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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민권운동가 이희호 여사를 떠나보내며…오늘은 슬프다!

장성민 전 국회의원 l 기사입력 2019-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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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06월14일 서대문구 창천교회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의 장례 예배의 장면.   ©뉴시스

▲고 이희호 여사. 이 영정사진은 자신이 생전에 골랐다고 한다.     ©브레이크뉴스

 

나는 20대 청춘의 피가 펄펄 끓어 넘칠 때 처음 이희호 사모님을 만났다. 나의 첫 사회생활이자 첫 직장은 동교동 자택이었다. 지금은 변했지만 당시에는 자택 본채 맞은편에 2층짜리 작은 별채 건물이 한 동 있었다. 그곳이 바로 내가 사회의 첫 발을 내 딛고 일을 하게 된 정치사관학교 동교동 비서실이었다.

 

20대 청년 시절의 내 꿈은 엄혹한 군부독재정권과 맞선 민주투사 김대중 선생의 비서가 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조국 대한민국이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부국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지역차별이 없는 자유민주국가가 되는 것을 꿈꿨기 때문이다.

 

나는 70, 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 이 땅에 대해서 가장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두 가지를 가슴에 품고 살아 왔다. 하나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의 흉상(凶狀)이고, 다른 하나는 동서로 분열된 조국의 졸상(卒像)이다. 전자는 外傷(외상)이고 후자는 內傷(내상)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엄격히 말하면, 이 두 개의 상처는 모두 내상이다.

 

나는 왜 분단과 분열을 혐오하는가? 4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대한민국과 같은 영토적 소국(小國)에게 분단과 분열은 곧 내란(內亂)이다. 그리고 영토적 소국에 내란이 잦게 되면 주변 외세는 공격을 통한 세력 확대의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분단과 분열은 망국의 지름길이 된다. 이는 5천년 우리 역사에서 확인된 불변의 법칙이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은 반드시 그 역사를 되풀이 한다는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씀은 지금 미중시대의 한반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치명적 경구(驚句)로 다가온다.

 

 

▲ 이 희호 사모님이 좋아하셨던 '이사야' 성경구절을 친필 붓글씨로 새겨 만든 도자기. 그 분은 평소에도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전도했다.    ©브레이크뉴스

오늘 이희호 여사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왜 이런 글을 쓰는가?

 

그 분이 가장 싫어한 말은 망국(亡國)이란 단어였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배, 한국전쟁을 겪어온 이희호 사모님은 망국이 무엇인지를 직접 겪고 살아 온 세대였다. 그랬기 때문에 망국의 징조가 나타나는 것을 혐오했고 두려워하셨다. 그리고 분열과 차별을 가장 심각한 망국의 징조로 보셨다. 그래서인지 평생토록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분열 없고 차별 없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쉬지 않고 기도를 하셨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오면서 최고의 엘리트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이 일본어를 말할 줄 모른다고 한다면 누가 쉽게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이희호 사모님은 일본어를 말할 줄 모르는 분이다. 식민지배국의 언어를 거부하고 외면하신 것이다. 그것을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생각하며 일제 강압통치에 맞선 삶을 살아오셨다. 이희호 사모님이 가장 바라던 나라는 모든 국민이 그 어떤 차별도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자유민주적 부국이었다.

 

굳이 정치적으로 이희호 사모님을 평가한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는 강력한 반대자였다. 누구의? 정치인 김대중의. 어떨 때? 나라가 지나치게 우쪽으로 기울어지면 가운데로 오도록 했고, 나라가 지나치게 좌쪽으로 기울어지면 다시 가운데로 오도록 정치의 중심을 잡아 주신 보이지 않은 한국정치의 균형추였다.

 

바로 이런 이희호 사모님의 정치적 조언이 있었기에 김대중 대통령은 나라가 진보를 필요로 할 때 진보였고, 보수를 필요로 할 때 보수를 했다. 세상의 보는 눈은 다르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고 국가의 중심을 바로 잡기 위해 정치의 중심을 먼저 바로 잡으려 노력한 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김 대통령으로 하여금 항상 그 자리를 지키게 해 온 보이지 않은 역할자가 바로 이희호 사모님이셨다.

 

나는 20대부터 정치, 특히 국가경영, 사회경영, 정당경영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배우고 자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 대통령은 단 한 번도 나에게 '장 비서'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장 비서란 호칭 대신에 항상 '장 동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희호 사모님은 항상 '장 비서라 호칭했다. 나는 누구의 비서일까? 두 분의 비서였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는 정치적 신념을, 이희호 사모님으로부터는 종교적 신앙을 영향 받고 자랐다. 그래서 나는 단지 분노의 돌만 던지는 민주화 데모꾼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공부하고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 왔다. 이런 자유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뿌리박힌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꿈꿨던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사모님을 만난 것을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 고 이희호 여사와 장성민 전 의원(왼쪽)     ©브레이크뉴스

김대중 대통령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겪으면서 수많은 탄압과 고문을 당하고 사경을 헤맸어도 자신의 집권 후에는 단 한 사람의 정적에게도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을 세워주자는 제안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였고,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해서도 그 어떤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았다.

 

이 때 나는 '용서와 화해'란 가치의 열매는 이렇게 힘겨운 절제와 인내와 용기를 가져야만 무르익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이 두 분을 통해 훈육되고 학습하고 자란 최고의 국가적 가치는 '구국(救國), 애국(愛國) 그리고 조국(祖國)'이란 말이었다. 용서와 화해, 통합과 화합이 받쳐준 조국 대한민국.

 

이희호 사모님은 조국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정의, 평화, 행복의 가치로 넘치는 나라가 되기를 항상 간절히 기도하셨다. 조국이 어려울 때는 항상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의 생명을 믿고 조국의 부활을 기도하셨다. 하지만 이희호 사모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누려 오신 삶터를 훌쩍 떠나셨다. 그리고 그간 10년 동안 떨어져 지내셨던 김대중 대통령과 재회(再會)하신다.

 

 

고 이희호 여사 장례식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낸 조화. ©브레이크뉴스

30대 초반 동교동 자택에서 사모님과 둘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사모님, 총재님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결혼 하셨어요?”라고 묻자 그 땐 저렇게 배도 안 나오고 뚱뚱하지도 않았어요. 호리호리하고 늘씬해서 아주 멋졌어요. 무엇보다 똑똑했죠.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학문적 욕구도 강했고 배움에 대한 호기심도 무척 강했어요.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내가 도와주면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러고는 나 보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도와 달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냥 '그러자'고 했죠. 흐흐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사모님, 총재님과 결혼하신 거 후회해 본 적 없으세요?” “후회요? 후회, 그런걸 뭐하러 해요? 그런걸 해서 뭐하게요?” 나는 다시 또 물었다. “사모님, 어떤 경우든 총재님께 말씀 안드릴 테니까 솔직히 말씀 좀 해 주세요? ?” 사모님은 아주 수줍어 하시면서도 웃음이 나와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밥숟가락을 잘 들지 못할 만큼 웃으시면서 아니 오늘따라 장비서가 별걸 꼬치꼬치 다 물어 보네. 그런 걸 알아서 뭘 하려고요? 그것 꼭 알고 싶어요? (순간적으로 잠시 생각을 하신 후)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다른 얘기 좀 해 봐요다시 한참 동안 폭소가 터졌다.

 

살아생전 이희호 사모님은 김대중 대통령의 사명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고, 자신의 사명은 그런 김 대통령을 돕는 것"이라는 말씀을 줄곧 해 오셨다. 이제 오늘 합장(合葬)을 통해 또 다른 영생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실 두 분의 조국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사모님 보고 싶습니다. 제게 주신 크신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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