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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혼을 위하여 - (232) 봉선화(鳳仙花) 이야기

이일영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19-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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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의 식물학명 ‘Impatiens balsamina’은 건드리면 터져 나오는 씨앗을 의미한 고대 라틴어의 견디기 어려운 꽃에서 유래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가 서양 봉선화로 부르는 ‘아프리카봉선화’(Impatiens walleriana)의 이름도 역사적인 이야기다. 이는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 탐험에 일생을 바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이 동료인 영국의 선교사이며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인 ‘호레이스 월러’(Horace Waller , 1833~1896)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호레이스 월러’가 아프리카 노예의 눈물이 어린 비인도적인 그릇된 제도의 폐지 운동에 헌신한 뜻을 기린 것이다.

 

 

▲ 좌로부터 봉선화(鳳仙花)/ 봉선화 꽃물들이기/ 출처: naver,com     ©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세계의 주요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 할 때마다 조각품과 미술작품에서 손톱을 찾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우리의 오랜 역사를 가진 봉선화 꽃물들이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이는 소녀와 여인의 애틋한 감성이 담긴 풍습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과 몽골제국 원나라의 황제 쿠빌라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의 설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충선왕이 몽골에서 생활하던 중 가야금을 타고 있는 소녀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에 궁궐 궁녀를 조사하였더니 고려에서 온 한 소녀가 손가락을 모두 싸매고 있었다. 바로 봉선화 꽃물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설화를 일부에서 우리의 전통 봉선화 꽃물이 몽골에서 전해져 온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이다. 이는 설화에서 살필 수 있듯이 유일하게 고려의 소녀 혼자 봉선화 꽃물을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외려 우리의 전통이 몽골과 원나라로 전해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헌에서 봉선화에 대한 기록은 1241년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펴낸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봉상화’(鳳翔花)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는 7월 하순이면 오색으로 꽃이 피어 비바람이 불어도 열매가 자라 씨가 터져나는 꽃을 ‘봉상화’(鳳翔花)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봉상화’(鳳翔花)는 봉황이 나는 모습을 가진 꽃을 형상화한 명칭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조선조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봉상화’(鳳翔花)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봉상화(鳳翔花) -서거정(徐居正)

많은 꽃 피어 난간을 비추니 (花開無數映雕蘭)

오색 분명하게 나는 봉황과 금조 (五色分明翥鳳鸞)

이슬 두른 가을 향기 더욱 사랑스러워 (帶露秋香尤可愛)

꺾어와 한가히 꽃병에서 바라보네 (折來閑挿膽甁看)

 

이렇듯 ‘봉상화’(鳳翔花)로 불러온 명칭이 ‘봉선화’(鳳仙花)로 바뀌게 된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이와 같은 봉선화의 꽃물을 손톱에 들이는 이야기가 우리나라 문헌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 펴낸 양곡집(陽谷集)에 전해지는 시 봉선(鳳仙)이다. 

 

봉선(鳳仙)

가냘프고 어여쁜 가지 비 맞아 기울더니   (夭嬌柔枝帶雨斜)
훈풍에 미인의 집 봉선화가 활짝 피었네   (薰風開遍女仙家)
가늘은 손가락 여린 손톱에 붉은 물 들이려 (纖纖指甲須紅染
고운 질그릇에 밤새 꽃을 찧고 있구나   (共把金盆夜搗花)

 

이와 같은 시에서 살필 수 있듯이 당시 손톱에 물을 들이기 위해 봉선화 꽃잎을 따서 이를 밤새워 찧고 있었던 사실은 우리의 일반적인 전통이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중기의 문신 ‘신광한’(申光漢, 1448~1555년)의 시 ‘봉선화자해’(鳳仙花自解)와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학자인 권호문(權好文, 1532~1587년)의 시 ‘우중상봉선화’(雨中賞鳳仙花)와 김도조(金度祖, 1587~1667년)의 시 ‘봉선화’(鳳仙花) 그리고 조선조 후기의 문인 이옥(李鈺. 1760~1815)의 ‘염조’(艶調)와 같은 시에 봉선화 꽃과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감성과 전통을 노래한 시들은 수없이 많다. 

 

이와 함께 조선 중기의 천재적인 여류시인으로 당시 중국과 일본에 시집이 출판되었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 지은 난설헌집에 실린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이며’라는 칠언시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의 초반 구절을 살펴보면 봉선화 꽃잎을 따서 손톱에 물을 들이던 우리의 고유한 전통을 노래하고 있다.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이며’ -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
저녁 이슬 고운 화분 붉은 꽃에 맺히고   (金盆夕露凝紅房)
예쁜 아씨 열 손가락 길고도 고아라      (佳人十指纖纖長)
절구에 꽃잎 찧어 잎으로 싸매고서       (竹碾搗出捲菘葉)
등잔 앞에 귀고리 울리며 동여매었네    (燈前勤護雙鳴璫)
새벽에 잠을 깨어 발을 걷어보니         (粧樓曉起簾初捲)
반가운 붉은 별이 거울에 비쳐오네       (喜看火星抛鐘面)

이하 (략)

 

▲ (좌로부터) 양곡집(陽谷集)/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 규방가사 ‘봉선화가’(鳳仙花歌)/     © 브레이크뉴스

 

이와 같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염지봉선화가’에 이어 전해오는 작가 미상의 4음보 연속체 ‘규방가사’(閨房歌辭)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이 작품은 규장각 소장의 한글 필사본 ‘정일당잡지’(貞一堂雜識)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봉선화 꽃 이름의 유래에서부터 꽃잎을 손톱을 물들이는 세세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와 같은 봉선화가의 첫 구절은 ‘향규(香閨)의 일이 업셔  백화보(百花譜)를 혀쳐보니’ ‘봉션화 이 일흠을 뉘라셔 지어낸고’ 로 시작된다. 이는 규방에 할 일이 없어 여러 가지 꽃에 관해 설명해 놓은 책 ‘백화보’(百花譜)를 펼쳐 보니 봉선화 이 이름을 누가 지어 냈는가? 로 시작되는 봉선화 꽃물로 손톱을 물들이던 풍습을 예찬한 규방 가사이다.

 

이러한 봉선화 꽃물에 대한 이야기는 민중의 소리인 판소리 춘향가에서도 여러 내용이 살펴진다. 그중 대표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그 때에 향단이 ‘요염 섬섬(妖艶 纖纖) 옥지갑(玉指甲)에 봉선화를 따다가’ ‘도련님 얼른 보고 깜짝 반겨 나오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아리땁고(妖艶) 가냘프며 여린(纖纖), 옥 같은 고운 손가락의 손톱에 물을 들이려는(玉指甲) 봉선화를 따다가, 찾아온 이 도령을 보고 깜짝 놀라 반기는 대목이다. 이만큼 우리의 역사에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오랜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봉선화 꽃물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중국의 문헌에도 여러 내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이 당나라 시대에서부터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들였다는 주장은 당대의 명확한 기록이 아닌 후대의 문헌에서 나타나는 기록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당나라의 시인 ‘장호’(张祜. 785~849)의 시 ‘탄쟁’(弹筝)을 보면 하남상구에 있는 기생의(河南商丘有艺伎) 열 손가락은 붉게 물들어 있고(十指纤纤玉笋红)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손톱에 물들인 붉은 빛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봉선화 꽃물인지 고대 인도에서 전해온 몸과 손과 발에 그림을 그렸던 염료이며 머리 염색용으로 쓰인 식물 ‘헤나’(海娜-henna)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고대 인도의 ‘헤나’ 또한 중국에서는 손톱에 물을 들이는 뜻의 ‘지갑화’(指甲花)라고 한다. 

 

이후 청나라 시대에 편찬된 문헌의 기록에서 비로소 봉선화 꽃잎을 손톱에 물들이는 구체적인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청나라 시대의 시인 ‘원학란’(袁学澜. 1804~1879)이 1856년 저술한 ‘오군세화기려’(吴郡岁华纪丽)에 실린 원나라 시대의 생몰 미상의 시인 정규처(郑奎妻)의 시 ‘가을 노래’(秋词)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늘고 고운 손가락 손톱에 붉은 물을 들이려’/ ‘금빛 대야에 봉선화를 찧는 밤’(要染纤纤红指甲,/ 金盘夜捣凤仙花) 이는 봉선화 꽃물로 손톱을 물들인 구체적인 내용을 처음 확인하게 하는 기록이다. 이는 원나라 시대에 중국에서도 봉선화 꽃물로 손톱을 물들였음을 확인하게 하는 기록으로 필자는 조선을 통하여 이와 같은 풍습이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사실을 오래도록 헤아렸다.

 

이는 필자가 헤아린 내용에 의하면 ‘원학란’(袁学澜)이 1856년 저술한 ‘오군세화기려’(吴郡岁华纪丽)가 당나라의 학자 ‘한악’(韩鄂)이 편찬한 퐁속지 ‘세화기려보’(岁华纪丽譜)를 이은 민속서라는 점에서 청나라 시대의 문학가 ‘고록’(顾禄. 1793~1843)이 지은 민속서 ‘청가록’(清嘉录)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사실과 이와 같은 민속서에서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이에 이와 같은 봉선화 꽃이 기록된 중국의 문헌을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면 남송 시대(1127∼1279)의 생몰 미상의 학자 진경기(陈景沂)가 펴낸 식물 사전 ‘전방비조’(全芳备祖)에 언급되어있다. 이어 명나라 때의 학자 이시진(李時珍:1518∼1593)이 1596년에 편찬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약용으로 언급된 내용이 존재한다, 이어 명나라의 학자 왕상진(王象晋. 1561~1653)이 저술한 식물도감 형태의 ‘이여정군방보’(二如亭群芳谱)에 줄기와 가지 사이에 꽃이 피며 봉황새의 형상을 가져 봉선화라고 한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후 손톱에 물을 들인다는 뜻의 염지갑화(染指甲花) 또는 지갑화(指甲花)이거나 규중 여인들의 친숙한 꽃이라는 규중화(閨中花) 금봉화(金鳳花), 소도홍(小桃紅), 길길초(吉吉草), 불두주(佛頭珠)등의 명칭이 생겨났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오면서 실로 놀라운 기록을 살피게 되었다. 이는 청나라의 유명 의학자인 ‘조학민’(赵学敏. 1719~1805)이 펴낸 봉선화에 대한 내용을 기술한 ‘봉선보’(凤仙谱)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었다. 아래 첨부한 원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학민(趙學敏)은 여러 벗과의 교유를 통하여 일찍부터 봉선화 꽃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이후 봉선화 애호가들에게 그 씨앗을 얻어 1783년 오늘날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인 임안(临安)에 심었다. 그 재배의 경험을 기록하여 1790년 펴낸 책이 ‘봉선보’(凤仙谱)라는 것이다.

 

그는 남송 시대의 진경기(陈景沂)가 펴낸 식물 사전 ‘전방비조’(全芳备祖)와 명나라의 학자 왕상진(王象晋. 1561~1653)이 저술한 ‘이여정군방보’(二如亭群芳谱)에 기록된 내용이 국화와 난초이외에 봉선화와 같은 꽃에서 많은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았으며 본초강목(本草綱目) 등에 기록된 약용의 효능을 참고하였음을 덧붙이고 있다. 이와 같은 ‘조학민’(赵学敏)이 저술한 ‘봉선보’(凤仙谱)는 2권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분명하게 살펴지는 내용은 청나라시대 ‘조학민’(赵学敏. 1719~1805)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봉선화 꽃은 중국에서 극히 일부 화초 애호가들에 의하여 관상용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애호가들에 의하여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들이는 풍습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에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진 풍습은 분명하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옛 시골에서 한여름 장독대이거나 울타리 아래 무성하게 피어나는 봉선화(鳳仙花)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꽃이다. 인도와 말레이시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봉선화가 언제부터 우리 땅에 피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赵学敏撰写 全书两卷《凤仙谱》的缘起,是因其少时,与何子蕙交游,子蕙性喜花草,学敏曾宿其清景轩中,子蕙为其“极论凤仙之雅,指类备法,有老花师所未及知者”。后赵氏赴东瓯,又获交马继纯兄弟,皆善种凤仙,所论与何子蕙之言“无不吻合”。赵学敏晚年,其友人汪子于与族子赵容斋亦雅爱凤仙,学敏曾索取种子,于1783年种于临安,“不数日,茁颖如箭”,入秋,则“繁艳盈眸,目不暇给”,令人兴趣盎然。而此前花卉中除兰、菊之外,皆无专谱,即使《全芳备祖》、《群芳谱》二书素称详瞻,而于凤仙亦甚简略,且多讹误。于是,学敏追忆少时闻于何、马三人之言,摄其精要,合以平昔见闻所得,于乾隆五十五年(1790)秋,耗十日之功,撰成《凤仙谱》。可知这是一部记述亲友和自身种植凤仙花经验的专著。

 

여기서 주지할 사실은 이와 같은 봉선화가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온 내용이다, 이는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시와 글씨 그리고 그림에 뛰어나 시서화 삼절(三絶)로 잘 알려진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펴낸 원예지 ‘양화소록’(養花小綠)에서 꽃의 품계를 1품부터 9품까지 나눈 화목구품(花木九品)편에 봉선화를 9품으로 설명한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 조선 후기의 학자 유박(柳璞. 1730~1787)이 펴낸 원예 전문서 ‘화암수록(花庵隨錄)’에도 봉선화는 조선을 대표하는 꽃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살피게 되는 기록이 조선조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1785년 기술한 ‘백화보서’(百花譜序)의 내용이다. 이는 조선조 후기 여향문화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 김덕형(金德亨)이 꽃 그림에 열정을 바쳐 100여 종의 우리 꽃을 사실대로 그려낸 ‘백화보’(百花譜)라는 화첩을 만들어 판각하여 책으로 보급하였다, 이와 같은 ‘백화보’(百花譜)에 대한 초정 박제가의 서문이다. 초정은 서문에서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라는 열정적인 천착의 ‘벽’(癖)에 대한 언급에서 삼양재(三養齋) 김덕형(金德亨) 군이 온종일 꽃을 주시하였던 생활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 김덕형의 재능을 칭찬하며 백화보(百花譜)를 그린 그는 꽃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규방가사 봉선화가의 첫 구절에 규방에 할 일이 없어 여러 가지 꽃에 관해 설명해 놓은 책 백화보(百花譜)를 펼쳐 보니 봉선화 이 이름을 누가 지어 내었는가?로 시작되는 봉선화 꽃물로 손톱을 물들이던 풍습을 예찬한 가사에서 언급한 ‘백화보’(百花譜)이다.

 

이와 같은 ‘백화보’(百花譜)는 안타깝게도 그 실물이 오늘날 전해져 오지 않는다. 여기서 더욱더 안타까운 사실은 화가 김덕형의 그림은 당대의 가장 인기가 있었던 꽃 그림으로 이를 다투어 소장하려 하였던 기록은 많지만, 단 한 점도 그의 작품이 전해해지지 않은 의문이다.   
 
여기서 이와 같은 화가 김덕형에 대한 내용을 더욱더 상세하게 살피려면 조선시대 중앙 각사의 중인계급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에 대한 헤아림이 필요하다, 이는 중인 계급의 하급관리로 문학과 음악 그리고 글씨와 그림에 이르는 각 분야의 예능인들이 모여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세습 성을 가진 여항문학(閭巷文學)의 문화 시대를 열어간 사실과 맞닿은 이야기이다,

 

대표적으로 음악 분야에서 조선조의 가인 김수장(金壽長. 1690~?)의 뒤를 이은 가객 장우벽(張友璧. 1735~1809)이 창안한 민족의 장구 장단인 매화점장단(梅花點長短)이 있다, 이는 오동래로 전수되어 정중보(鄭仲甫)와 최수보(崔守甫) 그리고 박효관(朴孝寬)으로 이어지며 그 유파가 나뉘었지만, 조선조 후기의 전설적인 악공 박효관(朴孝寬. 1781~1880)과 가객 안민영(安玟英. 1816~?)이 1876년 편찬한 시가집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통하여 민족의 장단으로 전승되었다.

 

이어 미술 분야에서는 사대부 문인화가와 도화서 화원, 그리고 경아전(京衙前) 하급관리 화가의 활동 속에서 강산의 진경을 그려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과 민족의 풍습을 담아낸 김홍도(金弘道. 1745~?)에 이어 여항문화의 미술 세계를 관통한 화가 마성린(馬聖麟·1727∼1798)을 이은 화가가 ‘백화보’(百花譜)의 전설을 남긴 화가가 바로 규장각서리(奎章閣書吏) 김덕형(金德亨)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전설로 남아버린 김덕형(金德亨)의 ‘백화보’(百花譜)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일본의 의사이며 미술사가와 역사학자인 ‘키노시타 모쿠타로우’(木下杢太郎. 1885~1945)가 동경제국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중국 봉천(심양)의 봉천 병원 피부과 부장을 맡았던 때에 중국과 조선의 미술에 심취하여 많은 여행과 함께 이를 연구하였다.

 

이후 1921년 미국을 거쳐 프랑스에 유학하여 리옹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1922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후 1924년 아이치현립 의학전문학교(현 나고야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어 1926년 동북 제국 대학 의학부 교수를 거쳐 1937년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 교수가 되어 한센병 연구에 세계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은 ‘키노시타 모쿠타로우’(木下杢太郎)교수가 1943년부터 다양한 꽃을 그려내면서 일본 최초의 ‘백화보’(百花譜)를 펴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중시하여 민족의 전설로 남아버린 화가 김덕형(金德亨)의 ‘백화보’(百花譜)에 대한 연관성을 살펴오면서 여러 이야기를 살필 수 있었다.  

 

이는 일본의 역사에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일본의 오키나와(沖繩) 일대에서 번영하였던 고대 왕국 유구국(琉球國)에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유구국(琉球國)은 일본과 함께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와 많은 연관성을 가진 왕국이다. 유구국은 예로부터 동남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에 중계무역을 하였던 나라로 삼국으로 나뉘었던 왕국이 1429년 통일되었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쓰마 번’(薩摩藩) 의 침공을 시작으로 1879년 멸망되어 오늘날의 오키나와로 강제 합병한 것이다. 일본은 이러한 유구국(오키나와)에 담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구국과 일본은 그 뿌리가 같다는 논리를 앞세워 1921년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가 상륙비를 세웠다.

 

이후 오키나와(유구국)는 1945년 9월 2차 대전 항복 이후 미국의 통제에 들어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이러한 유구국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된 많은 이야기를 가진 영토로 2차 대전 종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유구국(琉球國)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유구국의 전통 민요에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라는 민요가 있다. 일본어로 봉선화는 호우셍까(ホウセンカ-鳳仙花)이지만 유구국(琉球國)의 말에서 전해진 오키나와 어의 봉선화는 ‘틴사구누하나’(てぃんさぐぬ花)이다.

 

이와 같은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는 다음과 같이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봉선화(てぃんさぐぬ 花) -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 꽃은 손톱에 물들이고(爪先に染みてぃ) / 부모님의 말씀은 가슴에 물들이세요(親のゆし事や 肝に染みり)   
 
이와 같은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는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는 노랫말이다. 이는 일본 본토의 풍습에서 존재하지 않는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을 가지고 있는 오키나와의 전신 유구국(琉球國)과 한국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를 살피게 한다. 또한, 민요의 전체적인 가사에 담고 있는 내용이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한 유교적인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이는 유구국(琉球國)이 조선에 오랫동안 조공을 보낸 속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여러 기록과 함께 봉선화 꽃물을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이우리나라에서 전해진 사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2차 대전 종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유구국(琉球國)의 독립을 주장하였던 내용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일본은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국에 반환되기 이전인 1966년 일본 국영방송 NHK는 ‘모두의 노래’(みんなのうた)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라는 제목으로 일본 최대의 합창단 ‘스기나미 아동합창단’(杉並兒童合唱団)의 합창으로 오키나와 전통 민요를 노래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NHK가 1961년 4월 첫 방송을 시작한 5분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노래에서부터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와 음악을 선정하여 방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도 방송되고 있는 최장수 프로그램 중 하나인 본 프로그램에서 오키나와 민요가 소개된 것은 최초였다.
 
필자는 이와 같은 헤아림 속에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중국 최대의 역사적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실크로드의 관문인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벽화가 공개되면서였다. 오랫동안 이를 연구한 중국학자 이립신(李立新)의 연구기록을 살피면서 막고굴 제335 굴 벽화의 문수보살(文殊菩薩-Manjusri)과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대화 장면에 고구려인과 백제인으로 추정하는 인물이 있다. 이어 북쪽 벽에 있는 벽화에 검은색 손과 손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있다. 이는 벽화의 오랜 산화에 의하여 빨간색 손톱이 검은색으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 (좌로부터)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335굴벽화/ 중국 ‘조학민’(赵学敏) ‘봉선보’(凤仙谱)/ 일본 ‘키노시타 모쿠타로우’(木下杢太郎) ‘백화보’(百花譜)/ 오키나와 민요 ‘봉선화’(てぃんさぐぬ花)/     © 브레이크뉴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추정과 헤아림은 더욱 과학적인 검증과 상세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 많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만으로도 봉선화 꽃잎을 손톱에 물들인 오랜 전통의 풍습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온 역사를 절대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일개 조그마한 갤러리 관장으로 우리의 역사에 담긴 지혜를 살펴오면서 이와 같은 일단의 실마리가 민족의 기상이 되고 역사의 소중한 기록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예로부터 학자는 많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이를 언급하거나 헤아린 학자는 없었다. 역사란 거대한 물결이지만, 그 원류를 살펴 가면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된다. 오랫동안 동서고금의 역사의 행간에 담긴 고독한 헤아림의 길을 걸어오면서 일깨운 성찰이다.

 

이에 봉선화 꽃잎을 손톱에 물들이는 소박한 민속의 풍습이 단순한 감성의 역사가 아닌 민족의 슬기로운 지혜와 기상의 흔적임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지정학적인 역학 속에서 강대국 중국과 일본을 상대하여 우리가 헤쳐가야 할 역사적 과제가 산재한 현실에서 이와 같은 훼손 될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 정신적인 견인차가 되고 민족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어서 봉선화 꽃잎에 담긴 너무나 많은 역사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다음 칼럼은 (233) ‘봉선화 꽃물을 삼킨 민족의 애환 ’입니다. *필자: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art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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