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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그 시대 사회의 거울, 금지곡 이야기

정구영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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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구영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세월이 바뀌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 주위에서는 낯익은 풍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지만 음악만큼은 그 시대의 역사이자 삶의 거울이다.

 

올해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 민족이 미군정(美軍政)을 거쳐 한반도의 영욕(榮辱)이 교차된 건국 73주년이 되는 해다. 북한 김일성의 도발에 의한 6.25전쟁 후 대한민국의 삶의 현장은 잿더미 속에서도 세계 역사상 10대 선진국이 될 때까지 국민들의 삶과 애환과 마음을 보듬어 주었던 각 노래마다 사연이 있다.

 

‣ 노래, 대중가요는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동반자!

 

우리가 흔히 쓰는 말(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대 암울하고 어려웠던 시절 대중가요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애환을 달래어 주는 동반자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노래는 사회의 거울이자 내 삶을 보듬어 주는 어머니 같은 것이었다.

 

알다시피 일제 강점기에는 천황을 찬양하는 신문, 호외(號外)가 주를 이루었고 대중음악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에 금지곡만 해도 김현순의 “치안방해”, 채규엽의 “아리랑”, 김형환의 “조선행진곡”, 김정구의 “타향의 술집” 외 수십 곡이다. 이중 1930년 이애리사가 부른 “황성옛터”는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月色)만 고요해/폐허에 서림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는 이 노래가 반일 의식을 선동한다 하여 금지시켰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불멸의 대히트곡은 故 김정구가 1938년 “눈 물젖은 두만강”,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36년 해방과 이승만의 민주공화국의 건국의 기쁨을 송두리째 짓밟았던 6.25 상처는 우리 역사 가요사(歌謠史)를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6.25는 3년에 걸친 민족 간의 전쟁, 1950년 신세영의 “전선야곡”,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1956년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외 “신라의 달밤”과 “전우여 잘있거라”, 이혜연의 “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같은 전쟁 가요가 국민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며 심금을 울렸다.

 

6.25 전쟁 시 북한의 무력 도발로 피난길에 퇴각하던 북한괴뢰군에 납치당해 가족과 생이별 하고 미아리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가족과 헤어졌다 극적으로 재회한 뒤 아내로부터 “영양실조로 고생하던 내 살배기 딸이 미아리 고개를 넘던 중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비통한 마음에 쓴 작품이 이혜연이 쓰고 반야월의 작사에 이재호가  작곡한 “단장(斷腸․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다)의 미아리 눈물고개”는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맨발로 절며 절며/끌려가신 이 고개여․․․”는 가족의 한을 노래로 승화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군인과 약 10만 명 국민들이 함경남도 함흥에서 미군 함정에 승선해 부산항으로 피난하던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노래는 1953년 강사랑 작곡하고 박시춘 작곡한 “굳세어라 금순아”는 “눈보라기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에/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1958년 공산 치하에서 탈출해 남쪽으로 내려온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인 실향민(失鄕民)들은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애통함을 담았다. 

 

1958년 야인초 작사하고 한복남 작곡한 “한 많은 대동강”은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외 전쟁으로 인한 가족과 생이별과 죽음 등 슬픈 노래를 부르며 한(恨)을 달랬던 것이다.

 

‣ 박정희 정권은 치욕의 노래마저 부르지 못하게 한 금지곡 시대!

 

5.16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긴급조치 1~9호는 가수에게는 노래마저 자유롭게 부를 수 없는 금지령에 수십 명의 가수들의 생계는 물론 1987년 서울의 봄까지 추방되었다. 알다시피 영구집권을 하겠다는 유신헌법에 대중가요는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1970년대는 김민기의 작곡에 양희은의 “아침이슬” 노래가 민주화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 주기도 했다.

 

박정희가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을 펼칠 때 1972년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와 고향을 그립게 하는 “고향 열차”는 개발시대 실향민의 망향가였고, 전두환 정권의 경제 발전으로 풍요로워진 1980년대는 감성을 주는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등이 역사의 중심축을 이루기도 했다.

 

국민 가수의 여왕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후 엘레지의 여왕, 트로트의 여왕, 국민 가수가 되었지만, 유신 독재 박정희 정권은 노래를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박정희 정권 때 금지곡은 역사가 말하고 있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불신감을 장했다는 이유로, 이미자의 최고의 히트곡인 “동백 아가씨”를 1960년 한일 회담을 강행하던 때 국욕적인 회담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은 키 작은 박정희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1년간 방송 금지를 받았고, 배호의 “0시 이별”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송창식의 “왜 불러”는 청년들을 자극한다 하여, 양희은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은 비관적이다 하여, 신중현의 “미인”은 유신헌법을 비하 했다 하여, 이장희의 “그 건너”는 사는 것이 너 때문이라는 이유로, 그 시대 최고의 인기곡인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불온하고 선정적이다는 이유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는 것조차도 아무리 일해도 부자들만 행복해 하는 것을 조장했다는 것과 최소한의 지유만도 빼앗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박정희 독재자는 유신 체제에 반발하고 조장한다는 이유로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유린하고 대중가요에 대하여 수백 건에 금지를 했던 것이다. 

 

대중음악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트로트는 한국 역사 음악사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들이 많다. 대중가요사(史)를 통틀어 최초 금지곡은 일제 강점기에 시작해 박정희 정권 긴급조치 때 가장 많았다. 

 

독재자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신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총으로 시해된 후 민주화 서울의 봄인 1987년에야 해제된 후 오늘날까지 금지곡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 노래는 그 시대의 우리 사회 거울!

 

일제의 합병 후 1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날 여전히 음악이 없는 세상은 죽음 그 자체라 생각한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영화, 드라마, TV, 종편, 유튜브 외 대중음악 없이는 진행할 수 없는 라디오 선곡(選曲) 시계는 그때 그 시절 과거로 철이 지난 옛 노래들이 거꾸로 돌리고 있는 중이다.

 

노래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시련과 고난의 아픔이나 가는 세월에 대한 회한(悔恨)이 많은 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이지 않을까? 한국 가요의 관통한 키워드는 “눈물의 한(恨)”과 “사람과 사랑”, “고향”, “낭만”, “희망” 등이 전 세계에 한류(韓流)로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jgy2266@hanmail.net

 

*필자/칼럼니스트, 수필가, 평론가(역사), 언론인(주필, 논설위원, 편집위원), 약초와 건강 특강 전문 강사, 약초에서 건강을 만나다, 산야초대사전, 약초건강사전, 자연치유 외 40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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