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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의 총소리' 읽을 때가…

이승철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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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브레이크뉴스

형무소를 지금은 교도소라 한다. 교도소건 형무소이건 여기 들랑거리는 것 좋은 일 아니다. 세무서, 경찰서, 검찰청 부름이 경사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서대문형무소 다른 얘기 다 빼고 ‘한국독립운동 성지’라는 사람이 있다. 유관순·안창호·한용운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시대 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도 잃었다.

 

우리고장 삼례출신 김춘배 의사는 8년형을 포함 무기징역형을 받고 근 20년 간 감옥살이를 했기에 이 글을 쓴다.

 

박경목(48)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 연구서를 보면 “1908년 수용인원 500인 형무소를 지었으나 감옥이 좁아 1930년대 2,500인 몰아넣을 규모 5만5,000㎡(1만6,500여 평) 4~5배로 늘였고, 1935년 독립운동자 탄압을 강화 ‘사상범’만 따로 가두는 특수감옥 '구치감'을 두었단다.”

 

당시 형무소는 중앙사(中央舍)를 중심으로 수감자 옥사(獄舍)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 구조였다는데, 이는 '모두(pan)'와 '보다(optic)'를 합한 말이란다. 박경목 관장이 이르기를 "일제는 죽음과 감금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큰 시설을 통해 공포 대상으로 일반 대중에게 각인시켰다"고 한다.

 

한겨울에도 수감자에게 방한복을 주지 않았고 죄수복 사이에 솜을 넣어 누비 게 돼있는 한 벌 당 솜을 2.35㎏으로 엄격히 제한했단다. 식사는 9등급으로 독립운동가 즉 '사상범'은 5등급. 한 끼에 270g이하 하루 764㎉ 미만이었단다. 성인 남녀 하루 권장 2,000~2,500㎉에 비하면 거의 굶긴 셈이다.

 

“독립 운동가는 배 골려 협력할 걸 강요한 것”이란다. 201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온라인으로 공개한 일제시대 수형자 기록카드는 6,264장. 이 중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4,377명 가운데 20대 청년이 57.5%(2,517명)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20대 청년들이 식민사회 모순을 자각 일제에 저항했음을 알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함경도 출신 수감자가 31%(1,391명)라는 분석이 있다. 1920~1930년대 간도 공산당사건으로 수백 명이 옥고를 치렀고, 함흥형무소에서 이감된 인원이 많았다는 이유를 꼽았다. 연구자는 일제 말기 광주형무소 통계에 따라 해마다 한 곳에서 60여 명 병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감옥은 한국인을 아프게 찌른 ‘가장 날카로운 창끝과도 같은 곳’이었다. 김춘배 의사 호적부에 1942년 7월 8일 사망이라 했다. 유가족 말로는 해방과 함께 풀려나 1946년 12월 1일 별세라 하나 어느 게 맞는지 애매하다. 이러나 자러나 1934년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털어 19일 동안 항일무장 투쟁을 펼친 삼례 김춘배 의사를 완주에서 모르쇠해선 아니 되지…충남 한산 이상재 선생 기념관을 가보자. 애국자가 지역차별을 받아서는 아니 되지. 군민들 현충일에 무슨 생각을 하려나!

 

완주 군민 『암야의 총소리』 이 책 찾아 읽을 때가 왔다. 완주 도서관 실무자들은 이 책을 읽게 해야 한다. 이게 책과 놀게 하는 일이다.


*필자/이승철.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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