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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동경엔 연합국 폭격기 날아다녀…가족과 함께 귀국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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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동신 화가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세계 제2차 대전 막바지에 도쿄의 밤하늘엔 연합국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포탄이 마구 터졌다. 도쿄는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공포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동신과 마사에 사이에는 큰아들 "용"이 태어났다. 일본자유미술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이제 일본 화단을 종횡무진 누비며 성공을 꿈꿨건만, 언제 어디서 폭탄이 떨어져 폭발할지 모르고 가족을 만들어준 여기 일본땅에서는 의지할 곳이 없기에 일본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만 났다. 동신은 위험한 일본에 마사에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기를 결심을 했다.

 

1944년 동신은 어렵게 구한 배편으로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라도 영산포에서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영산포 여관에 마사에와 용을 두고 아버지의 한약방을 찾아갔다. 동신은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는 아들을 만난 동신의 아버지 성재는 아들에게 물었다. “일본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왔느냐?” 동신은 

대답했다.

 

“예 미술공부를 했습니다.” 라고 하자 “뭐라고? 일본까지 건너가서 고작 환쟁이 짓을 하려고 그림을 배웠단 말이냐? 쓸 것을 배워와야지 도무지 쓸 것이 없는 놈이 구나. 썩 나가거라.” 하였다. 동신의 아버지 성재에게는 동신을 위해 자신의 생업을 물려주려 했던 뜻을 버리고 도망간 아들 동신에 대한 배신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있었던 것이다. 동신은 일본에서는 마사에를 쫓겨나게 하고 조선에 와서는 자신도 아버지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당시 영산포는 전라도 해상로의 중요한 거점으로 장삿꾼들이 부산하게 드나드는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고장이었다. 그래도 활기찬 고향 땅을 밟고 일본에서 마사에 가 넉넉히 준비해 가져온 여비를 쓰며 동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고국 산천의 맑은 풍광을 한껏 느꼈다. 그리고 며칠을 보내던 중 우연히 천옥희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가 나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동신은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리움이 온통 동신의 가슴을 채우며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해졌다.

 

나주는 영산포 바로 인근에 있는 지역이다. 동신에게는 어릴 적 어머니에게 쫓겨났던 나주, 기막힌 슬픈 운명의 길을 걸었던 곳이다. 동신은 그런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 천옥희를 찾아간다는 것이, 참!.. 운명의 관계라는 것이 멀리 맴돌지 않는 것이 구나". 하며 혼잣말을 했다. 동신이 어머니를 만났다. 13살에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16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신과 어머니 천옥희는 서로를 금방 알아봤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참으로 서먹했다. 그리고 동신은 어머니를 불렀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머니도 동신을 끌어안으며 통곡을 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울먹이며 서로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 날 동신은 그렇게 그리워했던 어머니의 체취를 흠뻑 느꼈다. 그러나 마지막 한점 분노의 흔적이 동신의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모자의 재회를 마사에는 어린 아들 용을 꼬옥 안고 지켜보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재회로 동신은 어머니 천옥희의 집에서 처음으로 아내 마사에 에게 안정되고 정상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나주는 광주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지역으로 지금은 광주광역시에 포함되어버렸다. 그 곳 어머니와 마사에 그리고 어린 아들 용과 함께 살았던 지명은 나주 "금산면"이었다. 당시 동신이 그 곳의 투명한 풍경에 반하여 즐겨 그렸던 금정산과 이름 모를 황토산이 있던 곳이다. 동경의 칙칙한 분위기와는 다른 그 곳은 투명하고 상큼한 풍광이 동신의 시야를 시원하고 상큼하게 트이게 해 주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동신의 시선을 유혹했다. 동신은 불현듯 시시각각 변하는 남도의 시원하게 탁 트인 풍광을 머금은 산야를 자신의 감성을 버물려 화폭에 가둬두고 싶었다.

 

▲ 배동신 화가 작. 무등산_19760420 Watercolor on Paper (39.6x27.4cm).   ©브레이크뉴스

 

동신은 그리려는 대상의 본질을 조형감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것을 데포르메이숑(deformation : 강조하거나 생략하여 변형함)하였다. 그렇게 전혀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구성한 대상의 형태(조형)를 화면의 중심에 가득 채워 절대 구도를 조성하였다. 그것은 황금비율의 애매한 불만을 거부 하겠다는, 동신의 미학적 철학인 것이다. 한편으로 이 처렁 동신이 안정성의 완벽을 기하는 구도를 주장한 것은, 동신의 수동적 현실 생활에 순응한 반작용으로 생긴 자신감을 그림 속에서 보인 것이다. 동신의 내면에 존재했던 불안정에 대한 불만을 자신의 작품속에서는 가장 완성된 안정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동신의 어머니 천옥희는 동신의 아버지 성재에게 속아서 혼인했다는 것을 알았던 벌교에서 12년간 생활을 했었던 집을 떠나서, 이곳 나주로 시집 온 동생의 집에서 신세지며 살았다, 그러다가 나주에서 곰탕집을 열어 독립하였다. 그런가 하면, 천옥희는 다시 새로운 배우자와 결혼까지 하여 동신과는 다른 성을 가진 자식을 더 낳았었다. 천옥희의 새 남편은 일본인 무역상사에서 일을 했다. 남편의 월급으로 천옥희는 해방 전까지는 어렵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런가 하면, 동신이 마사에와 함께 그 집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마침 천옥희가 곰탕집을 운영해서 얻은 수입으로 작은 판자집 한 채를 얻은지 얼마 안된 시점에, 동신의 처자식을 만나게 되고 처지를 미리 알아, 그동안 동신에 대한 미안함과 짠한 마음이 움직여 남에게 세를 주느니, 동신의 가족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발악을 하 듯이 닥치는 대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내고 있었던 때였다.

 

동신도 예외없이 징집의 대상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동신의 생모 천옥희는 미리 징집관을 섭외하여 동신이 징집에서 제외될 수 있도록, 아들이 미술교사로 임용될 것이고 일본인 아내와 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지속적으로 청탁함으로써 동신을 징집에서 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신은 암암리에 생모 천옥희의 보살핌에 대한 얘기를 동생 동희를 만났을 때 일일이 얻어 듣고서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 한다. 하지만 동신은 동생 동희를 만날 때면 늘상 기를써 목청을 높이며, 생모 천옥희의 허물을 낱낱이 따지며 불만을 토로했다.

 

동신은 일본유학동문회의 소개로 전남여자고등학교 미술선생 직을 맡게 된다. 이 일은 동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기도 했다. 동신은 해방 직전 전남 광주에 있는 서중고등학교와 욱고녀(전남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는 미술교사가 부족하여 한 교사가 몇개 학교에서 강의를 해야 할 실정이었다 한다. 그런 가운데, 동신은 교사로서는 학생들에게 재미있고 친근한 선생님인 반면에 행정적으론 골치덩어리 교사였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창문을 뛰어넘어 교실로 들어간다든지, 수업 중에 교탁에 앉은 채로 학생들과 대화하며 서양미술사를 강의했다. 혹은 칠판에 교장선생님 부터 수위 아저씨 까지 그 특징을 잡아 얼굴을 그리고 별명을 붙여 적어 놓고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미술 이야기를 전개하여 수업을 하는 바람에 학생들 에게는 너무 재미있는 선생님으로써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늘 상 그렇게 수업하던 어느 날에 중앙에서 장학사가 수업 실태를 점검 차 각 교실을 순회한다는 날이 있었다, 교무실에서 교사들의 수업 태도를 엄중히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도, 항상 하던 버릇대로 교탁에 걸터앉아 두발을 허공에 흔들어 대며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장학사와 교장선생님 등 수업 점검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던 것이다.

 

▲ 배동신 화가 작. 1960년작 나주 금정산 크기 25호 Watercolor on Paper.  ©브레이크뉴스

그러나 동신은 그냥 그렇게 교탁 위에 앉아 두발을 앞뒤로 흔들며 웃기는 수업을 진행하는 바람에 교실 안이 갑자기 휑한 분위기가 되었는데도 너무나 뻔뻔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미술사 강의를 그대로 진행했다. 순간, 교장은 동신이 취하고 있는 황당함에 당황하여 장학사의 팔을 끌며 교실 밖으로 안내하려 했는데, 장학사는 버티며 한참동안 그런 희귀한 수업은 첨 봤는지 신기한 듯 바라보다. 계속 수업을 하라는 시늉을 하며 일행들과 교실을 나갔던 사건도 발생하였다. 그 이후 배동신은 문제의 교사로 지명되어 교장의 감시 대상자로 주목받았지만, 동신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늘상 변함없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개교 기념일이었다. 학부모는 물론 외부의 귀빈들과 교육계 인사들까지 초대되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달 전 부터 학생들과 교사들이 여러 가지 행사들을 계획하여 연습하며, 행사준비를 철저히 했다. 그 날 중요 행사일정 중에 가장 하일라이트는 합창 음악회와 연극이었다. 피아노 반주로 합창단이 몇 곡의 가곡을 부르고 합창이 끝나면 관객석에 가까운, 무대 위 피아노와 피아노 뒤에 위치한 합창단 사이로 막이 내려진다. 피아노에 앉은 연주자는 보이고, 합창단은 관객들에게 보여지지않는 막 뒤에서 퇴장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쇼팽의 피아노 곡이 연주자에 의해 연주되는 모습을 그대로 감상하고 있을 때, 막 뒤에서는 연극의 무대를 설치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아노 연주가 끝나면, 막이 오르고 연극의 첫번째 장면이 나타나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날 음악회 피날레를 장식하는 피아노 연주자는 4학년에 재학중인 김연규 학생이었다. 그 당시 일제시대의 학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년이 합쳐진 6년제로 운영했었다. 김연규는 그 학교, 욱고녀(전남여고)의 단 한 명의 피아노 연주특기자 학생이였다. 그리고 다음 연극을 준비하여야 할 무대 감독은 미술교사인 동신이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날 생겨나지 말아야 할 사건의 발단은 동신의 일본유학시절 화우인 김인규의 등장 때문이었다. 김인규는 배동신이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서 찾아온 것인데, 그날이 하필 동신이 무대 감독을 맡은, 개교기념일 날인 것이다. 하지만 동신은 반가운 나머지 인규를 학교 앞 음식점으로 데리고 나가서 유학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술을 마셔버린 것이다.

 

그 짓을 하느라 모든 걸 잊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음악회의 무대에서 피아노 연주의 마지막 부분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 시각 피아노 연주자 김연규는 제일 먼저 무대쪽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 동안 반복해서 연습해 왔던 연극 무대의 모습이 아닌, 무엇인가 큰일이 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 정리가 덜 된 모습의 헝클어진 무대를 목격한 것이다. 하지만 때는 늦었고, 연극은 시작되었다. 무대의 소품들이 잘 못 놓여져서 배우들이 우왕좌왕 하는가 하면 효과음이 제 멋대로 나오고, 무대의 막이 잘 못 내려지다가 급하게 다시 올라간다 거나 벽걸이가 떨어지는 진풍경이 속출했다. 무대 감독이 사라진 연극판의 무대는 선장이 없는 배가 폭풍을 만난 것과 같았다. 가까스로 연극은 끝나고 막을 내렸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김연규는 그 날의 기억을 그동안 살았던 가장 쇼킹한 일로 기억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그렇게 연습에 열중하셨던 선생님이 오늘은 과연 어떤 이유로 갑자기 모습을 감추고 이처럼 엉망인 연극 무대를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한편, 동신은 그 시각 학교 코앞 음식점에서 연극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춤을 추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정말 유쾌한 술잔치로 시간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신과 인규가 그렇게 신나는 술판을 끝낼 즈음, 갑자기 동신의 머릿속에 무대를 비워두고 내가 왜 여기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날 동신은 여지없이 사표를 써야 할 수 밖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동신과 인규는 또 술을 마셨다. 동신은 생각했다. 나라는 인간은 그림 그리는 것 외엔 쓸모 없는 인간이구나. 도대체 사회생활이 잘 안되는 자신의 모습을 개탄하면서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마사에의 실망하는 표정과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산다는 것에 대해, 미래가 없이 굶어 죽게 될 팔자를 스스로 짊어지는 것이라 했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이제는 나만 굶는 게 아니고 내 가족을 모두 굶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동신은 인규랑 헤어져 급하게 집으로 갔다. 집에서는 마사에가 큰아들 용이와 함께 동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사에는 동신이 없는 동안에 어머니가 반찬을 가져다 줬다며. 동신에게 밥상을 차려줬다. 그리고 곁에 앉아, 밖에서 일어난 일을 들려 달라고 했다. 동신은 학교에 출근해서 일어났던 얘기를 해주면서 선생질을 못 해 먹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탓 했다. 마사에는 동신이 말하는 얘기를 듣고는 동신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났으니 그림을 그려야지요. 당신이 교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그림만 그릴 수 밖에, 다른 것은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하며, 동신을 위로했다. 동신은 마사에의 말에 기운을 얻은 듯 마사에를 안으며 “마짱!! 당신만이 내 속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오!”라고 하면서 어린아이 처렁 좋아했다.

 

그러는 동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마사에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지는 듯했지만, 마사에는 늘 동신과 가족의 생계와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사에는 남편 동신이 이젠 학교에 나가지 않고 나주의 산과 벌판을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비라 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림을 그리려고 머릿속에서 시동을 걸고 있구나 라고 생각 했다, 마사에는 “어쨌든 우리는 지금 행복한 거다.” 라는 생각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동신은 자신을 이해하고 신뢰를 보내주는 아내 마사에를 위해 멋진 그림을 그려 보여 주리라고 다짐하면서 화폭에 담을 대상과 자신의 감정선을 수없이 맞춰보면서 그곳의 자연을, 풍광을, 아내의 얼굴을, 지나가고 있거나 모여 있는 사람들을, 짖고 있는 개를, 소, 망아지를, 머리 속의 화상을,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스케치하거나 크로키 해서 마사에 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어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또 물어 봤다.

 

▲ 배동신 화가 작. 광견 1960년작 25호 Watercolor on Pape.  ©브레이크뉴스

그런 동신의 질문에 마사에는 일일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으로 껴안으며 정겨운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신은 자신이 그릴 그림은 수채화 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일본 유학시절에 익혔던 유화와 수채화 중에 여기 내 고향의 기후와 자연의 형태들이 투명하고 깨끗한 그리고 상큼함에 잘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표현하자면, 수채화가 제격이라 생각한 것이다. 고향의 허공 처렁, 수채화 물감의 색채가 엷게 비춰질 만큼의 수분을 듬뿍 머금은 붓을 사용하여 팔레트에서 질질 흐른 상태로, 종이 위에 쳐 부어 질러가 듯 바르거나, 맑은 그리고 선명한 채도의 수채화 물감의 원색을 뭉개서 대비를 살리고 형태감을 강조하고, 발란스를 잡는 작업을 수채화로 그리고 싶다. 하는 생각에 동신은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배동신 화가.  ©브레이크뉴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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