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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생원인은 한반도판 십자군 전쟁

홍순주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19-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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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발생 원인을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하게 잘 안 가르쳐 주는데 결론적으로 한반도판 십자군 전쟁이었다.


당시 인도 고아에서 선교하던 스페인 예수회(Jesuite)소속 프란시스 사비에르 선교사가 동쪽 끝 일본 큐슈로 들어가서 서양식 화승총을 영주 및 사무라이에게 전달한다.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총을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싸움 대신에 손쉽게 전투에 승리하게 한 후 인심을 얻어 세례를 베푼다.

 

▲ 홍순주 역사 학자.    ©브레이크뉴스

그 대표적인 예가 당시 큐슈의 구마모토 지역 영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기리시단(Christian) 다이묘(막부 쇼군 직할 지방담당 무사)가 된다. 이 때 스페인 선교사는 고니시의 소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면하여 흥정하였다.

 

즉 예수회가 무기 조총과 전쟁자금을 줄테니 일본군이 조선과 명 및 인도까지 점령하면 자신들은 이들 지역에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를 포교하겠다고 제안한다.


당시 미천한 신분출신으로서 오다 노부나가의 하급무사에서 태합 지위까지 오른 히데요시는 자신을 업신여기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귀족계급 출신의 센코쿠 다이묘 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하여 스페인 선교사의 제의를 허락하고 대외적 전쟁에 나선다.


일본은 당시 전국시대로서 전투가 빈번하여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도 떨어지고 인명피해와 경제적 파괴가 심했다.

 

이 때문에 전투에서 진 무사와 경제력을 잃은 농민들이 왜구로 변신하여 도처에서 난동했고 일본 자력으로 대외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대외적 여건이 극히 부족한 실정이었다.

 


임진왜란 시 일본군은 정규군 9개 군단 및 예비병력 7개 군단 등 총 16개 군단으로 편성되었고 조선 침략 시 대략 1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이들 군사들에게 지급된 개량된 철포인 조총만 해도 십만 정이 넘었고 군복과 말 및 식량 조달에 드는 전쟁비용을 감당할 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다시말해 도요토미가 외국 선교사의 군사지원 없이는 단독으로 조선, 명나라, 인도까지 국제전쟁을 치를 능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시 선봉에 섰던 제 1군단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로 부산 동래 상륙 시에는 군선에 둥근 원형의 십자가 마크를 새긴 군기를 달았다. 그리고 부대원 전원이 카톨릭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되었기에 자신의 군대를 그리스도 군단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고니시 부대에 검정색 사제복을 입은 세스페데스 신부가 이끄는 예수회 소속의 사제들이 뒤따랐다고 전한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포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수한 병력과 무기를 지녔던 일본군이라 할찌라도 결국 전쟁에 패하므로써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천주교 포교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도요토미의 전쟁 야욕과 선교사들의 무리한 포교로 실패로 끝나자 일본내에서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즉 1600년, 일본 중부 기후현에서 소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는데 여기서 동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대가 서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시다 미츠나리 군대)을 누르고 1603년에 에도 막부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자 도쿠가와 쇼군이 전쟁의 실패를 문책삼아 일본 내 선교사 출입을 막았고 큐슈에서 천주교 농민의 난이 일어나자 정규군을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게 되어 천주교 보급이 일본 내에서 사실상 저지당하게 된다.

 

*필자/홍순주. 역사학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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