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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ㅡ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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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7-06

만약 우리가, 인간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의식적인 상태로 점진적으로 발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환경적 영향이, 아니면 환경적 영향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바로 무의식적인 것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고 융은 말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받는 첫, 인상을 시작으로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무의식적으로 체화한다. 무의식에 각인된 것들은 한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어쩌면 성격은 삶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격은 바뀔 수 없는 걸까? 융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받는 무의식적 영향이 각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정신병의 절대다수는 무의식적인 내용물로 인한 의식의 분열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것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자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세상과 연결하는 끈을 잡을 수?! 있다.

▲ 이서영 작가.   ©브레이크뉴스

 
융은 인간은 세 종류의 교육에 노출되어 있다고 말한다. 먼저 본보기를 통한 교육. 이는 말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이전되는 교육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효과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가장 비효과적일 수도 있다. 아이는 태어나 심리적으로 특히 자신을 양육하는 부모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본보기를 통한 무의식적 교육은 가장 오래된 정신적 특성을 이루게 된다. 융은 결과적으로 모든 교육은 '정신의 동일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보기를 통한 교육은 의식이 개입되기 이전에 자동적으로 전염되는 대단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교육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집단 교육이 있다. 규칙과 원칙, 방법에 따른 교육을 집단 교육이라고 한다. 이런 교육은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집단을 형성하기 위해 실시되는 이 교육은 최종적으로 평균 정도의 성격적 힘을 가진 개인들을 궤멸시키는 특성을 지닌다.

 

세 번째로는 개인적 교육이 있다. 개인적 교육은 모든 규칙과 원칙과 시스템을 개인의 특별한 개성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일치와 동조에 강하게 저항하는 아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 정신적 결함이 있든, 병으로 인한 퇴화를 경험하든, 편향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든, 아니 평범함의 범주에 드는 어떤 아이들이라도 모두 개인적인 '관심'을 필요로 한다.

 

에곤 실레,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에게는 퇴폐,라는 단어와 자화상,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얼핏 보면 '자유'라는 단어도 떠오르지만 사실 그의 정신은 일종의 '유폐' 상태에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과감한 자신감이 필자에게는 강박처럼 느껴지고 긴장감이 느껴지고 혹자는 서글픔 또한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가장 열심히 관찰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겉으로 보면 자기도취의 나르시스적인 면모가 보이는 것 같아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상처가 보인다. 자화상을 그리기 위하여 실레는 늘 거울을 보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내가 거기에 있다. 거울 속. 미러 이미지는 사실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다. 나를 반대로 비춘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했을 것이다.

 

그가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은 극히 짧다. 1890년에 지구별에 도착해 28년의 짧은 시간을 이곳에 머물다 사라졌다. 20세와 21세에 그린 그의 자화상으로는 [손을 뺨에 댄 자화상], [가슴에 손을 얹은 자화상], [배를 내놓은 자화상] 등 여러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았고 다양한 표정과 포즈를 모델화하였다. 스무 살 어린 청년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고 매우 늙은 자신을 거울 속에서 포착하기도 한 실레.

 

1912년 프리드리히 스턴은 이런 감상을 털어놓았다.


"그의 자화상 중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있다. 그가 지나치게 자신의 해체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서글퍼 보였다..."

 

실제로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자화상]의 그의 표정은 초점이 없다. 그의 [벌거벗은 자화상]은 눈동자가 없고 강한 광선을 발하고 있으며 분노를 토하는 듯 입술은 비틀려 있다. 그의 제스처 또한 부자연스럽고 그의 근육들은 돌출될 것처럼 울뚝불뚝하게 표현되어 있다.

 

거울 이미지는 회화의 근본이기도 하다. 미술은 시각 이미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울이라는 도구가 없더라도 우리가 바라보고 감상하는 그림은 그 자체로 거울의 역할을 하게 된다.

 

1890년 생, 에곤 실레. 세기말적인 전형적 인물이다. 라인하르트 슈타이너는 15세에서 17세까지 실레의 자화상은 그 무렵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를 보상받기 위한 과장과 노출이라고 평가하며 20대 이후 '클림트 시기'에 이르면 그의 자화상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고 표현방식이 매우 과장되어 있어 자화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 작품들은 자세나 표정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인식 가능한 하나이면서 동일 인물을 그린다는 자화상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거울은 이제 대상을 왜곡시키며,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는 자아의 분신 혹은 소외된 자아로 바뀐다. 그의 작품은 금욕적으로 마르고 꼬인 몸, 이유를 알 수 없이 험상궂고 기이한 얼굴 표정, 전기 충격을 받은 듯 위로 삐죽 솟아오른 머리카락 등...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 정신적으로 분열된 자아를 보여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1888년 현대 예술가에 대한 니체의 묘사를 호명한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신체적으로 히스테리 환자들과 매우 유사한데, 이들은 자신들의 성격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히스테리 기질을 감내해야 한다. 극도로 흥분하기 쉬운 기질은 삶의 모든 경험을 위기로 만들어 버리며, 삶의 가장 진부한 순간에도 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기 때문에 애초에 이 예술가들은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동일한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집합체이며, 어떤 때는 이 인물이 부각되었다가 다른 때는 대담한 자신감 때문에 가장 튀는 인물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대단한 배우이기도 한다. 의지가 박약한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피조물들, 면밀한 의학적 관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허약한 인물들을 변형시켜 '원'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니체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인간 심리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이가 프로이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실레가 천착했던 수많은 또 다른 자아로서의 자화상들은 자신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나'들을 화면으로 끌어당기는 작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예언자(이중 자화상)]를 보면 한 쪽 눈은 뜨고 있지만 한 쪽 눈은 안대로 보이는 물체로 가려져 있다. 그는 입술을 다물고 있는데 여성의 그것처럼 고운 빛깔이다. 자위를 막 끝낸 듯 나른한 표정의 그에게 팔은 검은색으로 처리되었거나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그의 등 뒤로 하얀 동공, 하얀 콧구멍, 하얀 입 안을 내보이는 유령 같은 자아가 나란히 서 있다. 그는 몸통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자화상을 그렸으나 사실은 그의 내면 이미지들을 그린 것이겠다. 그는 16살, 어린 나이에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예술적 자긍심을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몸은 약하고 말수가 적은 소년이었다.

 

실레는 1890년, 빈에서 약 40킬로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작은 도시 툴른에서 태어났다. 철도 계통의 고급 관료 집안으로 경제적으로는 안락한 분위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엄했지만 따뜻했고 그래서 실레는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다. 어머니는 무심했다. 10대에도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심리적으로 대치되는 관계를 보여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레가 태어난 뒤 4년이 지나 실레의 모델로 중요한 힘이 되었던 여동생 게르티가 태어났다.

 

에곤의 어린 시절은 온통 기차 이야기다. 그가 그린 드로잉도 온통 기차 일색이었다. 그는 증기기관의 스팀 소리, 역무원의 호루라기 소리, 레일 위를 구르는 기차바퀴 소리, 레일이 부딪치는 소리, 완충 장치의 끽끽거리는 소리까지 정교하게 흉내낼 수 있을 정도로 기차를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버지가 실레가 열다섯 살 때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큰아버지 레오폴트 치하첵이 그의 후견인이 된다. 아버지의 죽음은 실레에게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 주었고 아버지는 오래도록 그의 꿈속에 나타나 대화를 계속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가 된 실레는 아버지의 부재를 넘어서기 위해 자부심 넘치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고 한다. 그가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도 그러한 방편이었을지 모르겠다. 실레는 어려서부터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스케치를 하는, 그림에 열광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열다섯 살에 클로스터노이부르크 학교에서 카를 슈트라우흐 미술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는 실레의 재능을 곧 알아보았고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레가 미술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반대하는 큰아버지와 어머니를 설득한 이도 카를 선생님이었다.

 

열여섯 살 때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교수의 미술반에 들어갔는데 그는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수업방식을 고수하는 스타일이었고 실레는 자주 크리스티안 교수와 충돌했다. 자유로운 영혼 실레에게 아카데믹한 교수법은 고통이었는데 따라서 구스타프 클림트를 알게 되자 실레는 클림트의 화풍에 매료되어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클림트의 평면적이고 선적인 스타일과 분리파 예술가들의 화풍은 실레에게 단비처럼 달았다. 1897년 오스트리아에서는 분리파가 형성된다. 그들은 "무릇 각 시대가 자기만의 예술을 요구하듯이, 예술은 자유를 요구한다"라는 슬로건으로 경직된 역사주의적이고 전통적인 관행을 타파하고자 했다. 그들은 삶과 예술의 조화를 외쳤고 인간을 에워싼 모든 환경을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 중심에 클림트가 있었고 실레는 클림트를 보자 곧 매료되고 말았다. 클림트는 장식적 효과를 극대화 하였으며 고전적 주제에 새로움을 부여하였다. 장식적 요소가 작품에 개입되고 평범한 욕망을 장식적 암호로 변형시킨다. 클림트에게로 가면 에로스는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어 음악적, 율동적, 장식적인 효과를 배가시킨다. 클림트는 빈의 대단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라있었고 실레는 클림트의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클림트에게 실레는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클림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스케치는 내가 그린 것보다 훨씬 훌륭하구만."

 

클림트의 [물뱀 2]은 실레에게 [물의 정령 1]으로 변형된다. [게르티 실레의 초상]을 보면 클림트의 잔상이 엿보인다. 클림트의 예술을 본받기 위해 실레는 다양한 시도를 한다. 스타일과 모티프를 차용하고 클림트를 자신과 한 그림 속에 그려 넣기도 한다. [후광을 지닌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클림트와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클림트의 장식적 효과를 차용했음은 물론이다. [은둔자]라는 작품 속에도 두 사람이 함께 있다.

클림트는 실레를 [빈 미술공방]에 소개하고 이후 적극적으로 실레를 빈의 미술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열여덟 살 때 실레의 첫 공개 전시회가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자선재단에서 개최되었고 이 전시회를 통해 하인리히 베네슈는 실레의 그림을 만나게 된다. 베네슈는 철도 감독관이었는데 실레의 그림을 열정적으로 수집했고 이는 저명한 미술사가이자, 알베르티나 미술관장이 되는 그의 아들 오토 베네슈에게까지 전해진다. 오토에 의해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실레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 된다. 오토가의 이 두 사람에 의해 28년의 짧은 삶을 살다 간 실레의 작품들이 훗날 재평가를 받는 기틀이 마련된다.

 

열아홉살이 되어 실레는 그린펜케를 교수의 수업방식에 반기를 든 젊은 예술가들과 [신 예술 그룹]을 결성하면서 빈 미술아카데미를 떠난다. 그린펜케를 교수는 실레에게 "사탄이 너를 나의 클래스에 토해 놓았다"고 악담을 퍼부었으며 이를 계기로 실레는 학교를 떠나게 된다.


실레는 이 그룹을 만들면서 선언서를 내놓는다.

 

"신예술가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 자신이어야 하며, 창조자여야 하며, 과거나 전통에 의지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스스로 모든 토대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신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그해 12월 [신 예술 그룹]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피스코 미술관에서 열렸는데 이때 <노동신문>의 미술 비평가인 아더 뢰슬러의 주목을 받게 되고 이후 실레의 가장 중요한 재정 후원자이며 기록자가 된다. 뢰슬러와 실레의 본격적인 교루는 이후 1912년부터 1923년에 걸쳐 실레에 관한 여러 책을 저술하게 한다.

 

열아홉 살 실레는 자화상을 자신의 그림에 주요 주제로 다루기 시작한다. 그해 클림트의 추천으로 1908년 클림트에 의해 설립된 [쿤스트 샤우] 전람회에 4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주목받지는 못했으나 이 전람회를 통해 실레는 폴 고갱, 반 고흐의 그림과 앙리 마티스, 뭉크, 나비파의 뷔야르와 보나르의 작품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을 만나 그의 회화 기법에 큰 감명을 받은 뒤 그의 기법을 자신의 그림에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한다.
 
20살의 실레는 클림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조금씩 예술가적 독립성을 찾아갔으며 초상화가로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21살 실레는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17살의 모델 발리 노이질과 동거를 시작했다. 발리와는 24살의 실레가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할 때까지 동거하는 사이가 된다. 발리는 실레의 그림 속에서 가장 선정적인 모델이 된다. 17살의 모델과 21살 화가의 삶은 인근 주민들에게 원성을 살 정도로 무질서해 보였고 그래서 둘은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다. 노일렝바흐 마을 사람들은 실레가 어린 소녀를 유괴했다고 오해해 경찰서에 실레를 신고했으며 실레는 경찰소 유치장에서 21일간의 구류형을 받았다. 또한 그의 아틀리에에 걸린 그림들이 청소년을 유혹하는 포르노물이라는 이유로 압수되고 3일간의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때의 사건을 [감옥에 있는 자화상]으로 그려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이 사건으로 빈에서 오히려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이해에 빈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를 통해 아우구스트 레더러라는 돈 많은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레더러 덕분에 새 거주지를 마련한 실레는 클림트가 회장으로 있던 [오스트리아 예술가협회]의 회원이 된다. 뮌휀, 베를린, 부다페스트, 쾰른, 드레스덴, 파리, 로마에서도 전시회를 가진다.  24살의 실레는 철도 공무원을 퇴임한 요한 하름스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다음해에 동거하던 발리 노이질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다.

 

'동거하던 발리와 청산하고 에디트와 결혼한다'. 이렇게 쉬운 청산이 가능한 걸까?

 

하름스는 실레가 원하는 완벽한 모델이 되어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실레는 금기가 없는 예술가였으므로 모델들에게 매우 강압적으로 불편한 온갖 자세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낯설고 괴상한 동작을 모델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그는 관습적인 사물 인식 방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때로 사다리에 올라서서 대상을 포착했다고도 한다.

 

실레는 결혼한 지 나흘만에 징집 통지서를 받고 프라하에서 사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한다. 26살의 실레는 베를린과 뮌휀의 분리파 전시회와 골츠 갤러리의 전시회에 참가한다. 9월 [디 악티온]에 실레에 관한 특집기사가 펌페르트에 의해 실렸는데 이 기사로 인해 실레의 명성이 높아진다.

 

27살, 1월에 뮐링의 군부대에서 빈의 황실 전사박물관으로 배속이 바뀐다. 빈의 현대미술관과 공공박물관이 실레의 그림을 구입하기도 한다. 스톨홀름과 코펜하겐의 전시회에 초대되고 오스트리아 전쟁기념 전시회에 참여한다. 7월, 드로잉과 수채화를 엮은 실레 작품집이 출간된다.

 

1918년, 실레가 스물여덟 살이 된 해, 2월 빈 미술계의 거장이며 실레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클림트가 사망한다. 이때 실레는 세 점의 클림트 드로잉을 남긴다. 그는 스스로 클림트의 정통 후계자라고 믿었다.


3월이 되자 [빈 시세션]의 49회 전시회에 19점의 회화와 29점의 수채화를 출품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팔려나가고 주문이 쇄도한다. 실레의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보일 만큼.


이후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의 중요 전시회에 초대되는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스물여덟 살의 10월 28일, 아내 에디트 실레가 출산을 앞두고 스페인형 독감으로 사망한 3일 뒤, 실레 역시 스페인형 독감으로 사망에 이른다. 스물여덟 살. 태어나서부터 줄곧 그림에 미쳐 살았던 실레의 짧은 삶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된다.

실레의 시대가 시작된다.

 

실레의 시대에 실러는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는 순간순간 자신의 시대를 살았던 것일까? 아니라면 현상적으로는 당대를 살았으나 그는 결핍을 그림으로 보상하려는 상징으로서의 삶을 살았을까?


16살에 빈 미술아카데미에 입학, 전통적인 교습법에 저항하고 클림트를 흠모하고 클림트의 적극적인 후원과 자신의 뛰어난 데생 실력으로 입지를 다진 화가. 로트렉의 그림을 만나 그에게 매료된 뒤 로트렉 또한 그의 그림 안에 섞여 살게 된다. 그는 아카데믹한 고전과 클림트와 로트렉과 자신을 합하여 놓은 인물일까? 스물여덟 해의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그림 세계를 있는 힘껏 펼쳐나갔던 에곤 실레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흔적을 찾아낼 것인가.

 

실레의 삶과 나는 어떤 동일시가 가능할까? 내 안에서 늘 불안해 하는 감정, 늘 위로받고 싶은 감정, 늘 과시하고 싶은 감정, 늘 전시하고 싶은 감정의 나를 실레에게서 본다. 나의 미러 이미지로서의 실레. 그는 지극히 도시적인 인간형이었다. 그런 그가 아내 에디트의 오빠인 안톤에게 편지를 쓴다.

 

"페슈카, 난 곧 빈을 떠나고 싶다네. 이곳은 얼마나 끔 찍 한 가!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시기한다네. 예전의 동기들은 적의에 찬 눈으로 나를 대하지. 빈에는 음지가 많다네. 도시는 어두컴컴하고 모든 것은 반복될 뿐이지. 나는 혼자가 되고 싶네. 난 보헤미아 숲으로 가고 싶어.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난 새로운 것을 보고 싶고 그것들을 연구하고 싶네. 난 깊은 샘물을 맛보고 싶고, 나무와 바람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싶다네. 난 케케묵은 정원 울타리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싶네. 난 어린 자작나무 농장에 귀를 기울이고 싶고, 나뭇잎들이 떨리는 소리를 듣고 싶고, 태양과 빛을 그리고, 저녁이면 촉촉히 젖어드는 녹색의 골짜기를 바라보며, 금붕어들이 금비늘을 반짝거리며 노는 모습을 보고 싶네. 하얀 구름이 하늘 위로 둥실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싶고, 꽃들에게 말도 걸어보고 싶다네. 난 사람들의 분홍빛 살결과 초록 풀, 오래되어 기품 있는 교회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싶고, 작은 교회당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듣고 싶어. 드넓은 들판을 지나 곡선을 그리고 있는 초원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서 대지에 입 맞추고, 부드럽고 따사로운 습지대의 풀꽃 향기를 맡아 보려네. 그리고 또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 보려네. 오색으로 뒤덮인 광야 같은 걸 말일세..."

 

자연 속을 거니는 실레의 모습.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희망이나 소망은 늘 미래에 있을 뿐 그것은 현재형이 아니다. '싶다'의 삶을 '지금 여기'로 소급할 수 있는 자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실레는 머릿속에서 살았다. 생각 속에서 살았다. 실레의 그림의 대상은 사람이었지만 서로를 품는 사람이 아니라 기괴하게 변형되고 굴절된 모습들, 그의 내면 속에 살고 있는 존재들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었으나 그것이 그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에곤 실레의 그림들은 개인사적으로 남아 있어야 할 장면들이 다수 공론화되었다. 그가 그러한 그림 소재들을 통해 닿고자 했던 곳은 어디일까? 관음과 몽상, 적나라한 나신, 그의 그림 속에는 긴장과 날 선 감정선이 느껴진다. 그의 작품들은 천재적 예술성을 함의한 채로 예술사에서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채 늘 그 자리에 있을 테지만 그를 보면 인간은 늘 '관심'과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ebluenote@hanmail.net

 

**필자/이서영. 북카페<책읽어주는여자 블루노트>주인장. 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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