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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광주가 낳은 세계적 유명화가 배동신 '라이프 스토리'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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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배동신 자화상. 1953년작 0410_Watercolor on Paper(23.9x33cm) ©브레이크뉴스   ©브레이크뉴스

"화가 배동신",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조형의 본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완성한 예술가였다. 모두가 유화로 작품을 제작하던 시대에 오직 수채화로 자신만의 회화적 조형성을 고집하며 작품 제작에 몰두했던 그는 비웃음과 푸대접을 오히려 자신의 독창성을 인정해 주는 찬사로 생각하며, 절대 비굴하지 않는 태도로 자신의 길만을 걸어간 화가이다. 대한민국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했고 당대 한국최초의 미술 평론의 개척자 "이경성"은 배동신을 “한국수채화의 독보적인 존재, 자신의 길을 걸어간 예술가”라 칭했다.  배동신은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친부 배성재와 조옥진의 사이에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로는 두 명의 형이 있고 밑으로 남자동생 한 명과 여자 동생 두 명이 있었다. 예향 광주가 낳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화가 배동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배동신의 친모는 “천옥희”이다. 천옥희는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으로 17세에 부친이 정한 혼처가 본인이 마음에 새겼던 신랑감이 아닌 것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뜻을 계속 부모님께 알리고 애걸했지만 완고한 아버지의 호통만 듣게 되자 어느 날 몸 종과 함께 무작정 집을 나왔다.

 

천옥희는 양반 댁 규수 수업을 받았고 천자문을 뗀 대다 뛰어난 재치와 언변을 구사했다. 그런가하면, 백옥같은 피부를 가졌고 웃는 모습도 매우 귀여운 보기 드문 미인이었고, 신여성이었다. 집을 나와 몸종과 함께 하룻동안 집에서 멀리 도망가 해질 녘 지친 몸을 쉴 주막에 도착한 곳은 전라도 벌교였다. 주막에 몇 일간 있는 동안 소문은 돌고 몇 번 숙소를 옮기다 보니 생계를 지탱할 목적으로 아예 작은 가게를 얻어 식당을 운영하기로 작정하고 식당을 열었다. 몸종을 부리며 식당을 운영하는 미모의 식당 여주인에 대한 소문은 동네에서 퍼지고, 먼 곳에서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문전성시를 이뤘다.

 

때 마침 동신의 친부 배성재가 큰말을 타고 광산군에서 약재를 구하러 벌교에 왔다. 그는 소문난 천옥희의 식당을 드나들며 천옥희와 연을 맺고, 살림을 차리고 배동신(1920년 6월 16일)을 낳았다. 그리고 2년 후 두번째 아들 "동희"를 낳았다. 안으로는 음식점, 밖으론 한약방을 운영하며, 음식점 옆 마당에 식당에서 쓰여질 된장 고추장 등 발효 밑반찬을 저장할 넓은 장독대와 곡간을 갖춘 한옥집에 부유한 가정을 이루며 천옥희는 두 아들의 어머니로써 배성재를 남편으로 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으로 한의사인 동신의 아버지 성재는 광주와 벌교를 바쁘게 오가며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하여야 할 약방의 일을 일찍이 어린 아들 동신에게 시키거나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약재를 다루고 구분하여 기록하는 일을 가르쳤다. 그림책을 보며 글 읽기를 좋아했던 동신은 그 덕에 초등학교에 가기도 전부터 한문을 익히고 약재의 성분을 공부하는 한의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동신보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 동희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뚱뚱이 개구쟁이에 철없는 사고뭉치로 소문난 아이였지만,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인지 모두가 함부로 하지 않고 귀여워해 줬다. 그러던 어느 날 동신의 친부 배성재가 늘 그랬듯이 몇 일간 집을 비우고 없던 날에 남편 성재의 본가에서 왔다는 손님이 찾아왔다. 성재와 혼인의 연을 맺은지 12년이 되던 해이며, 동신이 벌교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해 여름이었다.

 

천옥희는 그 날 동신의 친부 배성재가 이미 가정을 가진 유부남이었던 사실을 처음 알았다. 큰 충격과 함께 분노가 치몰았다. 천옥희는 12년 동안의 세월 동안 남편에게 속아서 살아왔고, 이러려고 완고한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집을 나와야 했던 가를 생각하며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제할 수 없었다. 천옥희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장독대의 장독들을 하나씩 깨트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성스레 장만하고 가꾸어 왔던 장독들과 화단도 마구 치고 짓밟고 지금까지의 모든 세월을 지워버리듯 파괴하고 흩트리고는, 미친 듯 집안으로 들어가 세간 살이들과 부엌의 물건들을 마구 부수고 던지며 한참을 열중했다. 그리고 옷가지와 소지품을 챙겨 그 길로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 배동신. 여인초상 1954년작 Watercolor on Paper (21.8x13.2cm)  ©브레이크뉴스

 동신은 학교에서 먼저 돌아온 동생 동희가 동네사람들에 둘러싸여 대문 앞에서 울고 서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들어가 집안이 엉망이 된 사실과 어머니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동신은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음날 아침 일찍 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찾으러 갈 생각으로 몇 일전 집을 떠나 이곳저곳의 약재를 구하러 간 아버지가 행여 오늘 밤 오실까, 기다리며 식당에서 밤을 보냈다. 동신은 이른 아침 동생을 데리고 새벽 일찍 떠나는 나주행 버스를 타고 어머니를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골몰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동안 몇 번씩이나 어머니랑 같이 나주로 시집간 이모(천옥희의 여동생)집에 갔었던 걸 생각했던 것이다.다음날 새벽 동신은 더 자고 싶다는 동생을 깨웠다. 어머니 천옥희가 운영했던 식당과 어머니의 장독대가 있는 4식구가 그동안 행복하게 살았던 아버지의 한약방을 뒤로하고 나주행 차를 타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 했다. 버스정류장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동생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거리며 버스 여행을 즐겼고 동신의 머릿속은 몹시 복잡한 상태였다. 어머니랑 함께 갔었던 길이라 동신은 단번에 목적지에 동생과 함께 내렸다. 그리고 이모네 집으로 가는 길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빈 소달구지 뒷자리를 몰래 얻어 타고 가다 들키면 다시 내리고, 또 걷다가 쉬었다 다시 걸었다.

 

동신은 힘들다고 울먹이는 어린 동생을 달래며 손을 꼭 잡은 채 어머니를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동신과 동희는 어머니가 와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모네 집 대문 앞에 서서 어머니를 외쳤다. 대문이 열리고 누군가 그들을 이끌고 마루 앞까지 가는 동안 이모가 아이고 하며 뛰어 내려와 동신과 동희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호통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을 다시 밖으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보기 싫다 너희들은 왜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너희 아버지에게 돌아가거라 빨리 내보내라고 이모에게 호통을 치며 대청마루에 나타나서 뭔가를 동신을 향해 집어 던졌다. 동신과 동희는 큰 충격을 받고 어머니 만을 외치며 흐느껴 울며 어머니 천옥희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어머니의 무서운 욕설이 섞인 호통에 눌려 울면서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모가 아이들을 뒷켠으로 데리고 가 눈물과 얼굴을 닦아주며 달래고 밥을 먹여주었다. 어머니의 화난 호통 소리는 더 크게 들렸고 동신과 동희는 두려움에 떨며 이모 곁에 붙어있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이모가 아침을 챙겨주고 울먹이며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타이르며 사람을 시켜 동신과 동희를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라 시켰다. 동희가 울면서 떼를 쓰다 지칠 무렵 동신은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앞날의 어두움을 처음 경험한 어린 동신은 다시 동희의 손을 잡고 이모가 시키는 대로 배웅해주는 사람의 뒤를 따라 대문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 가던 중 세 사람은 마침 그날이 큰 장날인 듯 분주한 장터에 도착했고 거기서, 큰말을 타고 지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쫓아갔다. 극적으로 3부자가 장날에 상봉한 형태가 된 것이다. 어머니한테 받은 충격 때문인지 동신은 아버지를 붙들고 울먹이며 자신과 동생을 버리지 말아 달라 하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 면서 아버지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전하는 동신과 동희를 아버지는 걱정 말라며 달래고 장터에서 국밥을 먹이고 아버지와 함께 광산군에 있는 본가로 들어갔다.

 

본가에서 동신과 동희는 처음으로 계모 조옥진 어머니와 큰형 동성 둘째 형 동화 그리고 동신의 여동생인 어린 “안순”과 “동순”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첫번째 개편된 이번 동신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 하고 다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얼마 있다가 아버지는 본가에서 좀 떨어져서 운영하고 있는 한약방에 동신과 동희를 기거하게 하고 서석 초등학교로 전학시켰다. 그리고 다시 벌교에서 생활했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동신을 여수로 데리고 가 한약방 일과 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그리고 동생 동희는 천옥희 어머니가 기르기로 결정하여 정리가 되었다.

 

동신과 동희는 그동안 행복했던 시절을 모두 접고 잊지못할 아픈 기억의 상처를 안고 형제가 헤어지는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 배동신 작. 복숭아, 1961년작(26X36cm)    ©브레이크뉴스

 

당시 남성들의 시대적 인습을 그대로 이어 왔었던 아버지의 라이프 스타일인 무분별한 여성에 대한 소유욕과 특별한 어머니의 “절대불협”의 대결은 어린 동신에게 너무나 큰 아픔과 고뇌를 예고한 사건이었다. 어린 동신은 가끔 혼자서 즐기듯 먼 곳을 바라보거나 잡풀과 꽃을 꺾어다 하루 종일 관찰하며 넋을 빼어 놓고 있다가 부모로부터 주의를 듣곤 했었다. 그러나 집안의 큰 변화가 있고 난 후에는 아버지와 같이 한약방 일을 하는 가운데 약초의 각각의 모양이 그려진 도감을 들여 다 볼 때면, 한곳에 머물러 더이상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소리도 듣지 못하는 현상이 심해졌다. 그러는 바람에 아버지의 호통에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 가하면, 동신은 어머니에게서 무참히 버림받았고 다시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생각 때문인지 그런 동경을 동신은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리며 모든 사물을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착각하듯 정겨운 시선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만히 엄마라고 혼자서 불러보곤 했다.

 

배동신은 이미 어머니로부터 그 시대의 인권 차별을 거부한 자아에 대한 욕구와 항거의 감성을 유전으로 이어받았다. 한편으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아버지로부터는 약방 일과 한약에 대한 공부를 하느라 도감을 통해 약재의 모양과 성질에 대한 지식을 익히고, 그것을 구분하여 표시하기 위해 먹을 갈아 붓을 이용해 약초의 형태를 그려보고 한문으로 그 특성을 기록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약초의 모양과 성질을 표현하는 체험을 통해 기호적 회화를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회화란 지식의 근본 일 것이다.”

 

아버지는 동신에게 한약방 일을 가르치기 위해 늘 데리고 다녔다. 다시 광주로 돌아와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상급학교에 다니는 것 보다 아버지에게 한약방 일을 배워 훌륭한 한의사로 가업을 잇기를 바랐고, 그것이 동신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신의 생각은 달랐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그림 그리기가 너무 좋아요 라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거라 그것은 절대로 안된다. 돈이 되지 않는다. 너도 먹고 살아야 하고 가족들도 먹여 살리려면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거라. 그런 일은 거지처럼 살기 위해 하는 말이니, 다시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동신에게는 행복한 어린 시절이 파괴된 경험이 있다. 다시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동신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리고 지금을 벗어나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동신의 마음 속에 깊게 새겨진 하나의 공식과도 같았다. 친모 천옥희가 처음 집을 나와 떠나왔던 것과 같이 동신의 마음속엔 나도 떠나야한다 그래야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라고 끊임없이 다짐했다.사 실상 배동신은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결심한 순간 그는 그가 바라던 어릴 적 세상적인 행복을 스스로 깨트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이었을까? 어머니를 닮은 동신의 생각과 행동은 불행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출발을 기다리는것과 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만이 불행해지는 일이 아닌, 동신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면 그만큼 더 많은 불행이 이어지는 암담한 구덩이 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배동신과 함께 불행한 존재를 만들어내려는 것인 줄을 알고는 있었던 것일까?

 

동신은 이제 아버지의 한약방에서 탈출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동안 불행한 시간을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한 동신의 마음은 고생한 자신이 이제 떳떳하게 하고 싶은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한약방 일을 돕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용돈을 모아 나름 화구를 챙겨 무작정 길을 떠났다. 동신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금강산으로 풍경화를 그려 보기 위해 화구를 챙겼지만 그냥 스케치북과 이젤 색연필 몇 자루를 준비한 것이 고작이었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걸어서 바보처럼 떠난 스케치 여행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극에 달하게 했던 사건으로 이어졌지만 동신에게는 새 희망으로 가득 찬 지금까지 인생 최고의 흥분을 느꼈던 시간이었다. 보름 동안의 스케치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온 동신은 아버지에게 붙들려 오랫동안 훈계와 야단을 맞고, 다시 한약방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동신이 그림을 못 그리게 하는 것을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몹시 고민하며 아들 동신에게 기필코 한의사가 되어서, 고생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귀가 따갑도록 얘기했다. 동신은 아버지의 한약방을 도울 동안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척할 뿐이었지만 결코 그림에 대한 생각을 접기는커녕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다짐하고 일본으로의 유학을 계획했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온갖 핑계로 아버지를 속이고 돌아다니면서 그림 그리는 것을 해 보았지만 그것은 그냥 동신의 갈증을 조금 해소해주는 정도일 뿐 도무지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현재 처한 입장만 한스러울 뿐 떠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꽉 차 있었다. 동신의 아버지는 동신이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과 구분하여 함께 생활하지 않도록 동신과 계모의 입장을 배려하고 따로 한약방에서 생활하면서 한의사가 되어 자신의 대를 잇고 동신이 편하게 살아가길 바랬지만 동신은 모든 것이 싫었다. 오직 아버지의 그늘과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첩의 자식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가 치욕스러웠던 것이다. 동신은 시간이 갈수록 그런 자신의 생각을 바꿔줄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동신은 그 동안 몇 차례 이곳저곳을 돌며 박수근, 장이석, 문학수, 등을 만났다. 그들은 동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본 유학을 권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화가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 인지에 대해 이젠 확실하게 알았다. 여수에서 아버지의 한약방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만났던 “이제학”이 일본 도쿄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다. 그를 만나 내 장래를 상의한다면 답을 얻을 것이야. 그 길로 동신은 여수로 돌아가 아버지의 한약방 일을 열심히 도왔다. 이젠 제법 한약방 일도 이력이 생겨 아버지는 흡족 해 했다. “제학”의 집에 들러 “제학”의 일본 주소를 알아와 제학에게 편지도 보내어 일본에서의 미술 유학을 위한 준비에 대한 내용을 알려 달라고 했다. 돈도 어느 정도 모아 놓고 유학준비를 하면서 이제학이 방학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제학이 방학을 기해 귀국했다. 제학은 동신이 일본에 가서 입학해야 할 학교이며 일본 입국을 어떤 방법으로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일본 입국이다. 제학은 동신을 위해 자신의 학생증을 이용하자고 했다. 동신은 친구의 고마운 배려에 감동했다.

 

제학은 일본에 도쿄 의과대학교에 학생증 분실신고를 하기로 하고, 일단 지금 가지고 있는 학생증의 사진난에 동신의 사진을 붙이는 방법으로 동신의 학생증을 만들어 배를 타자고 했다. 이제 동신의 일본 유학의 꿈이 현실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학의 방학 동안 동신은 제학을 자주 만나 일본에서의 학교생활과 제학의 학교주변에 대한 얘기를 정신없이 들으며, 앞으로 일본에서의 동신의 생활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학이 동신에게 달려와 일본대학에서 새로 발급된 학생증이 도착했다면서 이제 방학도 끝나가고 다음학기 준비도 하여야 하니 떠날 준비를 해 놓으라고 했다. 동신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제학과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갈 날 만을 기다렸다. 일본으로 갈 방법은 제학의 신분증을 이용해 밀항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일본에 밀항을 해서 미술공부를 하고 “훌륭한 화가가 되어 돌아 오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아버지는 절대 반대를 외지며 어떻게 해서든 방해를 할 것이고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어 질것이다. 동신은 생각했다. 비장한마음으로 내 길을 가야한다. 그래야만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아 얻은 나의 상처를 봉하고 조선에 돌아오거나 일본에 남는다 해도 지금의 내 꼬라지를 바꿀 수 있다.

 

도대체 한순간에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추락하여 아버지 밑에서 왜? 나만 한약방 일을 하면서 가족으로 대우해 주지도 않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가? 배다른 형들과 여동생들은 모두 나처럼 일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아버지와 내가 일한 돈으로 가고 싶은 학교에 다니면서 편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벌교에서 살았던 것처럼 어머니가 계셨다면, 일본으로 유학 간다는 것이 이처럼 힘들었을까? 아버지의 거짓말 때문에 모두 이렇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사기결혼 때문인 것이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동신의 상처 속에는 분노와 슬픔 처참한 열등감과 피해의식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이 혼돈 되어있었다.

 

▲ 배동신 작. 크로키.   ©브레이크뉴스

동신의 나이 17세 그는 어머니와의 헤어짐으로 세상의 눈을 이미 갖게 된 것이었다. 한약방에서 약장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욕심에 의해 만나는 여인들이 어찌 이용이 되었는지, 벌교에서의 동신이 생각한 행복한 12년은 동신의 어머니 천옥희에게는 아버지 배성재로부터 속임 당했고 괴멸의 길을 열어 그 길에 서게 한 것이란 것도 알았다. 어머니 천옥희는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 집을 떠나면서 스스로 불행의 시작을 예고했지만, 아버지 배성재는 천옥희의 인생을 완전히 조각 내놨던 것이다. 그러나 천옥희도 17세에 집을 나와 망가졌지만 아직은 젊고 살아야 할 미래가 많이 남아있다. 동신은 그리움에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나와 어머니와의 재회와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버릇처럼 뭔가를 한참동안 응시하곤 했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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