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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항쟁과 아름다운 청년들의 이야기

이종철 철학박사 l 기사입력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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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에서는 나와 내 친구 이야기를 좀 하겠다.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공적인 이야기가 겹쳐 있어서 이런 공적 지면에 적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올 해가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전두환 군부 세력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고통을 겪었던 사건이다. 지금도 그 당시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시름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학살의 주범이었던 전두환과 그 주변 핵심 세력들은 여전히 호위호식하고 있다. 만일 정의의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런 부정의한 현실에 대해 채찍질을 해서라도 바로 잡으려 했을 것이다. 그만큼 부당하고 부정의한 역사를 청산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광주의 학살은 12.12 군부 반란 사건을 통해 권력과 정보를 장악한 세력들이 짜 놓은 주도 면밀한 시나리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그 이후의 상황 전개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비를 하지 못했다. 최근에 밝혀진 김재규 사건 재판 기록을 보면 그는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와 같은 사건이 서울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사를 한 심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김재규와 그리고 거사에 참가한 그의 부하들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체포되고 만다. 그 이후 계엄이 떨어진 상태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계엄사령관을 겸직한 전두환은 12.12 반란 사건을 계기로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재야의 민주화 세력은 시계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서울의 봄'을 낙관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 해 봄이 다갈 때까지 대학가는 연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의 수위를 높여 가다가 마침내 5월에 들어서는 시내 가두 투쟁까지 확장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시위의 물결은 대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혼란을 이유로 군부가 등장하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마침내 5월 16일 '서울역 회군' 후 대학생 시위대의 핵심들은 5.17일 이화여대에서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세력들은 이날 모임을 급습해서 주동자들을 체포하고, 18일 자정을 기점으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복기하다 보면 전두환 군부 세력들은 호랑이 입으로 먹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거에 진압하는 작전을 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 성공적인 작전과 함께 그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극대화하기 위해 김대중과 연결된 광주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광주에 진출한 공수 부대는 초기부터 군사 작전을 불사하는 형태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 이후 전개된 광주 민주화 항쟁 사건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국민들이 진실을 알고 있는 바이다. 

 

▲ 필자 이종철 박사(왼쪽)와 지승룡 대표(로른쪽).     ©브레이크뉴스

나와 친구에 관한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고서 40년 전의 역사를 소환하는 까닭이 무얼까? 사실은 이 당시의 역사의 전개와 우리들의 행동이 얽혀 있기 때문에 다시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이 일은 5.18 민주화 운동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들의 이야기인데 공개된 지면에서 처음으로 밝힌다. 5.18 계엄이 떨어지고, 광주의 학살이 벌어지면서 전국은 수많은 민주화 시위의 열기를 잃어버린 채 분위기가 살벌하게 경직되었다.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도 완벽하게 언론을 통제한 군부 세력들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전달되었을 뿐이다. 간간이 음성적으로 흘러나오던 소식을 접한 많은 사람들은 울분을 안으로만 새겼을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그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아세아 신학 대학원에 다니던 청년 지승룡도 그와 같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많은 시위대의 물결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린 것을 안타까워 했고, 간간히 들었던 광주의 학살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분노 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이런 묵시의 시대에 고통을 당하는 이 민족에게 길을 보여달라고 간구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대로 역사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은밀하게 홀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거사를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지인인 최규삼 인쇄소 사장을 통해 전단지도 만들고, 그 전단지를 교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계에 알려줄 동조자들을 구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금호중앙교회의 전도사였던 홍만조 목사가 그 일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도움을 주었던 증언자가 되기로 한다. 지승룡은 거사일을 6월 27일(금)로 확정을 하고, 6월 22일(일) 오전에 친구 이종철을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서클을 같이 하면서 서로 간에 관심과 이념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 왔던 절친 사이였다. 그날 승룡은 자신이 거사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뒤를 부탁한다는 말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종철은 백번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고 장남이자 외아들인 그의 위상도 상기시켰다. 하지만 이미 결심이 굳은 승룡에게 그런 말이 들어 올리는 만무였다. 그들은 그렇게 그날 헤어졌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종철에게 생긴 것이다. 

 

종철은 당시 연세대 정법대 법학과 3학년 생이었다. 종철은 운동권에 몸을 담지는 않았지만 유신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법 고시 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10.26 사태와 더불어 유신이 종말을 고하는 것을 보고 종철은 고시 공부를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결심을 다지기 위해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서 기독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도 했고, 아울러 법대 기숙사인 법현 학사에도 입소를 해서 고시 공부에 매진하려 했다. 하지만 5.17 계엄 확대와 더불어 서울의 봄이 끝나면서 기숙사를 나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종철은 승룡의 신앙고백같은 거사 선언을 듣고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역사의 짐을 지겠다고 한 친구 승룡을 홀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그의 거사에 동참을 하면서 그 짐을 나누어 질 것인가로 번민을 했다. 그는 이념적인 문제 이상으로 실존적인 고민을 더 많이 했다. 사실 계엄 치하의 살벌한 당시에 혼자 삐라를 뿌리면서 외친다는 일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무모한 일일 수 있다. 그런 거사에 동참을 한다는 것은 법대생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고, 뒤늦게 시작한 사법고시와도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냐 현실이냐를 넘어서 우정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실존적 결단의 문제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번민한 종철은 거의 잠도 못자는 상태로 열심히 새벽 기도에 출석을 하면서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사흘 밤낮을 갈구하던 그는 모종의 환상을 보면서 마침내 결심을 한다. 친구의 짐을 같이 나누어 지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26일 밤에 종철은 그때 사귀던 여성을 만나서 그동안 써왔던 일기장을 맡긴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그 여성은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음 날(27일) 오전 종철은 비장한 마음으로 금호동에 사는 승룡의 집을 방문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이번에는 승룡이 종철을 말린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종철이 거사 이후 받게 될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그 당시 곁에서 조언을 해주던 홍만조 전도사도 종철을 말린다. 하지만 종철은 함께 역사의 짐을 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사실 제 3자가 볼 때 둘의 거사는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참혹하게 진압 당한지 40일 뿐이 되지 않은 당시에 시위로 붙잡혀 갔을 때 예상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일단 구속이 될 경우 최소 2-3년은 감옥에서 지낼 수도 있는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뜻을 굳힌 둘은 승룡이 작성한 전단지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결심을 다진다. 지금은 그 자료의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지만 그 안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의 진실을 적고, 계엄 철폐와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구호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게 뜻을 모은 둘은 그 날 오후 2시경 승룡이 이미 물색해 두었던 거사 장소인 지금의 명동역으로 향했다. 그 당시 그곳은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 옆에 태극당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 명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명동은 늘 붐비는 곳이다. 승룡과 종철은 그곳 정류장에서 내리자 마자 지하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계엄 철폐하라', '광주 사태의 진실을 밝혀라',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념 서클이나 운동권의 경험이 없던 승룡과 종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구호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수반하는 일이다. 우리들의 행동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놀래서 비명을 지르던 소리가 들린다. 조금 후 신고를 받은 명동 파출소의 경찰들이 달려 왔을 때 지하도로 나머지 삐라를 뿌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 명동 파출소로 잡혀 갔다가 잠시 후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중부경찰소로 이첩된다. 이날 거사는 아마도 광주 항쟁 이후 서울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 사건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살벌한 당시였고, 민주화 운동을 끌어가던 세력들이 하루 아침에 다 구속을 당한 상태에서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세력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한 청년은 오로지 역사와 민족을 위해 분노했고, 다른 청년은 그런 친구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6월 하순 가장 더위가 시작될 즈음에 중부서의 유치장은 지옥이 따로 없을 만큼 힘든 곳이었다. 그곳에는 5.17 전의 시위 사건과 관련된 동국대의 학생회 간부들, 민중불교운동을 하던 여익구 선생,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김종대 선생, 김대중 선생의 연설 테이프를 만들다 구속된 고춘남 선생, 지금도 철도 노조에서 활동을 하는 서울대 체육과 학생이었던 지영근 그리고 김대중 선생의 외곽 청년 조직인 민청과 연관돼서 이미 보안사에서 고생을 하다 넘어온 전국회의장 문희상 선생 등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있었다. 아울러 계엄 치하에서 잡혀온 수 많은 잡범들로 좁은 유치장이 가득 차 있었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여름 날 칼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경찰서 유치장에 가장 어울린다. 이곳에서 승룡과 종철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아이러니칼하다고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승룡과 종철은 처음 몇 년 간의 구속을 예상한 것과 달리 20여일 만에 풀려 났다. 외아들인 승룡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친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당시 보안사 과장의 승인 하에 석방된 것이다. 승룡의 말에 의하면 중령이었던 보안사 과장이 우리들 사건이 더 위로 보고되는 것을 막고, 관련 서류를 페기처분해서 사건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 보안사 중령은 하늘을 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세상이었다. 그런 군부의 계엄에 저항한 거사가 아이러니칼하게 보안사 과장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석방된 덕분에 그에 관한 공식적 기록들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종철은 법대에서사법고시를 보려던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역사와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꾼다. 지승룡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다음 오랫 동안 청소년 목회 활동을 한다. 종철은 대학원에서 독일 근대 철학과 사회철학을 공부하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본격적으로 사회 변혁을 위한 철학적 이념의 정립을 위한 운동을 한다. 그는 1989년 3월에 진보적인 철학단체인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 J. 이폴리트의  『헤겔의 정신현상학』 1권(김상환 교수 공역)과 2권 등 수많은 책들을 번역 소개하는 작업도 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로 학교를 오랫동안 떠나서 2000년도를 전후로 해서는 벤처 기업 활동에 몸 담기도 했다. 그 후 다시 대학으로 복귀한 종철은 오랫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2016년에는 몽골의 한인이 설립한 후레 정보 통신 대학에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 한국학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현재는 저술과 평론 등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회 문제와 관련해 이곳 <브레이크 뉴스>의 컬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 이종철 박사(왼쪽), 지승룡 대표(오른쪽)     ©브레이크뉴스

 

지승룡은 한국사회에서 토종 외식 사업의 대명사로 알려진 <민들레 영토>의 창업주다. 청소년 목회 활동을 오랫동안 하던 그가 1994년 쯤 어느 날 도형 테라피와 독특한 다방론을 들고서 시작한 민토의 성공은 수많은 화제를 몰고 다녔다. 한 때 지점을 30개나 만들 만큼 외식 산업계에서 민토의 성공은 끝을 모를 때였다. 승룡은 늘 사람들과 만나서 일을 꾸미기를 좋아했다. 사랑방 같은 민토에는 늘 젊은이들이 몰려 와서 차 한 잔 시켜 놓고 공부도 하고 토론도 즐겼고, 그들이 느낀 좋은 점을 열심히 흥보할 수 있을 만큼 자랑스러운 장소였다. 승룡은 이 당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수많은 장소를 다니면서 성공 스토리를 강연하던 인기 강사이기도 했다. 당대에 이런 신화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운동권 이념을 외식 산업과 결합시킨 대중 운동가였다. 하지만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가 명박 정권의 미운털이 박혀 몇 차례의 세무사찰을 받으면서 무너지던 사건은 며칠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랄 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승룡과 종철은 1990년대 말에 서로 간에 지향하는 생각의 차이와 오해를 겪었고, 또 서로의 삶을 바쁘게 이어가면서 20년을 약간 넘게 헤어졌었다. 자그마한 차이가 오랫동안 서로를 잊게 한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종철이 <브레이크뉴스>에 기고하는 칼럼 때문에 이 인터넷 신문의 문일석 대표와 술을 마시던 중간에 승룡의 이야기가 나왔고,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문대표의 전화로 20여년 만에 극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올 해가 승룡과 종철이 명동 입구에서 광주 학살의 진실을 밝히라고 외친지 딱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야말로 하늘도 잊지 말라고 다시 연결을 해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다시 연결된 승룡과 종철은 지난 6월 23일 그 때 그 장소에서 정확히 22년만에 회동을 했다. 당시 거사를 했던 명동역 입구는 지하도 외에는 그 당시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다. 하지만 40년 전 이 나라에 가해진 역사적인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희망의 불씨를 일깨우려는 비장한 생각으로 거사했던 순간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미 60대 중반에 들어섰지만 그 순수한 정의와 우정에 대한 기억으로 우리는 다시 20대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승룡과 종철은 40년 전과 20년 전 사이에 전의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기억과 그 공백에 대해 여러 시간을 이야기했다. 2020년 6월 23일, 코로나 바이러스와 때 마침 내리던 비로 인적이 드문 적막한 분위기의 명동이었지만 그날을 생각하며 다시 일기 시작한 승룡과 종철의 대화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면서 쉽게 끝날 줄을 몰랐다. 

 

▲ 5.18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군.     ©브레이크뉴스

▲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     ©브레이크뉴스

 

▲5.18, 진압군에 의해 무차별 가격 당하는 광주시민.     ©브레이크뉴스

 

지금은 역사적 기록으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역사적 행동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혹한 계엄 치하에서 아무도 저항하고 분노하지 못했던 당시에 승룡과 종철은 서울 지역에서 거의 최초라 할만한 거사를 목숨을 걸고 거사했다. 우리들은 행동을 자랑한다는 의미를 떠나서 운동사적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고, 당연히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한 사건이라는 판단이다. 광주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생각하면서 일으킨 거사였고, 아직도 광주 학살의 주역들이 활개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기 위해서도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만한 거사이다. 현재 문헌적 기록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당시 많은 전단지를 교회와 기독교 운동 단체로 보낸 것들을 찾아볼 수도 있고, 우리의 운동 행적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최규삼 인쇄소 사장님과 홍만조 목사님, 그리고 그 소식을 나중에 접한 친구들, 무엇보다 6월 27일 이후에 중부서 유치장에서 보름 이상을 함께 지냈던 많은 민주 인사들의 증언을 구한다면 좀 더 객관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당시의 사건에 이런 의미 부여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20 여년 만에 우연히 다시 연결된 우리들은 40년 전의 그 장소를 방문하면서 이 거사의 역사적이고 필연적인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 했다.

 

그래서, 오늘 2020년 6월 27일 <브레이크 뉴스>에 처음으로 ‘아름답고 용기 있는 청년들’의 사적이고 공적인 이야기를 기고하는 것이다. jogel4u@outlook.com

 

*필자/이종철(연세대 인문학 연구원철학박사) 

 

연세대 정법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연세대 철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연세대 등에서 강의를 했고몽골의 후레 정보통신 대학의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다.(사)푸른아시아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상임 연구원.

 

(덧붙이는 글)***지승룡씨가 페이스 북에 올린 글

 

-아래 글은 지승룡 씨가 본지에 기고한 이종철 박사의 글을 읽고, 자신의 페이스븍에 올린 글이다. 보기 드믄 우정어린  글이라 옮긴다.(편집자 주)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아침 대문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여니 이종철이 서있다. 그의 손에는 참외 6개가 들려 있었다. 난  "어떻게 왔어?" 라고 인사를 했다. 어떤 느낌이 들어서 반갑지만 살짝 당황이 되었다. 종철이는   "너 오늘 먼길 가는데 한 번 더 보려구!" 

 

이 반가운 인사는 40년 전인 1980년6월27일 이었다. 6월27일은 우리 두 사람 인생에  중요하고 특별한 날이었지만 우리는 그날 이후 이 날을 기념하는 시간을 한번도 가진 적은 없었다. 기억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인생을 살아내야 하기에 그랬다. 

 

대학1학년 때부터 단짝이었고 이런 거사를 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중간에 약간의 다툼도 있었고 최근 20년은 연락도 나누지 못하다가  40년이 지난 요즘 그 날을 같이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40년이란  세월이 주는 진정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1980년 5.17 이후, 대학생 이종철(오른쪽)-지승룡(왼쪽)씨가 서울의 금호중앙교회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찍은 사진.    ©브레이크뉴스

 

1980년 6월27일 내 작은 방으로 들어온 친구는 내가 쓴 유인물을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종철이는 날 혼자 시위 현장에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같이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완강히 거부하는 나에게 만약 자신이 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내가 거부하면 나의 계획을 부모님에게 알려 원천적으로 못하게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었다.

 

내가 반대한 이유는 그 때 나의 행동은 수년간 옥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고 또 고문이 예상되는 일이라 몸이 불편한 종철이가 감당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난 종철이는 나의 행동이 시작되면 주변에 알려서  전두환 군사정부에 대해 저항하는 청년 저항하는 시민이 있었음을 알리고 무력으로 민주주의를 정복할 수 없는 것을 전하고 싶었고 그 일을 친구가 했으면 하였다.

 

친구의 의지와 결심이 깊기에 나는 더 거부를 하지 않았다. 목욕하고 이발을 하고 나서 난 종철이와 명동에 나가 빨간색 운동화를 천원에 샀다. 이유는 빨간 운동화가 예뻐서였다. 나중에 수사관이 ' 너 공산주의자지! ' 하면서 운동화 색이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ㅎㅎ  오늘 아침 외출하는데 빨간 신발이 있어 그날을 떠 올리며 신고 나갔다.

 

당시 연대법대생으로 사시를 준비하던 이종철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친구를 위해 당시로는 위험한 먼 길을 동행해준 것...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우정이고 동행이었던 것 같다.

 

1980년 5.18은 일요일이었고 신학도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간절한 기도 밖에 없었다. 기도 가운데 두려움이 밀려나고 저항이란 동사가 마음에 들어왔고 광주의 소식이 작지만 조심조심 들렸다. 기도 가운데 결심한 것이라 두려움보다는 사명이 우선이었다. 친구가 있어서 '역사소풍길' 이 결국 되었다.

 

이종철과 40년 만에 그 현장에 처음 같이 가서 그때 일을 하나씩 기억을 더듬어 살펴보았다. 친구가 잘 정리된 글을 브레이크뉴스에 기고했다. (이종철이가 잘 정리한 글이라 댓글에 기사를 링크하니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그냥 우리들 안에 있는 청년정신을 25살 두 친구의 행동을 통해서 다시 기억될 무엇이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복당하지 않는 민족이란 말처럼 공포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순수성 진정성의 힘을 나누고 당시 광주아닌 곳에서 저항한 첫 사건을 기록에 남기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날 들었다. 

 

이종철이 갖고 있던 대학졸업반 옛 사진을 오랜만에 보니 좋다. 친구와 나의 80년 명동사건의 정신적 멘토였던 홍만조 목사님 사진도 반가워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다.

 

-ps. 신기하게  그 때 6시 시위를 시작했는데 페이스 북에 올리는 시간도 6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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