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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상소(持斧上疏)와 정당 지도부 뒤에 숨은 정치인들

박채순 박사 l 기사입력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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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채순 박사.    ©브레이크뉴스

조선 선조시대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사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등을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하였다. 1591년 그가 한국 침략을 앞 두고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 중국을 정벌코자하니 길을 내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강요했었다.


1544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한 중봉 조헌 선생이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원하기 위해서 당시 후학을 기르던 옥천에서 도끼를 들고 와서, 선생의 말이 잘못되었을 경우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 달라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대궐 문 밖에서 3일간 청을 했었다.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중봉로 25번길 90에는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제 제10호인 우저서원(牛渚書院)과 제90호인 조헌선생 유허추모비(趙憲先生 遺墟追慕碑)가 있다. 이 우저서원과 유허추모비는 475년 전에 김포에서 출생하신 중봉 조헌(1544-1592)선생의 얼을 잇고 구국정신과 충의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조헌의 옛 집터에 세워진 것이다.


중봉 선생은 조선 선조(宣祖)때 학자로서 공조좌랑, 성균관 전적, 전라도도사, 보은현감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전에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던 율곡(栗谷)이이(李珥)선생의 문인으로 알려졌다.


조헌 선생은 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2000년에 걸친 우리 나라 18인의 현인 중 한 분으로 옛말에 “대제학(大提學) 10명이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인은 유학자로서 설총, 최치원, 정몽주, 조광조와 이황, 이이 그리고 송시열 등 역대 대 학자들에 포함된 분이다. 현인은 학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으로 본인은 물론 배출한 가문도 대대손손 영예로 삼는 특별한 지위다.

 

그는 단순히 학문을 닦은 훌륭한 학자로서만이 아니고 고위직 관료, 중국과 교류한 외교관, 제자를 양성했던 교육자였음은 물론 임진왜란 발발 당시 국가의 위기에 의병 대장으로 활동하여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바친 애국자다. 조헌 중봉 선생은 사후 영조 10년 1734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헌은 권문세도가 출신이 아닌 김포의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요즘 표현으로는 금수저가 아닌 흙수저에 해당하였으나, 한 인간이 담담할 수 없는 많은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해서 1582년 지방 보은 현감을 자청할 만큼 효자였다고 한다.


특별히 문관인 그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인홍 등처럼  국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에 몸을 담가, 옥천 고을에서 문인들인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해 의병이 강제 해산 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여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세력이 왜군에 미치지 못해서 700명 모든 의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한편, 1866년 프랑스가 침범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이 개입한 신미양요의 서세(西勢) 동점(東漸)의 조선 후기에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론을 주장한 연암 최익현 선생이 있다. 그는 고종 13년인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타나서 지부복궐척화희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였다.

 

최익현 선생은 다수의 상소를 올려 대원군을 하야시키는 등의 개혁과 국가 안전을 주장하였으나 주장이 받아 드려지지 않자 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400명 정도의 의병으로 정읍, 순창, 곡성 등지를 몰았지만, 병력과 무기 등의 부족으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최후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구국의병항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했다.

 

최익현 선생의 지부상소(持斧上疏)와 노령의 의병 활동은 270년 전의 조헌 선생의 지부상소와 의병 활동의 고사를 재현 한 것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상의 생활의 짐에 겨운 필부필녀(匹夫匹婦)가 국란의 위기에서 스스로 목숨까지 담보로 한 중봉 조헌 선생이나 연암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와 국민의 이익과 안전을 위한 일을 자임한 정치인들이 안일하게 정당 지도부 뒤에 숨어서 개인과 자기가 속한 정당의 지도부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고 말 한마디 못하는 모습을 볼 때는, 생사여탈권을 가진 군주에게까지 바른 말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도끼로 목을 쳐 달라고 하고 몸을 던져 의병활동을 했던 우국지사(憂國之士)들에게 부끄러울 뿐이다. parkcoa@naver.com

 

*필자/박채순

 

정치학박사(Ph.D). 민주평화당 김포시을 지역위원장. 민주평화당 재외국민위원장.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 객원연구원 역인2016~2017). 아르헨티나 국립 라 플라타 대학교 객원교수 역임(2014~2016)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 연구위원. 월드코레안 편집위원. 복지국가 society 정책위원. (사) 대륙으로 가는길 정책위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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