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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4일 '4분 공경마음으로 단식' 하는 까닭

송현 시인 l 기사입력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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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현 시인     ©브레이크뉴스

하루: 정신적 스승 함석헌 선생을 그리워하며

 

나는 1년에 나흘 단식한다. 내가 하는 단식에는 좀 별난 구석이 있다. 살 빼기 위해서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다. 번듯한 이유나 내세울 거창한 명분은 없지만 내 나름으로는 소박하고 소중한 까닭이 있다.

 

물론 예전에 나도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한번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단식 하면 몸에 좋은 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단식하면 당연히 체중이 줄고, 특히 숙변(宿便)이 없어지고 장이 깨끗해지기 때문에 건강에 매우 좋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흔히 하는 단식은 주로 일주일이면 일주일, 열흘이면 열흘을 한꺼번에 몰아서 하는데, 내가 하는 별난 단식은 1년에 겨우 나흘 하는데도 한꺼번에 몰아서 하지 않고 날짜가 제 각각이다.

 

▲ 함석헌     ©브레이크뉴스

나는 존경하는 세 분의 스승과 한 분의 은인을 기리고 잊지 않기 위해서 단식한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에 단식을 한다. 세 분의 스승은 나의 정신적 스승 함 석헌 선생, 나에게 과학적인 글자생활과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과 글쓰기 기본을 가르쳐주신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 병우 박사, 나의 영적 스승 라즈니쉬이고, 한 분의 은인은 뿌리깊은나무 한 창기 사장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 분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삶에서 이 분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모습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일 뿐 아니라 내 삶의 최대 축복이고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함 석헌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부산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표지가 떨어져 나가고 없는 낡은 잡지를 통해서이다. 제호도 알 수 없는 잡지의 화보로 실려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나는 화인(火印)을 맞은 것 같은 강렬하고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을 이잡듯이 뒤져 선생님이 쓴 글들을 찾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선생님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를 밤을 꼬박 새워 단숨에 다 읽었다.  선생님의  불후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도 한 줄 한 줄 숨 죽이고 읽었다. 사료(史料)를 연대기적으로 나열한 죽은 역사와 역사의 의미와 섭리를 파헤쳐서 참 의미를 찾아내는 참 역사의 차이를 알았고 역사 의식이 무엇인지, 왜 인간에게 역사가 중요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다. 나는 독서를 통한 지적 전율을 그 때 처음 경험하였다.

 

그 동안 내가 초.중.고에서 만났던 비겁하고 맹한 수많은 선생들에게 분노하게 되었다. 그들은 왜 이 책에 있는 이런 중요한 역사의 의미를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나 하고 원망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한 해석이다. 나는 그 전까지만 해도 신라의 삼국 통일이 아주 잘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는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남을 업고 이룩한 통일은 자주적이지 못하고 주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통일이 아니라고 해석한 대목에 전율했다.

 

나는 선생님이 날카롭고 심오하게 파헤쳐 놓은 부끄러운 우리 역사의 자화상을 보면서 책장을 찢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책장을 덮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몸서리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우리나라를 수난의 여왕이라고 하였다. 수난의 여왕에게 아름다운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놀라운 해석에 나는 눈물을 닦고 다시 용기와 희망을 되찾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뒤부터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 책을 소개도 하고 선물도 하였고, 심지어 서울 서라벌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할 때는 일요일이면 내 자취방에서 <함 석헌 선생 역사 특강>까지 하였다. 심지어 나는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지 않은 여자와는 결혼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내게는 이 책이 지상의 어떤 책보다 더 소중한 책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 나의 삶은 모두 파기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가 지어준 ‘지XX’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송현’이라고 이름도 바꾸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나도 ‘선생님처럼 올바르게 살고, 뜨거운 가슴으로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했다.

 

내가 부산 살 때는 장 기려 박사의 성경 모임에서 선생님을 한 달에 한번 뵐 수 있었고, 1974년 상경한 뒤에는 명동 카톨릭 여학생관의 성경 모임에서 한 달에 세 번은 선생님을 뵐 수 있었고, 그밖에 노자 모임이나 다른 모임에서도 자주 뵙곤 하다가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혹은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모실 수 있었다.

 

내 입으로 이딴 소리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나는 선생님한테 세례를 받은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한 명이다. 박 정희 독재 정권 때 선생님께서 명동 3.1 구국 선언문 사건인가로 재판을 받을 때, 구속되면 옥사를 각오하고, 가까운 제자 몇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선생님이 손수 제자들의 발 대신 손을 씻기고 세례를 주었다. 이런 일은 선생님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때 그 숙연한 분위기와 벅차오르던 감동과 뜨거운 흥분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역사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인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배웠다. 어떤 것이 진정한 용기인지도 배웠고, 어떤 글이 제대로 된 글이고, 어떻게 말하는 것이 제대로 말하는 것인지도 배웠다. 그리고 하느님과 기독교 신앙도 배웠다.

 

그 동안 나는 말을 팔고 글을 팔아 밥 먹고 살았다. 내가 이날껏 살아오면서 삶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거나, 그 동안 내가 팔았던 글이나 말 속에 작은 진실이나 용기가 담겨 있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공부와 수양이 모자란 탓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이틀: 한글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박사를 생각하면서

 

오래 전에 한국일보에서 우리나라 최고 고집쟁이 열명을 뽑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승만 박사가 1등이고, 최 현배 박사가 3등이고, 공 병우 박사가 6등이었다. 공병우 박사는 한글타자기를 만들 때 글자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글자꼴은 알아보기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오로지 타자 속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 공병우박사

그래서 공병우 타자기를 속도타자기라고도 한다. 어떻게 하면 빨리 찍을 수 있을까?  이것이 공병우 박사의 최대 관심사였다. 빨리 찍어야만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곧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같다. 시간은 돈보다 더 귀한 생명이니 이 귀한 생명을 아껴 쓰기 위해서 타자기 속도도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서 방문의 문턱을 썰어 내고, 사과 궤짝 위에 판자를 깔아 침대를 만들고,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치고, 입식 부엌으로 바꾸고, 5분 이상 하는 이발소에는 가지 않고, 낮에 하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는 등 수많은 기행들을 연출한 것도 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다. 빨리빨리주의자 공병우 박사는 철저한 합리주의자,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공병우 박사가 남긴 수많은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내가 S고등학교에서 국어선생 노릇을 하고 있던 1976년 어느 날 공 병우 박사가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전갈을 받고, 나는 간이 철렁하였다. 왜냐면 나는 공 병우 박사를 제2의 세종대왕 같은 분으로 우러러보면서, 한편으로 공 병우 타자기를 쓸 때마다 그 편리함과 고마움에 감탄하였을 뿐 공 박사를 비난한 적도 없고, 또 공 씨나 공안과를 헐뜯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물어물어 종로구 서린동 111번지 공안과 안에 있는 ‘공 병우 타자기 연구소’로 갔다. 공안과의 복잡하고 긴 복도를 지나서 지하실로 내려가니 공 박사의 타자기 연구소가 거기 있었다. 아무 치장도 없는 썰렁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그 썰렁한 방에는 연구원 한 명이 타자기 활자를 열심히 만지고 있었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공 박사였다. 하늘처럼 우러러 보던 공 박사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인사를 드렸다. 공 박사는 반갑게 악수를 청한 뒤에 입가에 어린이 같은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반갑수다. 송 선생께서 밥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학교를 그만두고 잘못된 한글 기계화 정 책을 바로 잡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앞이 캄캄하였다. 이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 잘된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선뜻 시인도 부정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가 그 말을 했는데, 안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네, 박사님. 제가 그런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니오. 송 선생이 그런 말을 한 게 사실이라면, 우리 연구소에 와서 저와 같이 한글 기계화 연구를 한번 해보시지 않겠어요? 이 자리에서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좋아요. 송 선생으로서도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히 생각한 뒤에 답변해 주시오.”

 

나는 너무나 뜻밖의 제의를 받고, 내 귀를 의심하였다. 한 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저는 손재주가 없습니다. 전기가 나갈 경우 두꺼비집도 손볼 줄 모르고, 형광등 전구도 제대로 끼울 줄 모를 정도입니다. 이런 제가 어찌 한글 기계화를 연구할 수 있겠습니까?”


  “송 선생,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오. 그 동안 내가 송 선생이 쓴 글도 읽어 보았고, 또 송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는데, 송 선생 정도면 열심히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훌륭한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여튼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깊게 생각해 보고 답변해 주시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공 박사 연구소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아내는 그게 말이라고 하냐면서 첫말에 반대하였다. 이튿 날 학교에 가서 친한 선생들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다들 반대하였다. 마침내 부산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역시 반대하였다.

 

반대하는 까닭은 “공 박사의 연세가 일흔인데,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고, 만약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되는데, 왜 그런 모험을 하느냐‘였다. 나는 며칠을 고심하였다. 어찌나 심각하게 고민하였던지 입술이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학교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공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에서 일한 지 얼마 뒤, 공박사의 권유로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한글기계화에 관한 글을 한편 썼다. 공박사에게 보여드렸다. 내 글의 앞 부분을 몇 줄 읽어보시던 공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글이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이 글은 송선생 같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나는 그때 기분이 언짢았다. 나는 문단에 시인으로 이미 등단을 한 뒤였고, 또 그 동안 십여년 가까이 국어 선생 노릇을 한 처지였고, 잡지나 신문 등지에 더러 글도 발표하는 문사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내가 쓴 글을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공박가 말했다.

 

  "좀 쉽게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떫뜨럼한 기분으로 몇 군데를 쉽게 고쳐서 공박사에게 보여 드렸다. 그러자 공박사는 몇줄 읽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이 글은 송 선생 같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보통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참고 원고를 돌려받아서 쉽게 고친다고 다시 고쳐서 공박사에게 보여드렸다. 그래도 공박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내가 한 번 내 마음대로 쉽게 고쳐 드릴까요?"  

  
  "네. 박사님.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틀 날, 공박사는 벌겋게 고친 원고를 내 앞에 꺼내었다. 붉은 볼펜으로 고친 부분이 더 많았다. 공박사가 고친 원고는 과연 쉽고 표현이 정확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박사가 물었다.


   "송 선생! 어떻습니까? 내가 고친 부분과 송 선생이 처음 쓴 것과 어느 쪽이 더 알기 쉽습니까?"   


  "박사님께서 고친 쪽이 훨씬 알기 쉽고 또렷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공부가 되었읍니다. 앞으로 글을 쓸 때 큰 참고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박사는 나에게 한글기계화의 스승만이 아니라, 문장론 스승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젊은 날에 함 석헌 선생만 만나고 공병우 박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구름잡는 이상주의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천만 다행으로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공병우 박사를 만났기 때문에 내 두 다리가 땅에 깊게 뿌리 내릴 수 있었다.

 

사흘: 영적 스승 라즈니쉬를 생각하면서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성자인 라즈니쉬를 내가 알게 된 것은 책을 통해서이다. 1931년 인도에서 태어난 그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진보적인 지식인과 구도자들에게 정신의 수소 폭탄과 같은 인물이다. 그의 영적 파장은 강렬하다.

 

▲ 라즈니쉬     ©브레이크뉴스

그가 말했듯이 그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성인들이 남겨 놓은 경전들이 그가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불경, 성경, 노자, 장자, 선, 인도 철학, 유대와 이슬람의 가르침들을 바탕으로 인간 존재의 심연을 파헤쳤다, 고도의 직관력과 지성에다 다양한 감각과 위트와 유머를 지닌 그는 논리와 수행을 두루 포용하면서도 시적이며 인간적인 길을 통해서 영적 깨달음을 가르친다.

 

라즈니쉬는 21세 때 깨달았다고 했다. 1966년까지 인도의 한 대학에서 철학 교수로 있다가 영적 깨달음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 대학을 떠나서 뿌나에 명상 센터를 열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구도자들에게 인간의 내면의 심리를 깊이 파헤치고 새로운 사고 방식을 소개했다. 산업 사회라는 정신적 황야에서 끝까지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수행자의 모습으로 부르짖었다.

 

그의 저서는 힌두어와 영어로 된 것이 650권 정도 된다고 한다. 미국CIA에 의해 독극물 주입으로 서서히 살해되었다. 1990년 1월19일 지구를 떠났지만 인도 뿌나에 있는 라즈니쉬 아쉬람에는 해마다 수 만의 구도자들이 그의 아쉬람으로 몰려들고 있다.

 

내가 라즈니쉬를 처음 안 햇수야 오래되지만, 그때는 단지 일반적인 독서의 한 부분으로 알았다. 내가 마흔 무렵에 김 형윤 선생의 추천으로 불교 방송 장 상문 회장님과 인연이 닿아 불교 어린이 잡지 ‘굴렁쇠’를 창간하는 일을 했다. 그 무렵에 이왕이면 불교를 잘 알아야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원 불교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의식 속에 기독교적인 색채가 많았다. 그런 내가 불교공부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았다. 그래서 라즈니쉬를 새로 해석하면서 온몸으로 읽고 영적 스승으로 삼았다.

 

그 뒤부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달라졌다. 특히 이 세상에 장미꽃이 제일 아름답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기로 했다. 장미꽃은 장미꽃이고 패랭이꽃은 패랭이꽃이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보다, 어느 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다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장미꽃 한 가지만 남기고 다른 꽃들을 모조리 뽑아버리려는 어떤 수작이나 음모에도 반대한다. 장미꽃이 제일 아름답다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독선에 한사코 반대하게 되었다. 장미꽃이 설령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패랭이꽃을 짓밟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장미꽃과 패랭이꽃의 조화로운 정원을 꿈꾼다. 패랭이꽃이 아니라도 좋다. 설령 꽃이 피지 않는 이름 없는 풀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귀하게 여겨야 한다. 들에는 장미꽃 한 가지만 피어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나무와 풀과 꽃들과 나비가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내가 21세기형 섹스 이론인 ‘SS이론’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된 것도 라즈니쉬를 공부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 SS이론’의 정신적인 뿌리는 라즈니쉬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즈니쉬는 나의 영적 스승이다. 그는 내 생애에 다시 만날 수 없는 최고의 위대한 영적 스승이다. 나는 라즈니쉬와 비록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여러 해 동안 같은 지구상에서 함께 숨쉬고 살았다는 사실이 그저 꿈만 같고 황홀하고 신비하다. 삶이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줄 알게된 것은 전적으로 스승의 덕분이다. 

 

라즈니쉬 공부에 심취에 있던 1985년의 어느 날 꿈에 나는 ‘비말끼르띠’라는 법명을 받았고 ‘라즈니쉬 예술론’을 써보라는 권유까지 받았다. 그 날부터 나는 밤낮으로 신들린 사람처럼 다섯 만에 ‘라즈니쉬 예술론’3600매를 썼다.(‘도서출판 명상’에서 출간 예정). 그 뒤 “영적스승 라즈니쉬”란 책도 출판하였다. 그리고 2006년 사랑하고 존경하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하고 악몽에 시달리던 중에 꿈에 라즈니쉬로부터 무향도(無向道)를 깨우치고 호를 무향으로 정하고, 무향선원을 설립하였다. 앞으로 사랑론, 교육론, 종교론, 인생론 등 합계 1만 매의 원고를 쓸 생각이다.

 

라즈니쉬를 읽으면서 느낀 그런 놀라운 지적 전율과 영적 오르가즘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떤 책도 나를 그처럼 고상하고 심오하고 황홀한 경지로 끌어올렸던 책이 없고, 지금까지 어떤 책이나 어느 누구도 나와 내 영혼을 철저하게 산산조각 나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마침내 라즈니쉬에게 영적인 화상을 입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한동안 나는 영적인 반신불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다시 살아났다. 내 육신이야 전과 달라보이는 것이 없을지 몰라도, 내 정신 세계는 전과는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 지금까지 만난 어떤 위인도, 어떤 현자도, 어떤 성자도 나를 이처럼 바꾸게 하지 못했다. 함 선생님을 만나서 정신적 화인을 맞고 내 이름을 바꾸었던 것처럼 라즈니쉬를 만나 영적 화인을 맞고 이름을 무향(無向)이라고 바꾸기로 했다.

 

역사를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 전과 기원 후로 나누듯이 내 개인의 정신사를 말할 때 라즈니쉬를 만나기 전과 그 후로 구분한다. 이처럼 라즈니쉬는 내가 항상 쳐다보아야 할 정신적 북극성이고, 이승에서 내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죽을 똥 살똥 온몸으로 기어 올라가야 할 영적 에베레스트다.

 

나흘: 삶의 은인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사장님을 그리워하며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 한 창기 사장은 서울 법대를 나왔고, 독신으로 살면서 우리 것을 살리고 우리 것을 지키는 일을 특히 많이 하였다. 그 중에서 일반이 쉬 알 수 있는 이력으로는 저 유명한 한국 브니테니커회사 사장에다,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란 잡지 발행인이었다.

 

내가 1974년에 S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 노릇을 할 때이다. 박 정희 군사 독재 정권 시절이었는데, 그 엄혹한 시절 한 사장은 ‘뿌리 깊은 나무’라는 멋진 월간 잡지를 한글 전용을 하여 창간했다. 당시로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최고의 멋쟁이 잡지였다. 이 잡지를 내가 교실마다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홍보를 하였다.

 

그때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반마다 월간 잡지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훌륭한 잡지가 많이 팔려야, 나중에 이 잡지에서 한글 전용을 한 훌륭한 신문을 창간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잡지를 사 보기 바란다.”라고 하였는데, 말이 그렇지, 사립 학교 말단 선생으로서 이런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와 배짱 없이는 할 수 없지 싶다.

 

▲ 한창기     ©브레이크뉴스

어느 핸가 이 잡지 4월호를 보니, 4.19를 어떤 글에서는 ‘의거’로 어떤 글에서는 ‘혁명’으로 표기했길래, “4.19는 의거가 아니라 혁명이다!”라면서 용어를 제대로 못썼다고 꾸짖고 항의하는 장문의 편지를 잡지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 뒤에 내가 학교를 그만 두고, ‘공병우 한글 기계화 연구소’로 가서 한글 기계화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글 기계화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서를 보냈다. 두어 달이 지나도 아무 회답이 없어서 박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란 국민이 주인이고, 대통령이 종이 아닙니까. 제가 건의서를 보냈는데,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하고 대답을 해야지, 왜 아무 대답이 없습니까! 주인의 건의를 이렇게 무시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까......?!”라는 요지의 항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는 내게 사과를 하고 내 건의서를 과학 기술처에 넘겨도 좋다겠냐고 물어왔다. 그러라고 하자, 얼마 뒤에 과학기술처가 엉터리 답변을 내게 보내 왔다. 그래서 나눈 ‘한글기계화 글자판 통일’을 위해서 순교(?)할 각오를 하고 과학 기술처장관에게 서면으로 따지고 대들었더니, 장관이 나를 불렀다.

 

내가 장관에게 불려 가서 공식 대담한 것을 폭로하는 유인물 3천부를 만들어 전국에다 우편으로 뿌렸더니, 제일 먼저 ‘뿌리 깊은 나무’의 한 사장님에게서 격려 전화가 왔다.


 “......이 어려운 시절에 과학의 진리를 위해서 송 선생이 용기 있게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격려 전화를 하였습니다. 우리 잡지에 지면을 드릴 테니, 그 유인물에서 못다 한 이야기라도 있으면 마음껏 써 보세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이 전화가 한 사장과 최초의 직접적인 인연이다. 마침내 “뿌리 깊은 나무‘에 '어느 관리의 다툼’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보잘 것 없는 내 글이 그 권위 있는 잡지에 실리니, 글도 권위가 있어 보였고, 그 반응도 엄청났다. 전국에서 격려전화와 편지가 엄청 많이 왔다. 그 바람에 나는 그 잡지가 얼마나 대단한 잡지인가를 실감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한 사장님은 나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귀한 잡지의 지면을 주었다. 내가 그 잡지에 글을 발표하고 나면 다른 잡지나 사보에서 원고 청탁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잡지에 글을 한 꼭지 발표 할 때마다 내 원고료도 높아지고, 나도 쑥쑥 자라는 것 같았다.

 

특히 1994년에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한문자로 서면하는 것을 보고, ‘주권 국가의 원수가 남의 나라에 가서 한글로 서명하지 않고 한문자로 서명하는 것은 나라 망신시키는 짓이니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라는 요지의 글을 썼는데, 아무데도 발표를 실어 주지 않아 책상 서랍에 묵혀놓았다.

 

그런데 한 사장님이 ‘샘이 깊은 물’에 지면을 주는 바람에 ‘나와 청와대의 언쟁’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한 사장님처럼 용기 있는 분을 내가 만나지 못하였다면 그 글은 영원히 발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동안 한 사장님이 내게 베푼 사랑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하루는 뜻밖에도 아침 일찍 한 사장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시간이 괜찮으면 성북동에 있는 한 사장님 댁으로 잠시 들렸다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가 하고 잔뜩 긴장을 하고 갔다. 2층 안방으로 나를 안내하더니, 옷장의 문을 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 있는 내 옷 중에서 송 선생이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다 드리겠습니다.”

 

그 집 옷장을 안 본 사람은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사장님의 성북동 집은 그야말로 대저택이다. 그 넓은 2층의 안방에 있는 옷장은 한쪽 벼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붙박이로 된 맞춤 옷장이다. 그 큰 옷장에 한 사장님의 양복이 꽉 차 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그 시절 우리 나라에서 한 가장만큼 깔끔하고 세련된 멋쟁이가 또 누가 있었는가. 그 세련된 눈썰미와 그 까다로운 감각의 국제 신사가 입던 최고급 양복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릴 때 그렇게 가나하게는 안 살았는데, 촌놈 근성이 있어 그랬는지, 사양 한 번 하는 척도 않고 좋아라고 한 사장 앞에서 올을 덜렁 벗었다. 상의는 와이셔츠, 하의는 팬츠 바람이 되었다. 한 사장님은 이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 빙그레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한 사장님은 이 못난 나의 어리석음까지도 넉넉하게 감싸 안으며 웃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염치도 없이 나는 왼쪽부터 시작해서 한번 한 벌 꼼꼼이 뒤져가며 색상이 마음에 들고 고급스럽고 좋은 것만 쪽쪽 뽑아서 입어 보고, 그 중에서도 최고급만 골라서 한쪽 옆에 따로 놓았다. 안할 말로 나도 한때 월간 ‘디자인’과 월간‘공예’라는 최고급 전문 잡지의 주간(主幹)을 했을 정도이니 내 눈썰미도 보통은 아니지 싶다.

 

내가 최고급으로 보이는 놈과 최고로 멋져 보이는 옷만 쪽쪽 뽑아서 한 옆에다 따로 놓았으니, 한 사장님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얼마나 얄밉고 한심해 보였을까! 한 사장님은 아랫목에 비스듬히 앉아 내가 입은 옷이 어디가 어떻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일일이 평가해 주었다.

 

수십 벌을 입어 보고, 내가 따로 뽑아서 한 옆에 놔 둔 것이 나중에 세어 보니 무려 일곱 벌이었다. 한 사장님은 마음 착한 운전 기사 광수씨를 불러서 “이 옷을 잘 싸서 송현 선생 사무실로 갔다 주라.”고 시켰다.

 

그 뒤 내가 나주 아주 좋아하는 친구 두 사람에게 각각 한 벌씩  선물하고 다섯 벌이 남게 되었다. 그 옷은 옷이 아니다! 한 사장님의 내게 대한 사랑의 징표이다. 그러니 함부로 입을 수가 없었다. 첫째는 아낀다고 그랬고, 둘째는 그런 고급 옷을 입고 나갈 기회가 잘 없었다.

 

그래서 입어 보지도 못하고 옷장에 걸어 두었는데, 이제는 배가 많이 나와서 아예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그 옷을 지금도 얻어 온 고대로 말짱하게 내 옷장에 잘 보관하고 있다. 주위에서 이를 알고 한 벌 달라는 이들이 있지만 혹시 한 사장님 기념관이라도 생기면 거기에 내 놓을 요량이다.

 

나는 우리말과 글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 한 사장만큼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를 갈고 닦기 위해서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이란 잡지를 통해서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요즘 나오는 잡지가 아주 세련되었는데, 이것도 알고 보면 한 사장님이 이미 약 이십 오 년 전에 ‘뿌리 깊은 나무’라는 당대의 최고 세련된 고급 잡지를 만들어서 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잡지의 세련됨뿐 아니라, 잡지를 어떻게 만들며, 필자를 어떻게 예우해야 하며,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며, 어떤 글을 실어야 하며, 어떤 글은 싣지 말아야 하며,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며, 사진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과 마음이 직접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뒤에 나온 잡지들이 그 잡지의 좋은 점을 흉내내지 않은 잡지가 별로 없지 싶다.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다. 우리나라 고유한 잎차를 대중적인 상품으로 만든 것도 한 사장이 처음 시도했고, 사라져 가는 우리의 옹기 그릇도 한 사장이 맥이 끊어지지 않게 터전을 닦았고, 우리 종이, 심지어 우리 밥그릇 까지, 거기다가 한반도의 슬픈 소리까지도 채록하고 채보하여, 깔끔하게 손질하고 매끈하게 다듬어서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좋을 번듯한 물건으로 만든 것도 한 사장 덕분이다. 이처럼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는데, 내가 모르는 것도 또 얼마나 많을까! 나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했다.

 

‘한 사장님이 김대중 정부 들어설 때까지 살아서, ’뿌리 깊은 나무‘도 복간하고, 문화부 장관도 한 번 해서 문화부 장관이 뭘 어떻게 해야 하고, 문화 정책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을 본을 보이고, 한국방송공사 사장도 했더라면, 지금까지 했던 누구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잘했을 것이고,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을 만치 잘 했을 것이니,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한 사장님만큼 높은 문화적 심미안과 날카로운 비평안을 가진 분을 본 적이 없고, 한 사장님처럼 우리 전통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 사장만한 미식가를 본 적이 없고, 한 사장님처럼 세련된 감각의 양복과 한복을 멋지게 입는 멋쟁이를 본 적이 없다.

 

한 사장님처럼 말을 조리 있고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한 사장님처럼 글을 논리적으로 잘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 사장님 정도면 까닥 잘못하면 읽을 것이 많았는데도 이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서 남이 알게 모르게 많이 힘을 썼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 사장님처럼 많은 사람을 키운 이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 사장님처럼 많은 사람을 키운 이를 본 적이 없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 사장 때문에 큰 사람이 어디 한 줄인가! 괴발개발 써온 글, 문장도 되지 않는 글을 쓰는 대학 교수나 문사들 중에 한 사장 덕 본 사람이 기하이며, 어설픈 예술가 중에 한 가장 적 본 사람은 또 기하이뇨!

 

나 같은 사람이 쓴 흠투성이인 글도 ‘뿌리 깊은 나무’ 편집부에서 좀 다듬고 마지막으로 한 사장이 한 번 봐 주면 멋지고 그럴듯한 작품이 되는데, 이걸 그 좋은 잡지에 실어 놓으면 처음과는 완전히 딴 물건이 되고 만다. 그리고 별 대단한 실력도 없으면서 예술한답시고 설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그들의 졸작들도 ‘뿌리 깊은 나무’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손을 좀 대놓으면 그만 갑자기 괜찮은 물건이 된다. 이런 면에서 사실 까놓고 말하면 한 사장 덕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나 같은 위인이 바로 그 좋은 증거이다. 내가 쓴 글은 거칠고 흠도 많았다. 사실 유신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청와대, 과학 기술처, 체신부 들을 겁도 없이 공격하는 내 글에는 흠도 많았고,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도 ‘뿌리 깊은 나무’쪽 사람들이 다듬고 조금만 화장을 하면 멀쩡하고 제법 쓸만한 물건이 되곤 했다.

 

그때는 바른 말 하는 글을 잡지에 싣는다는 것은 발행인이 잡지 문 닫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때이다. 거의 독립 운동하는 수준으로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잡지를 발행할 수 없던 시절이다.

 

내 혈기 왕성하던 젊은 날에 권력의 상층부를 겁도 없이 비판하는 글들을 한 사장님이 그 좋은 잡지의 지면을 할애해 준 것이다. 글 쓰는 이에게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은 가수가 배우에게 무대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다. 한 사장님이 그 좋은 무대를 내게 제공해 주지 않았다면 나같이 사교성 부족하고 독선적이고 고집 센 사람은 절대로 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 동안 글줄 팔아 밥술 먹고,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에 얼굴을 내밀고,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마침내는 교육 전문 케이블 텔레비전의 간판프로인 ‘케이블 스쿨 가정교육’의 MC까지 몇 년째 할 정도로 성장한 것도 알고 보면 한 사장님 공이 제일 크지 싶다.

 

더러 어떤 분들은 내 글이 쉽다고 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공박사에게 글쓰기 기초를 옳게 배운 탓이라고 생각한다. 더러 어떤 분들은 내 글에 개성이 있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함 석헌 선생님의 글을 보고 배운 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함선생의 문장은 어지간한 것은 두어 줄만 읽어도 금세 알 수 있다. 왜냐면, 함선생의 목소리가 독특하고 문장도 독특하기 때문이다. 함선생의 문장은 선생님의 육성과 마찬가지고 독특한 체취를 풍긴다. 함선생의 문장은 그야말로 언문일치가 멋지게 이루어진 아름답고 싱싱한 문장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글 속에 더러 고상하고 유식한 분위기가 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라즈니쉬에게 배운 탓이다. 내 글에 고상하고 유식한 티가 나는 것은 모두 라즈니쉬 탓이고, 조잡하고 수준이 낮은 티가 나는 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재능이 있는 제자나 후배, 이웃들에게 깊은 애정으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한 창기 사장이 내게 배푼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단식하는 날은 스승(은인)과 함께 보낸 아름답고 금쪽같은 날들의 황금빛 추억과 함께 나눈 소중한 대화를 반추하고, 그분이 쓴 책을 읽고, 그분에게 받은 귀한 선물들을 만지작거리면서 영원히 그분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일년 중에 이 날보다 더 경건하게 보낸 적이 없고, 이날보다 가슴 벅차게 보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날의 의미가 내게 참 다양하다. 일년 중에 내 몸과 마음이 가장 맑고 경건해지는 면에서는 경축일이고, 스승을 만났던 행운과 스승에게 받은 사랑에 가슴 벅차오르는 면에서는 축제일이고, 은혜의 백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고, 보고 싶어도 이승에 계시지 않아 볼 수 없어 목이 메이는 면에서는 기일(忌日)이다. 그래서 이날 나는 아무도 모르는 상주(喪主)가 된다. 앞으로 단식 일수가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며칠 더 굶는 한이 있어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단식할 스승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그만큼 내 행복도 커질 것이다. nowh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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