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얄타 회담에서 한국-일본에 대한 처분

정길선 칼럼니스트 l 기사입력 2024-02-12

본문듣기

가 -가 +

▲ 정길선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전편에 이어 후편이다. 얄타 회담을 보면 한국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과의 전후처리 문제들을 따져보면 우리하고 관계가 당연히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일제가 패망 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국, 소련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계기가 마련된 회담이기 때문이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당시 일본과 서로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에게 대 일본 전을 참전해 줄 것을 제의했다. 중국 북부에 존재하던 관동군까지 미군이 정리하기에는 어려웠던 탓이다. 만주는 미국 본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보급선조차 매우 길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자칫 잘못했다가는 중국 내 일본군의 역습을 받을 위험도 있었다. 더불어 만주 지역은 소련 접경 지역이라 잘못하면 소련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소련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불어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육군인 관동군은 일본 육군 중에서도 정예병에 속했고 만주군 17만 명, 몽강군 44,000명을 포함해 총 71만의 대군이 주둔해 있어 만만하지 않아 보였다. 따라서 소련이 미국의 뜻을 받아들여 작전을 실행한다 해도 71만의 관동군 정예병들을 상대로 상당한 피해를 보며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육군과 소련군의 힘을 뺀 다음과 일본과 조선, 만주까지 장악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웠다. 그러면서 독일의 동쪽, 동유럽을 내주는 대신 미국은 극동을 취하여 소련을 배후에서 시베리아를 압박하여 유럽에 크게 신경쓰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국제 외교, 정치란,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하게 되어 있지만 내줄 때는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는 것은 아낌없이 주고 실리는 뭐든 닥치는데로 취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런 국제 관계에서 실리 취득은 냉혹하고 살벌한 전쟁과도 같으며 때에 따라서는 국익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 구밀복검(口蜜腹劍),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전략은 기본이다. 얄타 회담 자체가 그런 살벌한 외교 복마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소련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루스벨트의 계획대로 동유럽을 내주고 소련이 일본에 고전하여 만주까지 미국의 영향권에 둔다면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현저히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하여 미국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까지 계산한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 참여를 대가로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인 남사할린 등을 요구했다. 

 

소련이 남사할린을 요구한 이유는 만주가 설사 미국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 소련의 배후인 시베리아가 위협받는다고 해도 사할린을 통해 일본 본토에 주둔 중인 미군을 압박한다면 만주에 주둔할 미군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에 거슬릴 일이 아닐 것이다. 언제든지 소련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해 도쿄로 내려와 미군을 공격한다면 그 또한 미국의 배후를 치는 격이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동북아시아에서 고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혹시나 모를 만주를 두고 소련에 대한 위협, 즉 일본과의 전쟁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스탈린의 보험용 전략이었던 것이다. 유라시아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두고 국익을 가지고 이처럼 피튀기는 전략을 구사하며 서로를 옥죌 궁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냉엄한 국제 전략의 중요도이다. 우리 한국도 국제 정치와 전략, 이 거대한 체스판 위에서 어떤 말을 움직여 우리의 국익과 실리를 취해야 할지 강대국들의 국제 전략을 당연히 배워야 한다. 국제 전략과 관계를 선악에 따라 움직이는 멍청한 국가는 대한민국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얄타 회담으로 돌아가서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폭탄이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협력이 절실했던 미국은 이와 같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을 두고도 각 국 정상들은 서로 다른 목적과 전략을 두고 한반도를 독립시키는 문제를 논의했다. 일단 루스벨트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 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이 강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소련을 상대로 한 그런 순진한? 생각이 냉전 시대라는 역사를 출범시켰고 결국 두 나라와 두 이데올로기의 진영은 루스벨트의 뜻과는 다르게 막후에서 치열한 대립을 벌이며 서로를 붕괴시키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된다. 그와 같이 한국을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이권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신탁통치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은 구체적인 조항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 시에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다 같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협력하자 정도의 추상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더불어 루스벨트는 당시 중국을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할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고 그 안에서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의 국가로도 쓸모가 다양했다. 그리고 얄타 회담에서는 한국 독립에 대한 이슈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안도 아니었다.

 

한편, 스탈린은 한국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 보다 일본이 다시 제국을 일으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할 수 있다는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한국 문제를 조망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에 독일이 매우 빠른 속도로 세력을 회복해서 소련을 비롯한 전 세계에 위협이 되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를 패배시킨 전적이 있는 국가였던지라 잠재적인 일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헤 일본에 대해 강한 견제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소련이 한국 문제를 다루면서 가장 핵심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한반도에 일본을 견제할 친소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이 1918~1922년 간의 러시아 적백 내전의 기간 동안 일본에 의해 시베리아를 실질적으로 장악당했다는 사실을 견지해 본다면 소련입장에서는 일본을 마땅히 견제해야 할 상대로 인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고 본다. 소련은 일본의 침략으로 상실한 사할린 남부와 부속 도서들에 대한 회복 외에도 외몽골 독립 유지, 일부 연해주와 사할린의 항구를 소련의 무역항 및 군사 항구로의 전환, 철도 이용권 복구, 쿠릴 열도 할양 등을 추가적으로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독일과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소련군 포로들의 운명 또한 여기서 결정되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해방한 포로와 혹은 독일군으로 전향해서 활동하다가 다시 포로로 잡힌 소련군 포로들을 모두 소련으로 송환하기로 했다. 물론 이들 전향자 포로들은 거의 모두가 처형되거나 소련 시베리아의 수용소인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전향하지 않은 나머지 포로들은 국가 영웅으로 인정해 연금과 레닌 군사 훈장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회담이 끝나고 몇 개월 뒤, 한국 대표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UN 창립 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장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매우 냉정했다. 당시 국제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던 이승만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인물들은 아무도 없었고, 이에 이승만 측은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 정신에 의거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도도 무산되자 한국 대표단들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는 미국, 영국, 소련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주장하게 된다.그러면서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조약에 이어 또 다시 비밀스러운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미국은 밀약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부인했으며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lukybaby7@gmail.com

 

*필자/ 정길선. 

노바토포스 회원, 역사학자, 고고인류학자, 칼럼니스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유라시아 고고인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Following the prequel, it is the latter. The Yalta talks show that Korea has nothing to do with it, but considering the post-war issues with Japan, of course, it has to have something to do with Korea. This is because the meeting provided an opportunity for the Korean Peninsula to be divided and occupied by both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along the 38th parallel after the defeat of Japanese imperialism. At this meeting, the United States proposed that the Soviet Union, which at the time had a mutual inviolability treaty with Japan, participate in the war against Japan. It was difficult for the US military to organize even the Kwandong army that existed in northern China. Manchuria was very far from the US home country, and even the supply line was inevitably long, and there was a risk of being attacked by the Japanese military in China. In addition, since Manchuria is a region bordering the Soviet Union, it could be considered a threat to the Soviet Union and could be attacked by the Soviet Union if mistaken. In addition, the Japanese army stationed in Manchuria belonged to the elite military among the Japanese army, and a total of 710,000 troops, including 170,000 Manchurian troops and 44,000 Monggang troops, seemed to be easy. Therefore, even if the Soviet Union accepted the wishes of the United States and operated, it was expected that it would suffer considerable damage to the 710,000 Kwandong army elite soldiers. 

 

At the same time, he created a scenario that Japan, Joseon, and Manchuria would be taken over after taking out the power of the Japanese army and Soviet forces. At the same time, the United States was trying to pressure the Soviet Union from behind to pressure Siberia to avoid paying much attention to Europe by taking the Far East instead of giving up Germany's east and Eastern Europe. International diplomacy and politics are supposed to give one away and take one, but when they do, it is basic to give generously what is not damaged to them and take whatever is profitable. Acquisition of practical benefits in such international relations is like a cold and brutal war, and sometimes, for the national interest, the strategy of Dongju Owol (吳越), Gumil Bokgum (口蜜腹劍), and Heo Heosil (虛虛實實) is fundamental. The Yalta summit itself can be said to be the highlight of such a bloody diplomatic battle. At first glance, the Soviet Union may feel absolutely advantageous, but if the Soviet Union gave up Eastern Europe as Roosevelt planned, and the Soviet Union struggled with Japan and placed Manchuria in US influence, its influence in Europe would have been significantly reduced. And Stalin, who calculated that the US would have had its way, demanded South Sakhalin, the territory lost in the Russo-Japanese War in 1905, in exchange for participation in the war with Japan. 

 

Even if Manchuria were to be under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and Siberia, the Soviet Union's successor, was threatened, the reason the Soviet Union requested South Sakhalin was that if the US forces stationed in mainland Japan were to be pressured through Sakhalin, it would not be a nerve-racking issue for the US military to be stationed in Manchuria. If Soviet troops land in mainland Japan at any time and descend on Tokyo to attack the US military, he could also be behind the US, leading to isolation from Northeast Asia. This was Stalin's insurance strategy, fearing that a threat to the Soviet Union over Manchuria would become difficult, that is, war with Japan would become difficult. He clearly demonstrates how to squeeze each other by using such a bloody strategy with national interests over a huge chessboard called Eurasia. This is the importance of a strict international strategy. Of course, Korea must learn international politics and strategy, and the international strategies of great powers on this huge chessboard to implement our national interests and interests. This is because only Korea is a stupid country that moves international strategies and relations according to good and evil. 

 

Returning to the Yalta Conference, the United States, which desperately needed Soviet cooperation because it had not yet developed an atomic bomb until then, accepted the Soviet Union's request. At the same time, the leaders of each country discussed the issue of making the Korean Peninsula independent with different purposes and strategies even in Joseon, which was a Japanese colony at the time. First of all, Roosevelt's point of view was that he had a strong purpose to avoid a new world war. However, such naive thinking against the Soviet Union launched the history of the Cold War era, and in the end, the camps of the two countries and the two ideologies fought fiercely against each other behind the scenes, contrary to Roosevelt's will, and in the end, the two countries and the camps of the two ideologies fought fiercely against each other and tried their best to collapse. In the process of making Korea independent, he proposed a plan called trusteeship to prevent the conflicts of interests of the powers. The agreement reached at this stage did not discuss specific provisions, but rather an abstract story to the extent that the United States, Britain, China, and the Soviet Union all cooperated objectively at the time of Korean independence. Roosevelt regarded China as a partner at the time to reorganize the international order in East Asia, and within it, it was useful as a country in a strategic position to check the Soviet Union. And in the Yalta talks, the issue of Korean independence was not a big part of the issue.

 

Stalin, on the other hand, viewed the Korean issue from the viewpoint of preventing the danger that Japan could go to war to re-establish an empire rather than paying attention to Korea itself. He did not forget historical events in which Germany recovered power very quickly between World War I and World War II and threatened the Soviet Union and the world, and he thought that Japan's potential ability should not be underestimated because it had a history of defeating Russia in the Russo-Japanese War. Therefore, the most important thing the Soviet Union saw while dealing with the Korean issue was that a pro-Soviet regime should be established on the Korean Peninsula to check Japan.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Soviet Union was actually in control of Siberia by Japan during the 1918-1922 Russian Red-White Civil War, it was natural for the Soviet Union to recognize Japan as the right person to check. In addition to restoring the southern Sakhalin islands and islands lost by Japanese aggression, the Soviet Union also demanded the maintenance of outer Mongolian independence, the conversion of some coastal and Sakhalin ports into Soviet trading and military ports, the restoration of rail use rights, and the ceding of the Kuril Islands.

 

The fate of the Soviet prisoners of war who were captured by Germany and Japanese troops was also determined here. All prisoners of war who were liberated from the German army by the United States and British coalition forces, or Soviet prisoners of war who turned to the German army and were captured again, were repatriated to the Soviet Union. It is said that almost all of these prospective prisoners were executed or taken to Gulac, a camp in Siberia, the Soviet Union, and the remaining prisoners were recognized as national heroes and given pensions and Lenin's military medals. A few months after the conference was over, Syngman Rhee, the Korean representative, attended the UN's inaugural general meeting held in April 1945 as an observer to ensure Korea's independence. The international community was very cool-headed, however. It is said that no one would listen to Syngman Rhee, who had little international influence at the time, and Syngman Rhee's side sent a petition requesting that the Secretariat and representatives of each country immediately approve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in accordance with the basic spirit of the Cairo Declaration. However, when this attempt was thwarted, the Korean delegations insisted on the so-called Yalta secret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the United Kingdom, and the Soviet Union that the Korean Peninsula would be placed under Soviet influence after the war at the Yalta summit.He also argued that Korea should not fall victim to another secret agreement following the Katsura-Taft Treaty. However, at the time, the United States denied that there was any secret agreement, nor did the Soviet Union.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naver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브레이크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