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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189) -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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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5-17

독일의 ‘루터’와 프랑스의 ‘장 칼뱅’으로 이어진 개신교 종교 개혁의 역사에서 격동하는 시대의 바람에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종교개혁 시대에 선구적인 의식을 품고 현실과 이상의 다리를 분주하게 오가며 정쟁의 비바람에 젖어 순교라는 꽃잎으로 스러져간 신학자 ‘로버트 반즈’(Robert Barnes. 1495~1540)입니다,

 

‘로버트 반즈’는 잉글랜드 동부 노퍽(Norfolk)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1514년 벨기에 루벤 대학으로 건너가 1523년 가을까지 10여 년간 공부하였습니다. 이때 당대의 석학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만났습니다. ‘에라스뮈스’는 1516년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한 이후 루벤 대학에서 2판의 교정과 보완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에라스뮈스’를 만나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던 반즈는 1523년 영국에 돌아와 케임브리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이후 1525년 크리스마스 자정미사에서 설교하였던 개혁적인 설교 내용이 문제가 되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이는 설교 내용에 대한 문제를 빌미로 그와 절친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 루터의 서적을 반입하였을 의혹에 대한 수사였던 것입니다. 당시 그는 영국함대에 설치된 수감소에서 오랜 조사를 받은 후 런던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에 구금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1528년 벨기에 북부의 도시 앤트워프(Antwerp)로 도피하여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를 찾아갔습니다.
 

▲ (좌로부터) 한스 홀베인의 토마스 크롬웰 초상화/ 에라스뮈스‘우신예찬’ 1515년 판 한스 홀베인 삽화/ 용서를 구하는 반즈와 동료 죄수들-1880년 출판 삽화/ 초상화가 한스 홀베인 자화상/ 출처: https://en.wikipedia.org     © 한국미술센터



당시 영국 ‘헨리 8세 왕’의 최측근으로 부상하여 내각 수준의 권위를 가졌던 국왕 자문기구 ‘추밀원’(Privy Counsellor)에 입각한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1540)이 ‘헨리 8세 왕’에게 긴급한 보고를 올렸습니다. 이는 반즈와 루터의 결합을 통하여 향후 영국에 미칠 영향에 대한 보고였습니다. 이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 ‘토머스 크롬웰’의 계획을 ‘헨리 8세 왕’이 허락하면서 ‘토머스 크롬웰’이 주도하는 특수한 정보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어 ‘토머스 크롬웰’의 긴밀한 친서를 휴대한 정보요원이 독일로 파견되어 ‘로버트 반즈’를 만난 후 그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531년 이렇게 영국에 돌아온 ‘반즈’는 강력한 세력자 ‘토머스 크롬웰’의 보호 아래 영국 정부와 루터교의 원만한 관계를 추구하는 협상의 중재자가 되어 일하였습니다. 이어 ‘반즈’는 1535년 비밀조직을 이끌고 독일로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과 극한 대립을 가졌던 영국 ‘헨리 8세 왕’이 루터교와 적당한 연합을 통하여 로마가톨릭을 견제하려는 매우 은밀한 정책의 추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업무를 수행하던 중에 1537년 ‘헨리 8세 왕’의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1509~1537)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반즈는 ‘토머스 크롬웰’의 긴급한 친서로 전달된 특수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헨리 8세 왕’과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의 ‘클레베 공작 요한 3세’(Johann III. 1490~1539)의 딸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1515~1557)과의 결혼을 추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 북서부의 네덜란드 국경 인근의 ‘클레베 공국’의 ‘클레베 공작 요한 3세’는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의 제자로 그의 아들 ‘빌헬름 공작’(William, Duke. 1516~1592)이 당시 독일 ‘클레베 공국’을 중심으로 서부의 신교도 프로테스탄트 동맹 세력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빌헬름 공작’의 누나 클리브스의 ‘앤’과의 결혼을 통하여 신교도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가톨릭 진영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1500~1558)와 팽팽하게 대립하였던 시대 상황에서 로마 가톨릭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략적인 이야기를 안고 ‘헨리 8세 왕’은 1540년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1515~1557)과 결혼하였으나 결혼 3개월 만에 결혼 무효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오랜 격론을 통하여 이미 1538년 루터의 개혁적인 신학을 거부하기로 하였던 맥락에서 신교도 프로테스탄트 동맹과의 연합에 대한 정략적인 효율성이 사라진 까닭이었습니다. 나아가 ‘헨리 8세 왕’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진행된 정략결혼에서 만난 신부의 모습이 큰 체격에 한 마디로 자신이 기대하고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모습에 결혼 첫날의 대면에서 발길을 돌려버린 사실이 한 몫을 거들어 서둘러 결혼 무효를 선언하면서 적당한 보상으로 무마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헨리 8세 왕’이 결혼하자마자 무효를 선언한 배경과 함께 격변의 바람이 휘몰아친 내용이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함께 한 점의 그림에서 비롯된 사실입니다. 이는 당시 ‘토머스 크롬웰’의 기획으로 급하게 정략결혼이 추진되면서 신부의 얼굴이라도 보아야 하는 문제가 생겨나면서 화급하게 ‘헨리 8세 왕’의 궁전에 불려간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초상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입니다. 그는 화가이었던 아버지 ‘한스 홀바인 장로’(Hans Holbein the Elder. 1460~1524)의 아들로 당시 유럽에서 쟁쟁한 명성을 떨친 초상화가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영국의 왕실에까지 진출하게 된 사연을 살펴보면 마치 역사의 길목마다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는 당대의 석학 에라스뮈스를 만나게 됩니다. 잠시 이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초상화가 ‘한스 홀바인’은 화가이었던 형 ‘암부로지우스 홀바인’(Ambrosius Holbein. 1494~1519)과 함께 스위스 바젤로 이주하였습니다. 당시 바젤은 1455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가 성공하면서 하나둘 인쇄회사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국제적인 인쇄 출판 도시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에 책에 필요한 목판화 제작이 매우 중요한 장인으로 대접받게 되면서 ‘한스 홀바인’ 형제는 바젤로 이주하여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뛰어난 데생력을 가지고 있었던 동생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은 목판화 제작은 물론 벽화에서부터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통하여 체득된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담은 초상화를 그려내어 바젤에 잘 알려진 화가였습니다.

 

당시 에라스뮈스가 1515년 바젤로 이동하여 ‘그리스 신약성경’을 번역하던  어느 날 그가 1509년 친구 토머스 모어의 집에서 집필하여 1511년에 출판한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의 증보판을 준비하면서 삽화를 그릴 화가 ‘한스 홀바인’을 소개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 신학자로 ‘츠빙글리’를 추종한 바젤 대학교수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1488~1552)입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1515년 ‘한스 홀바인’이 삽화를 그려낸 ‘우신예찬’ 증보판이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한스 홀바인’의 삽화는 에라스뮈스가 추구한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비판의식을 더욱 빛나게 하였던 걸작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스 홀바인’은 루터교회가 출판하는 다양한 책자의 삽화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이러한 ‘한스 홀바인’이 1523년 ‘에라스뮈스’의 초상화를 그려 그의 독창적인 초상화 기법에 감탄한 ‘에라스뮈스’가 친구인 토머스 모어에게 ‘한스 홀바인’을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1526년 영국으로 건너간 ‘한스 홀바인’은 약 4년 동안 영국에 머무르면서 ‘토머스 모어’의 초상에서부터 많은 명사의 초상화를 그려 유럽 일대에 유명 초상화가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바젤로 돌아온 그는 1532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6년 전 에라스뮈스와 토머스 모어의 주선으로 많은 인본주의자와 교유하였던 인맥을 통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1533년 ‘헨리 8세 왕’이 ‘앤 불린’(Anne Boleyn. 1507~1536)과 비밀리에 결혼한 이후 1533년 1월 결혼을 선포하는 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막후의 실력자로 등장한 ‘토머스 크롬웰’과 접촉하게 되면서 왕의 새로운 결혼을 반대하는 ‘토머스 모어’는 물론 그동안 교유하였던 인물들을 멀리하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는 새로운 실력자 ‘토머스 크롬웰’의 초상화에서부터 헨리 8세 왕과 ‘앤 불린’ 왕비의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영국 왕실 초상화가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1536년 ‘앤 불린 왕비’가 처형당하는 격변의 바람 속에서도 그는 자리를 지키며 새로운 왕비 ‘제인 시모어’의 초상을 그렸으며 유일한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의 초상을 그려낸 왕실 초상화가의 자리를 탄탄하게 지켰습니다.

 

이후 1539년 ‘헨리 8세 왕’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달려가 독일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1515~1557)과 동생 클리부스의 ‘아말리아’(Amalia of Cleves. 1517~1586)의 초상화를 사실대로 그려오라는 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에 독일 서부의 ‘뒤렌’(Düren)에 위치한 ‘브르가우 성’(Burgau Castle)에 있었던 헨리 8세 왕의 결혼 상대자 클리브스의 ‘앤’ 자매를 찾아가기 전에 실력자 ‘토머스 크롬웰’이 가능한 범주에서 좋은 느낌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후 이와 같은 내용을 고려하여 초상화를 그려왔을 때 ‘헨리 8세 왕’은 초상화로 보는 느낌에서 별다른 거부감을 드러낼 만한 요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이 이루어지고 처음 신부를 대면하였을 때 ‘헨리 8세 왕’은 크게 실망하며 그대로 발길을 돌려 버렸던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세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필자가 추정하는 내용으로는 ‘한스 홀바인’을 호출하여 초상화를 앞에 두고 실물의 차이에서 오는 내용을 추궁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오늘날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그려진 초상화를 살펴보면 많은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 (좌로부터 한스 홀바인 작품 초상화) 클리브스의 ‘앤’ 초 양피지, 65x4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제인 시모어 초상/ 에드워드 6세 초상/ 에라스뮈스 초상/ 출처: 출처: https://en.wikipedia.org     © 한국미술센터

 

이는 ‘한스 홀바인’이 ‘토머스 크롬웰’의 주문을 수용하면서도 향후 자신에게 전가될 책임을 분명하게 의식하여 그려낸 초상화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정확하게 인물의 선을 담아낸 탁월한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화면의 공간을 꽉 채운 인물의 조형적 구성이 절묘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신이 아닌 하반신 일부를 과감하게 배제해버린 구성에서 과학적으로 실제 인물의 축약된 작품임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65x48cm의 약 12호 크기의 양피지에 그려진 작품은 공간을 가득 채운 인물의 정면 배치를 통하여 작은 공간의 배경을 독특한 푸른색으로 채우면서 이를 이중의 빛깔로 처리하여 작은 공간에 앞선 인물이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효과를 드러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더욱 세세하게 살펴보면 다소곳하게 모아둔 유난히 큰 양손의 비례가 큰 체격을 분명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초상화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얼굴과 시선의 처리를 중점으로 두는데 반하여 섬세한 반지의 묘사와 복식의 장식적인 세밀한 표현에 중심을 두었던 내용입니다. 이는 그가 제작한 많은 초상화가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얼굴의 주요한 부위를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려낸 사실과 분명하게 차별화된 점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한스 홀바인’의 그동안의 처신을 종합하여 볼 때 목숨이 오가는 절박한 시점에 ‘토머스 크롬웰’이 주문한 내용을 과장하여 음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자신은 그러한 압력 속에서도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초상화를 그려냈음을 해명하였을 것이 자명합니다. 이러한 추정은 바로 이러한 사건을 기점으로 ‘헨리 8세 왕’의 ‘토머스 크롬웰’에 대한 신임의 끈이 풀어지면서 반대 세력의 집중적인 저항을 받아 결국은 재판 절차마저도 없는 사형을 선고받고 1540년 7월 28일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영국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토머스 크롬웰’은 사실상의 오늘의 영국을 기초한 인물입니다. 석회처럼 굳어가던 로마 가톨릭 권위의 압박을 걷어내고 선구적인 개혁의 그림을 그려낸 ‘토머스 크롬웰’은 40년을 분신처럼 신임받았던 영광을 한 점의 그림으로 인하여 버려진 꽃잎이 되어 재판 절차도 없는 처형의 최후를 맞아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살펴지는 또 하나의 서글픈 꽃잎이 있습니다. 선구적인 개혁의 그림을 그린 ‘토머스 크롬웰’의 약속을 안고 현실과 이상의 다리를 오가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던 신학자 ‘로버트 반즈’(Robert Barnes. 1495~1540)와 그가 이끌던 비밀조직은 ‘토머스 크롬웰’이 처형당한 이틀 후 모두 반역과 이단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으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훗날 역사는 이러한 ‘로버트 반즈’를 순교자로 평가하였습니다.

 

영국의 이상적인 개혁 정신을 품었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1485~1540)은 성경 번역의 역사에서 보면 그의 개혁적인 의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1494~1536)이 번역한 틴델역 성경’(Tyndale's Version) 중 1525년 신약 성서 영어 번역본 ‘틴델역 성경’이 독일의 보름스에서 출판된 이후 1535년 ‘헨리 8세 왕’의 결혼 무효를 반대한 죄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체포되어 약 1년간 벨기에 성에 투옥되어 1536년 10월 무렵 처형 될 때까지 ‘토머스 크롬웰’은 그의 죽음을 막으려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 (좌로부터) 한스 홀바인 작품 구약과 신약의 비유/ 한스 홀바인 형제/ 독일 ‘브르가우 성’(Burgau Castle)/ 출처: 출처: https://en.wikipedia.org     © 한국미술센터

 

이후 아우구스티노 회 수도자이었던 ‘커버데일’(Coverdale Miles. 1488~1568)이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성경과 성서 외경을 모아 미완성이었던 구약의 번역을 마무리하여 ‘윌리엄 틴들’이 수감 중이던 1535년 ‘커버데일 성경’(Coverdale Version)을 영국 왕실의 허가를 받아 완전한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하게 되었던 배경 또한, ‘토머스 크롬웰’의 막후의 협력에서 탄생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러한 성경 번역의 역사 중 먼저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의 이야기를 먼저 정리하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 가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90) 갤러리 관장이 쓰는 성경 번역의 역사(下-6)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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