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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아내와 이별하고 피아니스트와 재혼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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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동신 화가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어느 날 마사에를 찾아온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김연규였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많은 얘기를 나눈 뒤였다. 그녀들의 긴 대화가 있고 난 후 마사에는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막내 두성이가 태어나고 몇 달 후였다. 이제 순수했던 동신과의 여정을 마치려 한 것이다. 동신은 마사에의 결연한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명백하고 파란만장 했던 두 사람의 열정은 세상의 거친 파도를 거슬러 가려 했지만 끝내 풍랑의 거품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게 된 것이다. 1963년 마사에는 5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은 패망의 위기에서 벗어나 이미 선진국의 대열로 진입하고 있었다. 마사에와 아이들을 모두 마사에의 "와따나베"집안에서 거두었다. 그리고 아파트를 얻어 아이들과 함께 동경에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몇 년 후에 마사에는 아이들의 성을 모두 마사에의 성인 "와따나베"로 개명하고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둘째아들 ""은 개명을 거부하고 한국국적을 고집했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동신이 병원에서 마사에의 간병을 받으며 6개월간 입원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김연규는 생활비를 보태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식모를 시켜 매일 콩물과 건강식품을 챙겨 보냈다. 그 덕에 동신은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연규는 마사에랑 때때로 병원에서 만나 일본말로 깊은 얘기를 나눴다. 연규는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도다마시이"의 정신을 지키는 가문의 딸, 전형적인 일본 여인 "마사에 와따나베"가 어떻게 조선인인 배동신에게 끌려 자신의 일생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필연성같은 관심이 한없이 끌렸던 것이다. 여고시절에는 처음 복도에서 만났었던 품위가 흐르는 여자가 강당으로 연극을 구경 왔다며 일본말로 길을 물었을 때 누구일까 했는데,

 

왼쪽부터 용..마사에.두성.명자  ©브레이크뉴스

 

배동신 미술선생님의 일본인 아내 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호기심에 빨려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사에 또한 동신을 따라 한국에와 살면서 처음으로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것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연규의 나이 27세였다. 마사에는 자신 보다 7살 아래인 연규에 대해 과거의 자기의 모습을 보는 착각을 했다. 연규는 동신의 그림을 좋아했다. 동신의 첫번째 개인전이 학생회관에서 열렸을 때 연규는 가장 친했던 친구 국원영(산부인과의사)과 같이 동신의 그림을 보러 갔었다. 언제든 그 친구 원영을 만날 때 마다 그날 본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배동신선생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마사에는 남편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동신의 그림을 좋아하는 연규의 친구도 함께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연규는 전람회에서 봤던 여인의 초상화를 기억하고 있다면서 그림에 대한 히스토리를 물어보았다. ! 그 그림은 저를 그린 것이에요. 제가 늘 남편의 전속 모델인 걸요. 동신의 그림의 소재는 항상 정해져 있답니다. 산은 무등산, 정물은 사과와 복숭아, 그리고 인물의 모델은 모두 바로 저입니다. 호호호.. 마사에 가 그렇게 웃어보인 것은 너무나 오랜만의 모습이었다. 동신도 그날 병실 침대에 누워 그녀들의 대화를 자는 척 눈을 감고 엿듣고 있었다. 동신이 퇴원했다. 동신은 그동안 병원을 찾아준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러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연규가 음악선생으로 있는 여자고등학교에 찾아왔다. 연규와 한이직을 만나러 온 것이다. 한이직은 동신과 함께 전남여고 교직에 있었는데 현재 연규가 다니는 여고의 교장이다.

 

 .화자.두성.마사에.   ©브레이크뉴스

그 분에게도 함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동신과 연규 그리고 한이직 세 사람은 학교 옆 중국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 한우직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동신은 연규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말과 함께 마사에의 인사말도 전했다. 동신은 여전히 수척해 보였지만 늘 그렇듯이 쾌활하고 반짝이는 재치로 연규를 즐겁게 해 쥤다. 동신은 갑자기 아주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선생.. 마사에 가 그러던데.. 김 선생도 내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오? 라고 물었다. 어머!? 호호호호.. 사모님이 정말 그런 말씀을 하신거에요? "글세.. 내 아내가 김선생 얘기를 하더니"하면서, 동신은 마사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도우신(동신), 김연규 선생을 당신의 모델로 써서는 절대 안돼요. 명심하세욧!!" 하더라고 잉! 하하하하.. 호호호호., 둘은 그렇게 한바탕 웃으면서 헤어졌다.

 

며칠 후 연규에게 그날 함께 점심을 먹었던 한이직교장이 이야기 할 것이 있다고 교장실에서 보자고 하였다. 한이직 교장은 연규의 고등학교시절 국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으로 김연규를 제자로써, 그리고 음악인으로써, 존중하고 아껴주었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를 나온 전라도 최초의 피아노 전공자라는 명분을 세워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이 학교에 특별 초빙 교사로 대우해 주고 있는 고마운 선생님이다. 연규는 교장실에 들어서서 한이직에게 인사를 하며 "무슨 일 이신지요?" 했다. 다른 게 아니고 배동신 선생 말인데.. 그 친구 우리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쳐 줬으면 하는데 김 선생이 만나서 얘기를 해보고 모시고 왔으면 해.. 김 선생이 시간을 좀 내면 어떨까? ! .. 교장선생님 좋은 생각 같아요! 제가 찾아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연규는 이런 기쁜 소식을 자신이 전 하러 간다는 게 너무 기분 좋았다. 먼저 마사에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연규는 제과점에 들러 선물용 카스테라를 포장해 들고 동신의 집으로 마사에를 찾아갔다. 양림동 언덕배기 아래 길가에 일본식 상가처럼 생긴 초라한 판자집 앞에서 기웃거리며 "배 동신 선생님계신가요?"하고 불렀다. 안에서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이 칸칸이 붙어있는 미닫이 문에 노크하며, 한번 더 소리 높여 불러 보려 할 때 안에서 "하이 하이" 대답하는 마사에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문 격인 유리창 미닫이 문이 밀리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쓴 마사에 가 얼굴을 내밀었다. 연규를 보자 일본말로 인사를 하면서 머리에 수건을 벗으며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문을 닫았다.

 

안에서는 마사에 가 뭐라고 하자, 아이들이 이쪽저쪽으로 오가며 장난질하는 모습이 비쳤다. 잠시 후 마사에 가 들어오라고 친절한 손짓을 하며 손을 잡았다. 집안은 들어서자 바로 신발을 벗고 올라 설 수 있도록 마루가 깔려 있고 다시 주욱 미닫이 문으로 연결된 문턱 너머 터진 공간 하나를 두 쪽으로 갈라 쓰고 있는 모양으로 한쪽으로 빛이 잘 들어오는 창 쪽에 이젤과 의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동신이 그림을 그리는 곳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최대한 반대편 벽으로 붙어 나란히 서서 년규와 마사에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서로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연규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마사에는 아이들 쪽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대고 쉿 하며 단속하자 아이들도 똑같이 따라했다. 연규는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사 들고 왔던 선물용 카스테라를 내밀자, 마사에 가 얼른 받아 들며 "아버지가 오시면 먼저 보여 드려야 하는거에요" 하며, 이이들과 눈을 맞추고는, 연규에게 등받이가 있는 의자를 권했다. 마사에 가 안쪽으로 부엌인듯 싶은 곳에서 따듯한 보리차를 내어 왔다.

 

603월 동신과 명자(집 앞에서) .  ©브레이크뉴스

아이들이 조용히 앉아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마치 조그마한 인형들 처렁 귀여웠다. 연규는 등받이가 없는 작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마사에를 보며 배 선생님은 언제 오시나요? 하고 물었다. 밤에 늦게나 들어오실 것 같아요. 어제까지는 그림을 그렸어요. 좋은 그림이 한 장 완성됐다고, 기분이 좋아서 나갔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 ..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찾아 뵙기를 바랬는데.. 먼저 사모님을 뵙기를 바랬는데 제가 원하는 대로 되어 가는 것이 좋은 징조인 것 같네요 하하.. .. 좋은 일 이라고 하시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마사에도 웃었다. 제가 다니는 여고에서 배 선생님을 미술교사로 모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저더러 직접 말씀을 전하고 승낙을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저는 먼저 사모님께 말씀드려 허락을 받을까 생각했습니다. 배 선생님은 어찌 생각 하실지 사모님이 말씀 전하시고 저희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수업을 하시라고 해주세요. 제가 학창시절에 배 선생님의 미술 수업이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가 높았답니다. 하면서 연규는 학창시절의 동신이 수업하던 광경을 마사에 에게 들려줬다. 마사에와 연규는 함께 웃었다. 언뜻 마사에의 얼굴에서 불안하고 어두운 빛이 보였다. 그런데 남편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싫어해요..

 

? 왜요? 꼭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있지만.. 그것보다 저기 아이들을 학교도 보내야 하고 필요한 걸 구하려면..” 연규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사모님이 잘 말씀드려 주세요. 배 선생께서 이제는 건강도 많이 회복하셨고, 넓은 화실도 필요하실 텐데 아마도 꼭 승낙하실 꺼라 생각합니다.”

 

 용과 명자.     ©브레이크뉴스

동신은 그날밤 늦게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마사에는 동신의 옷과 양말을 벗겨 이이들이 자고있는 옆에 눕혀 이불을 덮어주고 동신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우리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가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우신 당신만 허락 한다면 우리 가족의 미래는 밝아질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여기까지 온 시간들은 일본에서 터를 잡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어 누구보다도 먼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겠죠. 일본에서 당신의 그림을 보여준다면 근방 존경받는 유명한 화가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확연해요. 우리는 꼭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교육시키는 중요한 일을 우리 아이들을 위해 해 줘야해요. 도우신 미안해요 당신의 생각은 다른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에요. 오늘 낮에 김연규 선생이 말한 것을 당신은 분명히 거절할거라 생각 해요.. .. ..그렇다면 정말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미래를 꿈꾸나요? 제발 그 것만이라도 승낙을 해주세요.. 도우신.. 당신을 사랑해요.“

 

다음날 동신은 비교적 적당량의 술을 마셨던 모양이었다. 동신은 마사에 가 차려주는 아침 밥상을 아이들과 함께 마주앉았다. 밥상 위에는 된장국과 된장 오이 풋고추 김치 그리고 커다란 양푼에 보리밥이 담겨져 있고, 밥상 한 켠에 어제 김연규가 가져온 선물용 카스테라가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올려져 있었다. 가난뱅이의 초라하기만 한 그런 밥상 위에 화려한 포장지의 카스테라. 마사에 가 일본에서 가장 좋아했던 음식중의 하나이다. 마사에는 오늘 아침 동신을 향한 무언의 항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사에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떨리는 목소리로 동신을 향해 말했다.

 

도우신 자세한 얘기는 식사 후에 하기로 해요.”

 

카스테라의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카스테라의 상자를 열었다. 아이들의 시선은 마사에의 손가락을 따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사에는 칼을 들어 인원 수에 맞게 카스테라를 잘라서 각자의 그릇에 나누어 주었다. 마사에가 일본에서 자랄 때 좋아하는 이 음식을 늘상 먹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것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먹인다는 생각에 가슴이 메워지는 답답한 통증이 일시에 몰려왔다. 마사에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실컷 울었다.

 

김연규가 가져간 카스테라 상자가 그렇게 동신의 운명을 갈라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마사에는 일본으로 떠나고 동신의 제자 연규는 동신과 결혼을 하였다. 1965년 성당에서 혼배성사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결혼식에 두 사람의 친인척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은 동신이 마사에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지 이년이 지난 해였다. 한편으로, 마사에 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년규와 마사에는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마사에의 일본으로의 귀국에 대한 얘기였다. 마사에는 출국 준비를 위해 누구보다도 연규의 도움을 부탁하고 싶었다. 여권과 비자 문제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한국 국적이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보증인이 필요했다. 연규는 마사에와 아이들이 한국에서의 출국과 일본 입국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진행해줄 여행사를 일본에서 살고 있는 연규의 큰오빠 김웅용에게 부탁하여 소개받았다. 그리고 연규는 마사에의 부탁대로 모든 일의 비용과 절차를 순조롭게 진행시켜 주기로 결심하고 그 약속을 모두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가까운 지인들은 결과적으로 마사에와 동신의 헤어짐을 도와준 연규가 동신과의 결혼을 결행한 것에 대해서 큰 충격과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연규는 결혼을 하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동신이 그러하듯이 자신도 직장에 얽매이지 않고 피아노 연습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개인교습소를 차리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먼저 작고 조그마한 집을 얻어 동신의 화실을 마련해 주고 자신의 피아노 교습실을 그 옆에 차렸다. 그러나 연규의 피아노 교습소는 금방 학생수가 많이 늘어나 더 넓은 곳으로 옮겨야 했다.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 가르치는 피아노 교습소가 생겼다는 소문으로 광주의 부잣집 자녀들은 모두 연규에게 달려들어 학생 수가 급격히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연규는 피아노 레슨을 할 수 있는 더 큰 공간과 동신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더 큰 화실 공간이 나오는 일본식 가옥을 얻은 것이었다. 전체 실내는 약 60평 정도, 복도가 가운데로 질러가고, 한쪽은 방이 세 칸으로 이어지고 출입문이 모두 복도로 나 있었다. 복도의 반대편은 부엌과 연결된 큰 온돌방이 있고, 다다미 방이 4짝 짜리 미닫이 문이 있는 두개의 방이 있고""자형으로 복도를 넘어 반대편으로 같은 크기의 한개의 방이 더 이어지는 구조였다. 그리고 반대쪽 칸의 끝부분에는 목욕탕과 화장실이 붙어있고, 실외에는 동백나무와 잣나무 오동나무가 자라는 정원이 있다. 정원 가장자리에는 작은 연못이 적당히 넓은 마당으로 이어져 있었다. 동신은 그동안 형편없는 공간에서 작업하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번듯한 작업 공간을 가지게 된 것이 꿈만 같았다.

 

연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속속 서울의 명문대와 명문 예술중고등학교에 합격하여 진학을 하는가 하면 역량 있는 콩쿠르에서 입상을 차지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연규의 학부모들이 동신의 작품을 구입하겠다고 하여 고가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연규의 학생수는 150명이 넘었다. 피아노가 3대로 늘어났고, 동신은 화가로서 점점 유명해졌다.

 

▲ 배동신 작 무등산.  ©브레이크뉴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 <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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