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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동경 가와바타 미술학교 유학생이 되다!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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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본으로 

▲ 배동신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1937년 8월 동신과 “제학”은 부산항에서 만나 도쿄 행 여객선의 탑승을 기다리는 긴 줄에 끼어 서있다. 동신이 재학보다 한참 앞줄에서 먼저 개찰구를 통과할 계획이었다. 동신보다 “제학”이 한참 떨어진 뒤 줄에 서야 동신이 무사히 통과하는 것을 미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면 제학은 다음 배를 타고 가야한다. 그러나 만약에 제학이 먼저 개찰구를 통과 해있다가 동신이 소지한 가짜 신분증이 발각된다면 제학이 꼼짝없이 배에 갇혀있게 된 상태에서 수배나 조사를 받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드디어 줄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신도 앞 사람을 따라 서서히 한 걸음씩 발을 옮겨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동신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진정해보려 뒤를 돌아 제학을 바라 볼 때 바로 옆에서 누군가 "학생인가?" 라고 일본말로 말을 걸어왔다. 깜짝 놀란 동신은 네! 그런데요? 라고 일본어 공부를 해 뒀던 실력이 그대로 튀어 나왔다. 다시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라고 물었다. 동신은 거침없이 “도쿄의대 입니다.” 라고 답하자, “오! 의사선생님이 되실 분이군!”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며 지나갔다.

 

그는 부산항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였다. 동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왠지 온 몸에 자신감이 충만해 옴을 느꼈다. 동신과 제학이 탄 여객선은 무사히 동경항에 도착했다. 동신은 동경 땅을 밟는 순간 동경에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걱정 따위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지난날 불운을 뒤로한 자신의 결정이 이루어진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일본생활의 시작은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한 고생길인 것이다. 처음 동신은 제학의 하숙집에 짐을 풀고 함께 생활하며 꿈에 그리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동신이 입학한 미술 학교는 도쿄에 있는 “가와바타” 미술학교이다. 당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조선의 많은 유학생들이 다녔던 5년제 미술전공학교로서, 1909년 설립자 “가와바타 교꾸쇼우”의 이름을 딴 학교이다. 설립자 역시 일본화 화가였다. “가와바타” 미술학교는 당대 일본과 조선의 저명한 화가들을 많이 배출 했다.

 

“동신”은 조선에서 “박수근” “장이석” “문학수” 등의 선배 화가들로부터 일본유학을 권유 받고 고향 선배인 “이제학”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중섭”, “유영국”, “박고석”, “김환기” 등 많은 조선의 유학생들은 물론 일본의 저명한 화가가 된 많은 일본인 학생들과도 교우하게 된 것이다. 동신의 일본유학시절의 출발은 준비해 온 유학자금으로 비교적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해 왔다. 제학과 같은 하숙집에서 숙박 하면서 제학으로부터도 유학생활에 필수적인 정보를 얻는 다든지 매우 중요한 여러 가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제학은 방학 때가 되면 고향인 여수로 돌아갔고, 동신은 도쿄에 남아 그림 공부에 열중했다. 방학이 끝나서 제학이 돌아오면 둘은 마주앉아 제학은 동신에게 고향의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갔고, 제학은 일본의 대를 졸업했고 고향으로 떠났다. 지금은 다른 많은 친구도 생겼지만, 동신에게 제학은 일본유학 처음부터 물심양면으로 응원해 주웠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배이며 조력자였다. 제학과의 헤어짐으로 동신은 동경에서 홀로 서야 했고, 이제 또 다른 변화와 새로운 역경 그리고 희망,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된다.

 

제학이 떠나간 뒤 동신은 유학 자금도 바닥이 났고, 당구장에서 일하며 돈이 되는 일은 몽땅 해 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고 학교 갔다가 방과 후엔 선착장이며 당구장에서 온갖 일을 해냈다. 너무나 힘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 할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한약방에서 그림공부를 해보려고 수소문해 사다 놓은 석고상을 아버지가 내팽개쳐 산산조각 내놨던 일이 생각났다. “이놈아 너 잘 살라고 약방 일을 하라는 것이야.” “그 놈에 하얀 귀신같은 괴물을 약방에 놓아두고 그려대면 돈이 생기냐 밥이 생기느냐? 이 놈이 쓸데없는 일로 돈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호강에 초를 친 모양이구나.” “정신차려라 이놈아.” 하면서 어렵게 구한 다른 미술도구들도 모두 밖에다가 내팽개치며 호통을 치고 야단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편지쓰기를 포기했다. 그러케 도움을 구했다가 욕만 먹을게 뻔했다. 그래 어떻게든 다니던 학교는 졸업하고 보자 마음을 굳게 먹고 견뎌야만 했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니 항상 배는 고프고 몸은 피곤하기만 했다. 그런가 하면 학교에서 실기 시간엔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의자에 앉은 채로 잠들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실기 수업에 들어왔던 교수가 그렇게 깜박 잠들어 있는 동신의 등에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 그런 교수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위의 학생들에게 교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조용히를 당부하며 동신이 그려놓은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며 서 있었던 일이 있었다. 동신이 깜짝 놀라 일어났을 때 교수는 오히려 동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동신은 악전고투의 생활고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회화성과 조형스타일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으로 교우들에게 호감을 잃지 않는 학생이었다.

 

때때로 교우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받는가 하면 식당에서 여종업원이 주문하지 않은 음식을 서비스하기도 했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고단한 고학생 배동신은 단정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주위의 학우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였기에 그를 아끼고 도움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와따나베 마사에" 그녀는 의대를 다니다가 그림이 좋아 그림공부를 하고싶어 동신이 다니고 있는 가와바타미술학교에 다니게 됐다. 같은 클라스에서 공부를 하며 그동안 동신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사에는 미술대학 교수인 부친의 미학적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그래서인지 동신의 재능을 알아보았던 것일까? 운명의 장난인 것일까? 동신과 같은 클래스에서 수업을 함께 받고 있었다는 것이, 조선의 가난한 유학생을 눈 여겨 봤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자꾸만 동신에게 호감이 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마사에는 동신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이 안 스럽다 느끼며,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동신도 묘한 매력을 지닌 아름다운 마사에의 호의가 그동안 불행한 운명을 이겨내려고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으로 신이 내린 선물처럼 느끼며 불현 듯 깜짝 다가온 달콤한 행복감을 느꼈다. 아! 얼마 만에 느끼는 포근하고 살겨운 행복감인가! 그러나 동신은 마사에의 순수한 감정을 그냥 받아 들기에는 아직 아물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남아있다.

 

어릴 적 먼 길을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찾아갔지만, 무조건 반겨 안아 주리라 믿었던 어머니 천옥희에게 호통을 들으며 매맞고 쫓겨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림받은 기억을 갖고있는 강아지와도 같이 동신의 본능적인 조심성은 마사에의 모성애를 더욱 자극했다. 그러나 마사에의 애정 어린 친절은 서서히 동신의 병든 감정선을 치유했고, 두 사람은 이미 선을 넘어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사에는 그녀의 집안에 동신의 존재를 알렸다. 집안에선 마사에의 행동과 동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사에 부친의 반대는 너무나 완고 했지만, 마사에는 동신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 마사에의 집안은 일본의 정통적인 "야마도다마시이"를 상징할 정도로 일본우월주의의 사고를 지향하며 예절과 품위를 존중하는 당시 일본가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가문에 속한 부류였다.

 

마사에는 동신을 자신의 남편으로서 집안에서 인정받게 하고 동신을 일본 최고의 화가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원해보기로 결정하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림을 좋아하는 마사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동신같은 희망적인 사람이 고작 생활고로 쓰러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가없었다.

 

마사에는 헌신적이었다. 동신은 마사에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으며 그림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몇차례 마사에를 따라 마사에 집안에 인사하러 가기도 했지만, 대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올 때면 슬퍼하는 마사에의 손을 꼭옥 잡고 다짐했다. “나는 꼭 마사에를 행복하게 해 줘야해! 나는 오직 마사에를 위해 그림을 그릴거야! 그리고 꼭 성공하고 말 것이다” 라고 다짐하며 두 연인은 싸늘한 동신의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동신은 자신의 성공의 발판이 될 만한 소식을 들었다. 일본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공모전에 대해 학우들로부터 얘기를 들었고, 공모전에 출품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자유미술창작가협회가 주관하는 이 공모전은 일본미술의 모더니즘을 이끈 아방가르드로써 당시 일본전국에서 가장 명분 있는 공모전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유명한 화가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그런 가하면 이중섭과 문학수는 일본자유미술가협회에서 입상하여 조선인으로써 자존심을 세우고 일본자유미술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자유미술창자가협회”와 “일본자유미술가협회”는 일본의 모든 미술학도들이 입상을 선망하는 일본 최대의 미술대전인 것이다.  배동신은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작 품속 형상은 이리저리 얽혀진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매우 유니크한 형태로 이루어진 청순하고 고귀한 색감으로 그려진 여인의 배부른 나체였다. 그림이 완성된 시점에서, 동신과 마사에는 그동안 그들이 저질러 놓은 작품을 바라보고 서로 순식간에 껴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일본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심사결과가 발표되자, 동신과 마사에 가 있는 하숙집 2층으로 기자들이 취재를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뛰어 올라온 기자의 축하인사를 받으며 소감을 물을 때, 뒤이어 다른 기자들까지 몰려들어 하숙집 입구에서는 기자들로 발붙일 틈이 없었다. 각각 신문사 명함과 함께 인터뷰를 청하며 한결 같이 입상 소감을 물었다.

 

춤추는 배동신.   ©브레이크뉴스

석간신문에서는 "반도에서 온 청년 우에 노에서 꽃피우다."란 제목으로 동신의 공모전 입상을 알렸다. 그 해 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공모전에 조선인 유학생 중 유일하게 동신이 입상하였고, “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에 밀리고 있던 터라 일본 보안당국은 일본 내 이방인은 물론 내국인에 대해서도 삼엄한 감시를 하고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약 스무명 정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동신의 공모전 입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다. 동경 우에노의 뒷골목 으쓱한 장소에서 그날 이중섭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러 배동신의 입상을 축하하였다. 이날은 나라를 잃은 애국 유학생들의 단결을 위한 모임의 자리이기도 했다. 이중섭과 문학수가 중심이었던 그날의 모임 이후 서로에게 부족한 미술용품들을 나누며, 거기 모였던 유학생들 간의 교류가 매우 더 활발하였다 한다. 그렇게 동신은 “가와바타”를 졸업했다.

 

그 해 마사에는 동신의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고 남편 동신과의 혼인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동신이 사위로써 인정받아 한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마사에는 동신에게 태어날 아이의 운명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뜻에 따라 마사에의 부친을 함께 만나줄 것을 매번 요청했다. 그리고 마사에는 공모전에 입상하고 일본 화단에서 당당히 자유미술창작가협회의 정회원이 된 동신을 집안에서 받아 주기를 애원 했지만 번번히 완고한 아버지의 외면으로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사에는 동신과 함께 그녀 집안의 보호를 받으며 동신의 더 큰 성공을 기대했지만 집안의 도움 없이 일본에서의 성공은 조선인으로는 더 이상 힘든 일이라 생각했기에 집안의 인정이 간절히 필요 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매번 무거운 걸음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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