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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선원, “유물 350점,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대부터 해방까지의 가슴 저린 역사유물들 전시”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l 기사입력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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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바람을 타고 근대문명이 물밀 듯 들이닥치는 시기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봉건체제는 더 이상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는 낡은 체제였다.

 

▲ 석암 스님은 “소종(작은 종)은 ‘광서을미(1895년),계월길일, 규문각(제작), 호전각진’이라는 내용으로 양각이 되어 있다.”며, “이 작은 종은 1895년 4월 24일 전봉준(녹두장군)이 교수형을 당했던 해에 1895년 계월(桂月, 8월)길일, 그리고 규문각이라는 곳에서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제국주의는 서학인 천주교와 서양의 사상 등을 앞세워 조선을 휩쓸었다. 서학에 반대하여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동학혁명의 정치 사상적 종교적 씨앗으로 잉태하여 조선 봉건 관료층의 수탈로 신음하는 민중의 해방과 반봉건 반외세를 척결하는 시대정신으로 작용했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관군으로는 동학혁명군을 막아낼 수 없어서 외세인 일본과 청나라를 끌어들여 그 결과 조선 한반도가 청일전쟁의 전쟁터가 되게 하는 우를 범했다. 비록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무참히 짓밟혀 20여 만명의 동학혁명군이 학살되어 좌절했지만 전봉준 장군이 부르짖었던 반봉건, 척왜척양의 동학혁명정신은 반식민지, 반봉건의 민족민주 운동의 원천이 되어 3.1혁명, 의병운동, 민주화 운동 등의 정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러시아 남진정책을 막아 내고자했던 조기진(趙基晉)의 행로집(幸老集), 천주교를 탄압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도구로 사용했던 형구틀,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 장군을 기리며 언젠가 조선이 곧 해방될 때를 염원하여 주조된 소종과 대종 등은 역사의 파편으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브레이크뉴스는 지난 20일 19세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부터 1945년 해방까지의 다양한 유물 350여점을 보유하고 있어 학계와 문화계에 주목을 받고 있는 고불선원(충주시 신니면)을 찾았다.

 

고불선원의 유일본인 4책 ‘행로수수방관’은 도서관본 3책 중 ‘書’ 72편에다 추가된 같은 종류의 서 320여 편을 합한 390여 편을 엮었다. 친지친족간, 그리고 친분있는 당시 관료들 간에 오간 사안 등의 서간문으로 시대상을 알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고불선원(선원장 석암스님)이 보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유물에는 조기진(趙基晉)의 행로집(幸老集), 전봉준 녹두장군이 교수형(1895년 4월 24일)을 당한 해에  규문각에서 주조된 소종(작은 종), 보천교((증산교에서 유래한 종교)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큰 종,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을 처형할 때 쓴 고문 도구인 형구 틀 등은 조선 후기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시문집인 행로집(行老集)을 저술한 조기진(趙基晉 1778년~ 미상)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며, 흥선대원군(1820~1898년)보다 42살이 많은 대원군 사돈으로 멘토 역할을 한 인물이다.

 

행로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3권 3책(天, 地, 人)의 필사본이 보관되어있는데 충주 고불선원에서 또 다른 한권인 ‘행로수수방관(幸老手隨方觀)’을 포함한 4권 4책의 원본이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고불선원의 원본은 천, 지, 인, 수수방관 등 총 4권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수수방관에는 그 당시 고급관리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하는 글과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서간(편지글)등 아주 소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고불선원의 유일본인 4책 ‘행로수수방관’은 도서관본 3책 중 ‘書’ 72편에다 추가된 같은 종류의 서 320여 편을 합한 390여 편을 엮었다. 친지친족간, 그리고 친분있는 당시 관료들 간에 오간 사안 등의 서간문으로 시대상을 알게 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 『행로집』4권 4책은 국내외 유일한 초고 원본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대원군의 사위이며 조기진의 아들인 조경호는 1910년에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한 인물로서 결국 죽음을 당한다. 그의 동생인 조병호 역시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살해당한다. 조기진의『행로수수방관(幸老手隨方觀)』은 그 시대의 숨겨진 역사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고불선원의 원본은 천, 지, 인, 수수방관 등 총 4권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수수방관에는 그 당시 고급관리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하는 글과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서간(편지글)등 아주 소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1866년부터 1871년까지 4차에 걸친 천주교 박해로 명명된 병인박해는 8,000여명이 순교당하는 조선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로 기록되고 있다.

 

1820년(순조 20)~1866년(고종 3)김면호는 천주교 신자(세례명 토마스)로서 경기도 양평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5남1녀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와 두형 김익례와 김응례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정조 사망 직후 노론 벽파가 정조 때 성장한 이가환·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으킨 신유박해(辛酉迫害:1801)와 노론 벽파 풍양 조씨가 천주교에 관대한 노론 시파 안동 김씨를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로 조선 천주교는 거의 초토화됐다.

 

김면호는 1866년 병인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이를 막고자 고심하던 중, 때마침 러시아가 남진야욕을 드러내어 우리나라 북부국경을 자주 침범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종 1년(1864) 2월 28일 함경감사 이유원(李裕元)은 경흥부(慶興府)망덕(望德) 봉수장(烽燧將)한창국의 “두만강 건너편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異樣人]인 러시아인들이 통상을 요구하는 치보(馳報:급보)를 조정에 알렸다.

 

경흥부사(慶興府使) 윤협이 “이런 문제는 지방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러시아인들은 돌아갔지만 조선은 이미 서세동점(西勢東漸: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옴)의 가시권에 들어갔다.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중에서)

 

김면호(冕浩)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박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등과 상의, 주교 베르뇌(Berneux, S. F.)를 통해 프랑스나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려는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왜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를 단행했을까? 대원군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이 국가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고 정권을 계속 유지연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아책(防俄策)으로 연결되는 인물이『행로집』을 저술한 조기진이라는 대원군 사돈이다.

 

천주교 지도자 홍봉주(洪鳳周)는 그 방아책을 조기진에게 부탁하여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김대건이 기해박해 때 부친을 잃은 것처럼 홍봉주도 신유박해 때 조부를 잃고 기해박해 때 부친과 모친 정소사(丁召史:정약용의 조카)를 잃은 순교자 집안이었다. 홍봉주는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해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방아책(防俄策:러시아를 막는 방책)’을 작성해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 대원군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 편지를 읽고 또 읽은 후 아무 말 없이 깔고 앉았다(샤를 달레, 한국천주교회사)”는 기록처럼 답변을 보류했다. 그때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내 남편에게 편지를 한 번 더 올리라”고 권유해 전 승지 남종삼(南鍾三)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가지고 다시 대원군을 만났다. 5~6명의 대신과 함께 남종삼을 만난 대원군은 “프랑스 주교가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남종삼이 “가능하다”고 답하자 주교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를 바라는 천주교도들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고종 3년(1866:병인년)천주교에 대한 대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대원군은 처음의 약속과 달리 모든 약속들을 파기하고 선교사와 신자들을 체포하고 박해를 가했다. 홍봉주는 1866년 2월23일 베르뇌주교와 함께 잡혀 3월7일 새남터에서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 후 선교사와 신자들은 1866년 7월경부터 체포, 압송되어 새남터 등에 끌려가 교수형 등을 당하게 되며 김면호 등 신자들은 그 해 7월 18일 붙잡혀 9월 10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을 끌어들일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사형 당했다. 대왕대비 조씨는 천주교도들을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숨겨준 자들까지 ‘코를 베어 죽여야 한다’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 당시 행로집(行老集)을 저술한 조기진의 방아책이 대원군에게 수용되었다면 병인박해의 천주교 교인들 8,000여명의 처형의 역사는 안 일어났을까? 아쉬운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고불선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행로집』4권 4책은 국내외 유일한 초고 원본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형구 틀(형구돌)이 합정동의 절두산성지와 연풍성지, 베티성지, 해미성지 등에 순교자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역사의 상징물로 설치되어 있다. (사진, 절두산 성지)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1866년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믿는 수많은 신자들을 일종의 고문도구인 형구 틀(형구돌)을 사용하여 처형했다. 지금은 형구 틀(형구돌)이 합정동의 절두산성지와 연풍성지, 베티성지, 해미성지 등에 순교자들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역사의 상징물로 설치되어 있다. 당시 1866년부터 1873년까지 7년 동안 형구 틀에 의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순교성지도 아닌 고불선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형구 틀 5점은 특이하다. 석암스님은 “‘고불선원 창건 당시 포크레인 기사가 자기도 모르는 석물이 있는데 조선시대 그림하고 바꿨으면 한다‘고 하여 그렇게 소장하게 된 것이다.”고 밝혔다. 또한 형구 틀은 동학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의 처형을 연상하게 한다.

 

석암 스님은 “소종(작은 종)은 ‘광서을미(1895년),계월길일, 규문각(제작), 호전각진’이라는 내용으로 양각이 되어 있다.”며, “이 작은 종은 1895년 4월 24일 전봉준(녹두장군)이 교수형을 당했던 해에 1895년 계월(桂月, 8월)길일, 그리고 규문각이라는 곳에서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석암 스님은 “소종 윗 상단에 3구멍이 나 있다. 3구멍의 뜻은 동학의 삼경사상인 경천ㆍ경인ㆍ경물의 내용임을 금새 알아 볼 수 있다. 동학사상의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을 뜻한다.”며, “하늘의 마음이 곧 민중의 마음을 뜻하는 전개로 3구멍의 뜻을 상징하는 동학의 상징인 작은 종이 1895년 8월에 만들어진 것이다.”고 배경 설명을 했다. 

 

그는 “소종은 동학교 조직의 필요성을 높이기 위해 작은 종을 가지고 다니며 사용되어 왔다.”며, “그 시대에서는 항상 일본군에 쫒기는 처지라 작은 종(소종)이 교세를 늘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때 33인이 모인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석암 스님은 “소종(작은 종)은 ‘광서을미(1895년),계월길일, 규문각(제작), 호전각진’이라는 내용으로 양각이 되어 있다.”며, “이 작은 종은 1895년 4월 24일 전봉준(녹두장군)이 교수형을 당했던 해에 1895년 계월(桂月, 8월)길일, 그리고 규문각이라는 곳에서 제작됐다.”고 설명했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역사를 살펴보면 1895년 4월 24일에 전봉준이 일본군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며, 소종이 만들어지고 같은 해 8월 20일에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를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1894년 12월에 동학혁명이 진압이 된 후 그 다음해인 1895년 8월 길일, 교문각에서 소종이 주조된 것으로 설명했다.

 

석암 스님은 “큰 종은 보천교(증산교에서 유래한 종교)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은 4구멍으로 제작되어 있다.”며, “4구멍의 상징은 1924년 보천교에 지어진 십일전을 중심으로 정문인 보화문이 중심이 되어 동쪽에 광화문(경복궁), 서쪽에 돈화문(창덕궁), 남쪽에 홍화문(창경궁), 북쪽에 흥화문(경희궁)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조선궁의 상징인 4대문을 해방 때까지 상징물인 큰 종에 염원을 담아 4구멍으로 종을 만든 기록을 보고 알 수 있다.”며, “큰 종 4구멍의 뜻은 동, 서, 남, 북으로 교세확장이 퍼져 나가는 의미로도 제작된 것이다.”고 밝혔다. 

 

석암스님은 “작은 소종의 구멍 3개와 큰종 4개의 역사는 언젠가 조선이 곧 해방될 때를 염원하는 공통점이 있다”며, “큰 종은 보천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큰 종과 보천교를 연결시켰다.

 

석암스님은 “작은 소종의 구멍 3개와 큰종 4개의 역사는 언젠가 조선이 곧 해방될 때를 염원하는 공통점이 있다”며, “큰 종은 보천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큰 종과 보천교를 연결시켰다.  © 김충열 정치전문기자

 

당시 동학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 정부는 동학을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1864.4.15.음 3.10)했다.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1898년 6월 2일에 처형을 당하고, 기미독립선언서 33인의 대표인 손병희 선생은 1897년 12월 24일에 동학의 후신 천도교의 3대 교주가 된다. 특히 33인 중 천도교계는 손병희 외 15명이 참여한 것은 동학 즉 천도교 세력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한편, 고불선원에서는 조기진(趙基晉)의 행로집(幸老集), 전봉준 녹두장군이 교수형(1895년 4월 24일)을 당한 해에 규문각에서 주조된 소종(작은 종), 보천교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큰 종,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을 처형할 때 쓴 고문 도구인 형구 틀 등 350여점을 충주박물관과 협의하여 7월중 전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hpf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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