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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그해, 6월...6월 민주항쟁이라는 역사적 드라마

황흥룡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19-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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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이른바 호헌 회귀를 선언하면서부터 민심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해 전인 1986년 4월30일 개헌 논의가 재개되면서 비교적 활성화되었던 언로는 4.13 호헌 회기선언으로 하여 다시 폐쇄되고 정치적 민주화에 걸었던 국민적 기대도 무섭게 냉각되었다.

 

마침내 6월10일 집권당인 민정당(民政黨)은 개헌 의지의 민심에는 아랑곳없이 잠실체육관에서 차기 대통령후보로 노태우를 지명하고 독단적 정치일정을 강행하였다. 이에 맞서 야당과 재야가 주도하는 호헌규탄(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22개 도시에서 진행되면서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드라마는 폭발적으로 일기 시작했다.

 

6월10일 국민대회의 원천봉쇄를 위해 당국은 전국적으로 3백75개 중대 5만8천여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재야인사 7백여명을 연금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작 이날 오후 6시에 서울의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에서 열린 국민대회는 경찰의 철통같은 포위로 차단된 가운데 미리 현장에 가 있던 수십명의 참석자들이 종소리에 맞춰 애국가를 불렀다.

 

곧이어 서울 시위는 대규모화의 양상을 보였고, 그것이 14일까지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여기서 키워진 불씨는 부산, 대전, 진주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명동성당 농성이 계속되는 동안 명동거리는 한때 시민데모장으로 변했고 시민토론대회가 그 자리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6월 민주항쟁의 주요한 분수령은 6월18일밤 부산 시위에서였다. 부산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약 4Km의 간선도로가, 국민운동본부측 추산으로는 약 30만명, 경찰추산 8만의 학생과 시민에 의해 완전 장악되었다.

 

시위대는 약 6시간이나 점거시위를 벌이면서 수백대의 차량 시위대를 앞세워 부산 시청과 KBS부산 방송본부를 위협했다.이 부산시위는 마치 4.19전야와 부마사태(釜馬事態)의 혁명적 열기를 상징하는 시위와도 같이 정권적 차원의 무서운 충격을 주었다.

 

19일자 (요미우리)신문은 1면 머리기사에서 (반정부데모 전국에 확산, 부산 8만 진압포기)라는 기사로 한국에서의 심각성을 다루었고 세계의 모든 이목이 한국에 집중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위수령”이나 “계엄령”을 놓고, 정권내부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논쟁이 한창이라는 애기가 시중에 떠돌았다.

 

그러나 19일 9시 국무총리 담화로 일종의 (경고성)성명이 발표되면서 비상조치 발동은 일단 취소됐다. 이에 앞서 9일 오후 2시 릴리 주한미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했다. (뉴욕타임즈)는 이 사실을 보도하고 그 내용은 전대통령에게 완전한 민주화를 촉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19일에서 20일 양일간에 광주에서는 시민, 대학생 1만명의 대규모 야간 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항간에 퍼져있는 비상조치에 대한 도전의 의미를 함축한 것이었다.

 

시위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일어났으며 얼마간의 폭력이 따랐다. 시민들의 시위참여는 점차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고교생까지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그간 비교적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언론(言論)과 중산층이 계속 가열화되는 민중항쟁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제 민심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월20일 국민운동본부의 인명진 대변인이 성명을 통해 첫째, 4.13조치를 철회 둘째, 6.10 대회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석방 셋째, 집회시위 및 언론자유보장 넷째, 최루탄 사용중지 등 4개 항을 내놓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끝내 26일 (직선제, 독재타도)를 외치며 전국적으로 평화대행진이 강행되었다. 국민운동본부발표 18만, 신문발표로는, 서울 4만, 광주 5만, 부산 4만 기타지역 7만등 20만으로 집계되었고 시위자와 응원자의 물결은 노도처럼 전국을 누볐다.

 

최루탄이 난사되고 자동차 경적에서부터 보도블럭, 화염병이 동원된 살벌한 시위현장에서 시위군중들은 국민과 더불어 (4.13의 사실상 철회)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고 결연한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정부로서도 더 이상의 공권력과 물리력에는 한계를 느끼는 그런 순간이었다. 이렇게 숨가쁘고 살얼음을 걷는 듯한, 뭔가 터질것 같은 격동이 거듭되고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호외 호외...6.29선언

 

6월29일 오전 10시 뉴스는 우리의 귀와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움”그것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이제 우리나라의 장래 문제에 대해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민들 사이에 쌓여진 뿌리 깊은 갈등과 반목이 국가적인 위기로 나타난 이 시대적 상황에서 정치인의 진정한 사명에 대해 깊은 사색과 숱한 번뇌를 하여 왔습니다.또한 학계, 언론계, 경제계, 종교계, 근로자, 청년, 학생 등 각계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국민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는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의 구상을 주저 없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을 대통령각하께 건의 드릴 작정이며, 당원, 동지,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결심입니다“이러한 서두를 시작으로 8개항의 민주화 실천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른바 노태우의 ‘6.29 선언’이 그것이다. 하루아침에 마치 야당으로 변신한 듯한 민주주의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노태우 민정당대표의 선언은 지금까지 실패와 좌절과 분노와 저항감만을 맛보았던 국민들에게 오랜만에 진한 감동을 주었다. “오늘은 기쁜날, 찻값 무료”라고 어느 다방앞에 써 붙인 “방”은 시민의 반응과 심정을 잘 드러낸 한 단면이었다.

 

6월10일부터 6월26일에 이른 실로 숨가쁜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정당 정권에 대한 치열한 분노와 항쟁의 불꽃을 당기게 하는데 크게 작용한 것은 6월9일 최루탄을 맞고 사경을 헤맨 이한열(李韓烈 20 연세대 경영학과)군의 모습이었다. 산소호흡기로 27일간을 버틴 이군은 끝내 숨지고 말았다. 7월9일 이군의 장례에는 전국에서 1백 50만의 애도인파가 몰렸다.

 

6월 민주항쟁, 그 주역은 누구인가

 

6월! 그 격동의 민주항쟁, 그 주역은 과연 누구인가? 우선 학생중심의 운동권과 중산층의 연합세력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흐름을 조직화하고 관리하는 데는 재야나, 야당의 기여도도 컸다.

 

이밖에 교회, 언론 및 지식인의 역할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리고 공개 외교의 형식을 통하여 비교적 적극적으로 사태의 추이에 관여한 미국의 영향도 간과하기 어렵다. 아울러 이 모든 힘을 하나로 결속시켜 하나의 성취로까지 이끌어낸 성숙된 시민 의식도 또한 기여도가 컸다. 우선 학생운동권은 1987년에 접어들면서 종래의 급진적. 관념적 성격을 탈피하여 보다 유화적이고 대중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층민중에 기반을 둔 권위적 사회변혁세력의 색채가 강했던 학생운동은 기존 투쟁방식으로는 중산층의 호응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일반학생 층으로 부터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상황인식에 도달한 듯 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급진화 추세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과격한 구호와 요구사항을 경계하면서 도시 중산층과, 근로자와의 광범위한 공감대 형성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지역 대학생 대표자회의’ (서대협)는 비교적 온건 노선을 표방하며 국민운동본부의 결정사항에 적극 동조하여 6월 26일의 평화대행진이 성공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급진적 운동권세력 뿐만 아니라 평소 온건하고 소극적이었던 학생세력도 항쟁의 대열에 대거 참여했다. 이에 따라 혁명적으로 제헌의회소집을 요구하는 (민민투)계열과의 거리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났다.명동성당 농성때 여기 참여한 학생들이 좌경, 용공구호를 크게 경계하며, (해방구)등 덜미잡힐 용어를 애써 피했던 것도 유의할 일이다.

 

비교적 방관자의 입장에 있었던 중산층이 외국 언론들의 보도에 의해(중산층반란)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6월 항쟁에서는 도시 중산층의 시위 참여와 가두지원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평소에 정치적 쟁점에 대해 비교적 공개적 의사표시를 삼가해왔던 그들의 이러한 변모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원래 민주적, 인간적, 가치 지향성이 높은 이들 계층에게 있어 정부가 자행한 일련의 사건들, 특히 4.13조치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들이 던져준 충격은 매우 컸으리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쏘아대는 최루탄에 대한 분노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한열군에 대한 연민의 정이 사회 도의와 윤리적 가책으로 이어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짐작된다.

 

즉 죄없는 학생들이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죽어가야 하며 자신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대하여 기성인, 사회선배로서 더 이상 바라다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회적 도덕성이 작용했기 때문이며, 정부에 대해서도 “지금까지는 잘해주길 바랬는데 해도 너무들 한다”는 저항감이 이들을 행동으로 유도했으리라고 짐작된다.

 

6월12일 명동성당 농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 근처에 점심을 먹으로 나왔던 회사원, 일반시민 등 2천여명이 1시간 30분동안 길을 메운 채 즉석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중산층, 특히 교육수준이 높은 도시의 (신중산층)의 정치 및 인권 상황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극적인 상황에서 비조직적으로 분출된 현상이었다.
 
6월 민주항쟁에 조직 노동자와 기층민 등 민중부분의 참여는 외관상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라도 적극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주요한 상황변수로서 사태 추이에 계속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때 6월 항쟁은 가장 광범위한 민주세력의 연대위에 이룩된 국민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6월 민주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주요한 요인의 하나는 야당과 재야세력간의 원만한 협조관계였다. 5월27일 향린교회에서(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함으로써 정당과 재야세력의 접목이 이루어졌고, 이를 거점으로 6.10 사태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대통령직선제를 당면의 공동목표임을 천명했고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고수함으로써 점진개혁을 선호하는 중산층과의 거리를 좁혔다.

 

또 하나 6월 민주항쟁 과정에서 확인될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 내에 정치권밖에 적지 않은 참된 권위의 원천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그 좋은 예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지식인과 언론도 이 범주에서 논의 될 수 있다.

 

교회는 줄기찬 민주화의 투쟁에 있어 항상 불퇴전의 용기를 보여주었고, 특히 재야세력의 중요한 조직기반의 뒷받침이 되었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부활메세지” 김승훈 신부의 “박종철군 고문 은폐 조작극 폭로” 등은 우리사회의 민주의식 및 인권의식을 높이고 민정당 정권의 정당성 기반을 약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명동 농성사태에서 보여준 것처럼 교회는 참된 중재자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평화적 방법으로 정부, 교회, 학생 모두가 승리자로 만들어 냈다.

 

민주항쟁과 미국의 역할

 

제도권 언론은 기껏해야 ‘여야, 다 나쁘다’는 식으로 양측을 비난하는 정도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6월의 민주항쟁이 6월18일을 고비로 국민혁명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언론의 태도변화가 왔고, 언론도 민주화의 대열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6.29 선언”으로까지 이끄는데 언론은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좀 미흡한 감이 있지만 이땅의 지식인들인 대학교수들도 그 비판적 이성을 무기 삼아 6월의 민주항쟁에 한몫을 했다. 1986년 1차 서명에 이어 4.13 조치 이후 제2차 교수서명이 전국 각 대학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이 사회의 민주양심을 일깨웠고 다양한 지식인 집단의 후속 서명을 유도했다.

 

과거 미국은 한국의 정치발전문제에 대하여 대체로 원칙론만 강조하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는 초연한 입장을 지켜왔던게 사실이었다. 그러한 미국의 입장이 결과적으로 권위주위 체제를 도와주는 쪽으로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비판도 받아왔다.

 

실제로 (4.13조치)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입장은 매우 소극적이어서 대체로 (현상존중)의 선에 머물렀고, 선거법협상 정도의 개선을 통해 한국의 정국이 안정될 수 있으리라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한국 정국을 보는 시각은 6.10 사태 이후 미국행정부의 대한외교는 태도를 달리하였고, 다분히 (공개외교)의 형식을 취하면서 유례없이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고 그 친서의 주요내용을 언론에 흘린 것과 개스턴 시거 차관보의 6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서울방문 이외에도 백악관 기자회견, 국무성의 대한국 공개 메시지 발표, 의회의 대한민주 촉구결의안에 대한 행정부의 공개적인 지지 표명 등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공개외교의 방법이 두루 동원되었다.

 

미국행정부의 이러한 직선적 “공개외교”는 물론 미국언론 및 의회의 적극적인 관심에 자극된 바였고 ‘리바이어던’은 서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은 군부개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또 이를 한국정부에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것이 한국정부의 무력사용 자체에 구체적으로 얼마만큼의 도움을 주었는지는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어려우나 적어도 6월 사태를 민주적,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긍정적 기여를 한 것임엔 틀림없다.

 

사실 과거에 한국에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주권국가인 한국에 내정간섭의 인상을 풍기고, 소극적인 자세표명을 하면 동조자라고 비판받는 입장이어서 이와같은 시각을 두고 여. 야 의견을 달리하였다.

 

실제로 한국의 어떤 사태에 미국이 관여해 줄 것을 한국의 야당이 요구하면 여당측에서는 사대주의(事大主義) 발상이라고 야당을 비난했다. 때문에 미국은 사태 진전을 보면서 ‘현상존중’이라는 입장만을 고수해 왔던 것이다.

 

▲ 황흥룡 칼럼 니스트. ©브레이크뉴스

민주화, 그 새벽은 열렸는가

 

6월의 항쟁은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 고질적인 정부의 체제악(體制惡)에 대한 비판이요. 도전이었다. 6월의 항쟁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도덕성이 결여된 제5공화국의 공권력과 싸움에서 시민이 이긴 위대한 승리였다.

 

이 항쟁의 승리는 민주회복을 위해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고, 우방을 비롯한 세계에 우리의 민주화 실천의지를 널리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몇 사람의 권력에 집착한 지도자나 일부 군(軍)에 의하여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에서 말한 권력에 집착한 몇 사람의 지도자에 의한 것이지 한국 국민이 결코 민주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국민은 위대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결과였다.

 

6월 항쟁은 정치적 민주화를 성취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정치적 민주화의 성취만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는 아니다.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 등이 뒤따라야 정치적 민주화의 빛이 퇴색되지 않고 빛을 발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민주화는, 절차적 민주화로써 권력을 나누어 가진다는 뜻의 ‘권력분배’ 혹은 ‘권력의 나눔’을 의미한 것이라면, 실질적인 경제의 민주화는 복지사회의 건설 등으로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복지의 나눔’즉 고루 잘살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바로 경제적 민주화다.

 

80년대 후반의 급진적인 노사(勞使)관계 악화로 인한 노사 분쟁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것은 경제적 민주화의 미흡에서 기인한 문제점이 분출한 것이다. 경제적 민주화의 실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문화적 민주화다. 문화적 민주화란 표현(表現)의 자유를 의미한다. 국민이 자기의 의사 내지는 감정의 표출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고,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가능한가가 바로 문화적 민주화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모든 행위 자체도 포함된다. 여기에서 표현의 자유란 진실에 바탕을 둔, “양심”까지를 의미한다.

 

아테네의 위대한 입법자(立法者) 솔론은 “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자와 똑 같이 분노할 수 있을 때, 정의(正義)는 실현된다” 솔론의 말을 음미해보면서 민주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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