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자유한국당 지도부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배울 것이 있기나 할까?

황흥룡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19-02-10

본문듣기

가 -가 +

▲ 황흥룡 칼럼니스트트. ©브레이크뉴스

나는 자칭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장시간 강연을 한 지만원 씨의 행동이나, 이 공청회를 개최한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정치적 자질이나, 이것이 논란이 된 상황에서 역사해석의 다양성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한 나경원 원내대표 등 자유한국당 지도부의 속내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말이 없다.

 

그러나 백주대낮에 이런 퇴행적 현상이 나타나는 상황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하고싶은 말이 있다. 아주 세세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직접 실천은 어렵겠지만 두루 참고할 정도는 될 것이다.

 

1. 어느 시대고 100%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 반대로 착하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은 부류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류는 현실에서 반공주의자로, 지역주의자로, 재벌 추종 배금주의자로, 부동산투기자로, 근본적 교리에 매몰된 종교인으로, 지역에 뿌리박은 토호로, 개발주의자로, 반통일 냉전주의자로, 사학비리와 온갖 부패와 부정비리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낡은 여론을 유포하는 사이비 언론집단으로, 성적일주의와 학벌주의를 추종하여 사교육을 부추기는 세력으로, 정치를 가장한 모리배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일부 민주화되었다는 상황에 취하여 이러한 현실적인 존재 상태를 무시하고서는 한걸음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2. 유럽에 나치주의자들이 있고 미국에 인종주의자들이 있듯이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이상향을 대변하는 모범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우리 사회가 가진 이러한 퇴행성은 두 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우리 사회의 근현대 200년이 너무 참혹한 역사적 과정이었고 그 시기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투쟁이 사람들에게 유일한 진리가 되었고 나머지 모든 가치들은 예외없이 포기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대한민국의 천민성과 저급함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질곡의 희생자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탓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하나는, 이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운동을 막론하고 역사적 지도자들의 모범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김시민도, 전봉준도, 대원군도 모범을 창출하지 못했고 망국의 상황에서 이씨 왕가는 무력하기만 했다. 이런 현상은 독립운동에서도 해방 후의 정치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범이 있고 모범을 따라배운다는 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미국의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파샤, 유고의 티토, 베트남의 호치민, 중국의 마오쩌뚱 등 일일이 사례를 열거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듯이 흩어져 있는 구슬같은 존재인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모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출애급에서 모세의 역할이나 기독교에서 예수의 역할 혹은 켈트족에서 아서왕의 역할이 그와 같을 것이다.

 

3.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우리의 역사적 상황을 가장 극단으로 몰아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분단은 우리가 꿈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고, 그것이 3년 간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유발했고, 그 후 65년 간의 반민족적 대결상태를 지속하면서 우리 상황을 가장 극단적인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러므로 오로지 모든 것을 분단의 탓으로만 돌리고 통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극단적 통일지상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겠지만 분단이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는 해악과 고통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궁극적인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단시대의 우리가 해야 할 제1차적 책무라 할 것이다. 일찌기 장준하의 발언에서 표현된 정신,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뜻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분단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니지만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을 통해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4. 결국,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책무를 누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참으로 쉽지 않은 질문이다. 대통령과 정권에게 우선적으로 책임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당연한 결론이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권, 구체적으로 대통령과 청와대와 정부와 여당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또한 편안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대통령과 정권만의 문제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실현될 수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역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마치 민주화 과정에서 국가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가 이중의 민주화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은 대통령과 정권의 역할 못지 않게 사회적 역할을 요구한다. 물론, 나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고 모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통령과 정권이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뒤로 돌아서 나 스스로에게는 대통령에게만 기대지 말고 스스로 사회적 역할을 찾아서 수행해야 한다는 국민으로서의 책무성을 되새김질 한다.

 

여기까지가 하고싶은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단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충하려고 한다.

 

해방 후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화는 모두 사회적 힘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이루어졌다. 멀리는 4월혁명에서부터 30년 전의 6월항쟁까지, 그리고 최근의 촛불혁명까지 사회적 힘이 변화의 원천이자 동력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수준에 이른 사회적 힘이 스스로 권력으로 승화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특징이자 한계였다. 혁명은 사회가, 권력은 정당이 사이좋게 분담했다. 그 후 사회적 힘은 분산 소진되었고 권력을 장악한 정당은 대의에서 이탈했다. 이 과정을 반복한 것이 한국 민주화의 특징이고 이것이 사회구성과 민주화의 특수한 관계로 정리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찾으려면 다시 분단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여기서 멈춘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정권은 대의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사회는 혁명 이후의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잘 되어야 하지만 하나라도 제 기능을 수행하면 좋은 미래를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해야 할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 브레이크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