효를 선언하면서 역사의 바람을 일으켰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왕비’(Anne Boleyn. 1507~1536)와 연관된 내용입니다. 그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왕실의 ‘클로드 왕비’(Claude of France. 1499~1524)의 궁전에서 근무하였을 때 바로 왕비의 시누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시중을 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한 사이로 지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1501년 ‘캐서린 왕비’(1485~1536)와 결혼하였던 영국의 후계자 ‘아서 튜더’(Arthur Tudor. 1486~1502)가 1502년 결혼 6개월 만에 병사하면서 동생이었던 ‘영국 헨리 8세 왕'(1491~1547)이 1503년 영국 왕실의 후계자임을 증명하는 웨일스 왕자(Prince of Wales)가 되었을 때 11살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1492~1549)공주와 깊은 혼담이 오갔으나 동맹 관계의 복잡한 저울질로 성사되지 않았던 사실입니다. 

  

이처럼 묘하게 얽혀든 역사를 헤아리며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공주를 살펴보면 그는 뛰어난 서정 시인이었으며 너무나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모델로 귀족사회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단편소설‘ 7일 이야기’(Heptaméron)를 발표하여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작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적 소양이 깊었던 그는 인문주의학자들을 언제나 따뜻하게 후원하였으며 당시로써는 금기와 같았던 종교 개혁가들을 보호하여 복음주의 활동의 바탕을 열어주었던 개혁적인 의식을 품은 여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살피게 되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듯 문화와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적인 후원을 베풀었던 ‘프랑수아 1세 왕’(François I. 1494~1547)과 그의 누나인 시인이며 작가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Marguerite de Navarre. 1492~1549)가 인류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마지막 생애를 헌신적으로 보살폈으며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숨결을 품었던 이야기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3년 9 월부터 1516년까지 로마 교황청에 있었습니다. 이는 메디치가의 '레오 10세 교황'(Pope Leo X. 1475~1521)이 1513년 교황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고향 피렌체를 주름잡았던 당대의 건축가와 조각가와 화가들을 모두 집합시켰습니다. 이는 필자가 다음 회에 이야기하는 '레오 10세 교황'이 모든 것을 투자한 야심찬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탈리아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는 ‘레오 10세 교황’의 전임자인 ‘율리우스 2세 교황’의 명으로1506년 바티칸 궁전 ‘산피에트로대성당’의 재건축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레오 10세 교황’이 즉위하여 이탈리아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를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그리고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와 같은 세기의 예술가들을 모두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이는 전임 교황인 ‘율리우스 2세 교황’이 이탈리아식 궁전의 전망대 ‘벨베데레’(Belvedere)와 안뜰 정원을 만들었던 대공사를 이어받아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작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레오 10세 교황’이 프랑스 왕위에 오른 ‘프랑수아 1세 왕’이 교황청을 방문하면서 그가 예술적 소양이 높다는 것을 알고 1515년 10월 세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12월 19일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레오 10세 교황’과 ‘프랑수아 1세 왕’의 연석회의에 참석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가슴을 열어 백합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기계 사자 조각품을 의뢰받으면서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교황청 공사와 관련하여 건축가와 예술가들 사이에 서로의 주장이 충돌하면서 개성이 유난히 강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불화가 생겨난 내용과 맞닿은 이야기로 나중 기회가 되면 다시 다룰 것입니다. 이렇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프랑스로 이동하여 간 곳은 프랑스 중부 ‘앙부아즈’(Amboise)에 있는 ‘앙부아즈성’(Château d'Amboise) 곁에 있는 작은 성  ‘클로 뤼세 성’(Clos Lucé Castle)이었습니다. 이는 ‘프랑수아 1세 왕’과 그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가 어려서 자랐던 너무나 많은 추억을 가진 성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은 예술에 대한 분명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 누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가 인류가 낳은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헤아려 동생인 왕에게 간청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거주하였던 ‘클로 뤼세 성’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아련한 추억의 놀이터 ‘앙부아즈성’과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러한 헌신적인 후원 속에서 제자인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함께 생활하며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와 같은 세기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를 헤아려 준 아름다운 눈빛을 안고 1519년 5월 2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당시 끝까지 품에 안았던 세기의 걸작 모나리자는 자신을 헤아려준 아름다운 눈빛의 나라에 영원한 눈빛과 미소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 (좌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 ‘클로 뤼세 성’/ 모니리자/ ‘앙부아즈성’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곁에서 활동하였던 시인 ‘클레망 마로’는 1524년 ‘프랑수아 1세 왕’의 이탈리아 원정길에 동행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개혁적인 활동을 하였던 그는 1526년 이단으로 체포되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공주의 구원으로 풀려났습니다. 이후 1529년 시인이며 출판사를 운영하였던 친구 ‘에티엔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가 금서 출판혐의로 투옥되었을 때 그를 변호하는 시를 발표하여 당국의 사찰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1534년 10월 17일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 놓은 ‘벽보 사건’(Affair of the Placards)에 연루되어 왕실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페라라 공국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이후 ‘프랑수아 1세 왕’의 도움으로 1539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당시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장 칼뱅’을 만나 이른바 예배 음악 ‘스트라스부르 시편’에 대한 번역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를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당시 ‘장 칼뱅’이 1537년 제네바 당국에 예배 음악의 필요성과 여러 개혁적인 정책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1538년 ‘장 칼뱅’을 종교개혁의 운명적인 험로로 인도하였던 종교 개혁가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 1865~1565)과 함께 추방령이 내려져 스트라스부르로 옮겨 개혁교회 활동을 펴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나름대로 많은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도의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시편의 번역으로 잘 알려진 시인 ‘클레망 마로’가 프랑스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화급하게 ‘클레망 마로’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시인 ‘클레망 마로’는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공주와 ‘프랑수아 1세 왕’의 후원으로 시편 번역 작업에 착수하여 1529년부터 1533년까지 6편을 번역하여 헌정하였습니다. 이는 1933년에 출판된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경건한 기도에 수록되었습니다. 이후 1534년 벽보 사건으로 이탈리아 페라라 공국으로 도피하였을 때 페라라의 공작부인 ‘르네’(Renée of France. 1510~1574)의 긴밀한 후원 속에서 시편 번역작업을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프랑수아 1세 왕’(1494~1547)의 부인이었던 ‘클로드 왕비’(1499~1524)의 동생인 ‘르네’가 언니가 결혼하였을 때 프랑스에 건너가 궁전에서 언니의 시누이었던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1492~1549)와 매우 절친하게 지낸 후 긴밀하게 교유하여왔던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클레망 마로’는 당시 30편의 시편을 번역한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후 ‘장 칼뱅’의 요청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은 30편의 번역된 시편이 바탕이 되어 19편의 시편 찬송과 ‘시므온을 위한 찬가’와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의 3곡의 찬송이 담긴 ‘스트라스부르 시편’(Strasbourg Psalter) 이 1539년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장 칼뱅’은 6편의 시편과 3곡의 찬송가 번역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클레망 마로’는 이와 같은 개혁적인 활동으로 더는 ‘프랑수아 1세 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1543년 제네바로 망명하였습니다. 이때 추방령이 해제되어 제네바에서 활동하던 ‘장 칼뱅’과 합류하여 시편 번역 작업에 열정을 바친 후 ‘클레망 마로’는 이탈리아로 떠나 ‘토리노(Torino)에서 15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클레망 마로’의 시편 번역작업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1541년 앤트워프에서 출판된 시편은 45편의 시편으로 늘어났고 프랑수아 1세 왕에게 헌정하는 서문이 담겨있었으나 출판 승인이 불허되었습니다. 이후 1542년 다시 출판된 ‘스트라스부르 시편’은 1541년 앤트워프 판을 바탕으로 ‘클레망 마로’의 30편의 시편 번역본으로 구성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1542년 ‘제네바 시편 찬송가’가 출판되면서 1543년과 1551년의 증보판이 출판되었으며 이후 1562년 150편의 완성된 ‘제네바 시편 찬송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클레망 마로’는 49편의 시편과 찬송 ‘시므온을 위한 찬가’를 번역하였으며 이후 프랑스 출신의  ‘장 칼뱅’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신학자 ‘테오도르 드 베즈’(Theodore de Beze. 1519~1605)에 의하여 번역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장 칼뱅’과 ‘클레망 마로’의 열정으로 탄생한 ‘스트라스부르 시편’ 찬송과 ‘제네바 시편’의 음악을 만들었던 음악가들을 살피게 되면 많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는 텍스트와 달리 음악의 실체적인 보존이 불가능하였던 까닭으로 악보가 게재되지 않은 초기 작품에 대하여 연속된 추정을 담은 기록들이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살펴지는 인물이 영국의 음악학자 ‘리처드 런시만 테리’(Richard Runciman Terry. 1865~1938)입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런던의 하이게이트학교(Highgate School)에서 음악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영국 로마가톨릭 베네딕토 청소년학교 음악 감독으로 근무하였던 전례음악의 연구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칼뱅 교회음악의 연구서로 1932년에 펴낸 ‘장 칼뱅의 첫 시편, 1539’(Calvin's First Psalter. 1539)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아이러니로 이루어져 있지만, 프랑스 가톨릭 궁정에서 여흥으로 시작된 프랑스 운율 시편이 프랑스 개신교의 가장 엄격한 예배의 노래가 된 것처럼 이상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프랑수아 1세 왕’과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후원으로 시인 ‘클레망 마로’가 번역한 시편을 세속적인 음악으로 노래하면서 파티를 즐겼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스트라스부르 시편’의 음악이 이와 같은 세속적인 샹송의 선율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스트라스부르 시편’과 ‘제네바 시편’의 음악을 만들었던 음악가로 알려진 인물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루터의 예배 음악 작업에 참여하였던 경력이 있는 독일 출신의 음악가 ‘볼프강 다흐슈타인’(Wolfgang Dachstein (1487-1553)이 살펴집니다. 그는 1521년 스트라스부르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Church)의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다가 1523년 루터의 종교 개혁에 동참하여 루터 예배 음악에 관여한 음악가입니다. 그가 1541년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오르간 연주자로 돌아와 근무하였던 사실에서 ‘장 칼뱅’의 예배음악 작업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와 함께 독일 ‘아이샤흐’(Aichach) 출신의 작곡가이며 가수인 ‘마티아스 그레이터’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사제로 근무하다가 1524년 루터의 개혁 교회에 동참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1538년 루터교의 인본주의자인 ‘요하네스 슈트룸’(Johannes Sturm. 1507~1589)이 1538년 설립한 ‘스트라스부르대학’ 음악교수가 되었지만 1549년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 1550년 전염병에 희생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요하네스 슈트룸’과 ‘장 칼뱅’의 접촉과 ‘스트라스부르 시편’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 출신의 정통 음악가로 영국의 음악학자 ‘리처드 런시만 테리’가 ‘스트라스부르 시편’에 대하여 언급한 세속적인 음악과 선율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음악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지게 되는 음악가가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 ‘기욤 프랑’(Guillaume Franc. 1505~1571)입니다. 그는 1542년 출판된 ‘제네바 시편’과 1565년 출판된 ‘로잔 시편’의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정통 음악가로 1541년 6월 17일 제네바 사법위원회인 200 위원회(Conseil des Deux-Cents)에서 음악학교(tenyr eschole de musique)의 정식 인가를 받은 인물입니다. 이에 ‘스트라스부르 시편’에 담긴 세속적인 음악의 형식과는 거리가 먼 음악가입니다.

 

▲ (좌로부터) 프랑수아 1세왕/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클레망 마로’/ ‘루이스 부르주아’ 시편 제100편/ 출처: https://en.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결국, 이러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랑스의 세속 음악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 Bourgeois. 1510~1559)로 남게 됩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그는 리용(Lyon)에서 세속 샹송의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545년 제네바로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1547년 제네바 시민권자로 정주하면서 처음으로 시편을 작곡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1551년 허가를 받지 않고 시편 음악을 개작한 혐의로 투옥되어 ‘장 칼뱅’의 탄원으로 석방된 이후 프랑스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유실된 기록으로 인하여 제네바로 이주하기 이전 ‘장 칼뱅’과 합류하여 ‘스트라스부르 시편’ 음악 작업을 함께 하였던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장 칼뱅’이 추구한 거룩한 예배음악과 신성한 찬송이 세속음악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추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이는 ‘루이스 부르주아’가 1545년 제네바로 이주하기 이전 ‘스트라스부르 시편’ 작업이 이루어졌을 약 7년간의 행적과 기록이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하여 철저하게 감추어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과  함께 프랑스의 음악가로 개신교로 개종하였던 ‘클로드 구디멜’(Clause Goudimel. 1514~1572)의 시편 작곡에 대한 기록이 일부 확인되고 있는 점도연구의 대상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할 내용은 ‘제네바 시편’ 2판에서 보완된 시편 제100편의 선율은 초판 ‘제네바 시편’ 134편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는 ‘테오도르 드 베즈’의 번역을 ‘루이스 부르주아’가 만든 곡으로 오늘날까지 익숙한 리듬으로 전해오는 역사적인 찬송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를 품은 ‘장 칼뱅’의 열정으로 탄생한 ‘스트라스부르 시편’과 ‘제네바 시편’의 특징은 곡조와 리듬의 간결한 구성이었습니다. 이는 ‘장 칼뱅’이 추구한 누구나 쉽게 배우고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요구에 기인한 것으로 이러한 제네바 시편이 유럽의 모든 나라와 훗날 미국 교회의 초기 부흥 당시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제네바 시편’의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체하여 보면 프랑스 세속 음악의 선율이 분명하게 흐르고 있는 사실에서 세속 음악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역사적인 역할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음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89)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5)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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