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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신 화가의 그림…일본 화랑가의 반응이 뜨거웠다!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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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동신 화가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어느 날 경찰서에서 동신에게 연락이 왔다. 어떤 노파가 동신을 고소했다는 것이다. 경찰서로 호적등초본을 떼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 했다. 경찰서에 갔더니 형사가 유명한 화가라는 것을 알고 공손하게 맞으며 의자를 권했다. 고소한 사람은 천옥희라는 사람인데 어머니가 맞냐는 것이다.

 

"호적등본도 없이 자꾸 찾아와 소란을 피워서 할 수없이 배 선생님께 확인 차 오시라 했습니다. "

 아무래도 노망한 할망구 같다는 것이다. 동신은 한순간에 자존감이 무너지며 황망하기만 했다.

 

"제 생모입니다."

 

 형사가 놀란 표정으로 동신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에미를 모시지 않는다."라고 하시면서 고소를 하셨네요."

 

 동신은 경찰서를 나왔다. 오늘은 수하(양수하)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날 같으면, 오늘도 예술이 어쩌고저쩌고 그림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떠들어야 할 일본 유학시절 동창생인 양수아를 앞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하가 동신을 건드렸다. 어허!!.. 밑전이 다 떨어진 모양이군!!. 동신은 어떻든 가장 허물없는 동창생인 수하에게 오늘 일어난 일을 상의 했다. 수하는 동신을 보며 말했다. 어쩐지 오늘은 좀 차원이 다른 얘기인 것 같네 만 그 일이 더 한 수위의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드네! 하였다. 동신은 상한 속을 달래려 했던지 수하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술을 진탕 마셨다. 동신은 집에 들어와 취중에 연규에게 천옥희 어머니에 대한 히스토리를 들려 주었다.

 

그런 어머니가 아들이 좀 유명해지려 하니, 동네방네에 대놓고 망신을 주려고 한다느니 하면서 징얼대며 쓰러져버렸다. 연규는 다음날 경찰서로 갔다. 천옥희 어머니의 주소지를 알려달라 하여 집으로 찾아갔다. 자신이 동신의 처라고 소개하며 인사를 했더니, 천옥희는 연규의 손을 잡고 크게 통곡을 하며 울었다. 아가야 그 나쁜 놈의 자식이 일본에서 처자식을 데려와서 내가 거둬 줬다.

 

3년 동안이나 내 품에서 잘 살았는데, 자기네끼리 산다고 나가서 죽어라 고생만 하더니, 새 장가를 가서 잘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제 나도 늙고 힘이 없을 것 인디. 그 놈이 이 에미를 찾아서 미우나 고우나 챙겨야 하지 않겠냐? 아이고 내 신세야!!. 그 동안의 파란만장한 세월의 신세타령을 한 참 동안 하면서 연규의 손을 붙잡고 놓질 않았다. 연규는 그 날 천옥희에게 되는대로 돈을 쥐어주며 말했다.

 

어머님 옮길 준비를 하고 계세요. 며칠 내로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하고 헤어졌다. 며칠 후 연규는 동신의 어머니 천 옥희를 사설 노인 요양원에 입원하게 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매월 찾아가 뵈웠다. 그렇게 수년 동안 세월이 지나고 천옥희가 점점 건강이 나빠져 병원으로 옮겨졌고, 동신의 어머니 천옥희는 세상을 떠났다. 동신은 파란만장했던 어머니의 주검 앞에 앉아 지나간 일들을 되 뇌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동신은 어떤 시대의 사조에도 휩싸이지 않는 철저한 "동신이즘"의 성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동신교에 사악한 이물질이 끼어들어 뒤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면 수도사의 회개처럼 처절한 고해의 의식을 치르듯 그려놓은 작품들을 파기했다. 새로운 자신만의 모습으로 탈피하여야 한다. 세상에 떠도는 모든 것은 다 필요 없다. 내가 떠드는 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나의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동신은 자신만의 화풍 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만의 고뇌 속에서 방황하다가 지치면, 때때로 말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예술에 대한 논쟁을 하였다.

 

당시 오지호, 배동신, 강용운, 양수아, 등은 추상과 구상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남도의 중심지인 광주에 특별한 미술문화의 역사를 남겼다. 그 논쟁은 너무 치열한 나머지 양진영의 흥분한 객석에서 폭력 사태로 번지는 사건이 종종 일어날 정도였다. 그 시대 광주의 술집 몇 군데는 그들이 들어서면 바로 용광로 처렁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그 논쟁의 내용이 낱낱이 보도가 되었다. 신문을 읽은 당시 지성인들은 그들이 출연하는 술집에 모여들어 밤이 늦은 줄도 모르고 함께 어울려 맞장구를 치거나 편이 갈려 삿대질을 하며 치열한 논란을 벌리는 문화의 장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늦은 밤 동신의 집에 모일 때도 있었다.

 

장동 광주여고 담벽 길 건너 동신의 집으로 느닷없이 서너 명의 취객들이 동신의 뒤를 따라 들어 오면 동신의 다다미 방에 커다란 앉은뱅이 테이블이 놓여지고 소주잔 맥주잔이 놓여지고 간단한 음식부터 술병이 한 병 두 병 늘어난다. 서서히 요리가 나오고 안주들도 하나 둘 술 상위에 늘어난다. 동신의 집까지 따라 들어온 패거리들은 광주바닥에서 유명한 술쟁이 화가들로 최용갑 손동 조규일 등, 동신과 함께 황토회 회원들이 주로 드나들었지만, 그 밖에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렸다. 화가들만이 아닌 서울이나 다른 고장에서 일보러왔던 예술인, 시인 과 문학인들 기자들이 한데 섞여져 떠들고 노래 부르며 춤추는 술판이 몇 일간 계속될 때가 많았다.

 

연규는 동신이 이렇게 집안에 손님들을 데리고 들어와 술판을 벌이는 날이면 아예 부엌일을 하는 사람을 불러 음식상을 보게 하였다. 하루는 동네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큰 술병을 두 병정도 들고 찾아와 오늘은 밤 10시가 넘어서는 술 사러 나가거나 되도록 들락거리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가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중앙에서 최고 높은 사람이 왔기 때문에 동네에서 가장 시끄러운 동신의 집에서 크게 소란스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관할에서 그렇게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

 

▲ 동신의 음주가무 최용갑과 함께 절친 이원재의 부친 회갑연 동신의 축하 가무.    ©브레이크뉴스

동신의 집은 이처럼 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로 감찰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60년대 시절은 자유롭지 않은 세상이었다. 동신은 쓰러질 때까지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나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몸속 알코올을 깨끗이 씻어 내버리기 위해, 몇일을 술을 끊고 사색을 하거나 산행을 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리한다. 그리고 화실에 들어가 이젤을 세우고 그 위에앞핀을 눌러 종이를 붙인 화판을 걸쳐둔다. 몇 날이고 계속 데생과 크로키에 열중한다. 그리고 수채화 물감을 색깔 별로 팔레트에 짠 후, 한참동안 서성이며 뜸을 들이는 것 처렁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러다가 어딘가에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고함을 지른다. "에잇!! 잡것들!! 빌어 쳐 퍼먹을 뚱 땅 거리는 피아노 소리 땜에 시끄러워 아무것도 못해 먹겠다! 집어치우고 모두 나가버려라!! 순간, 연규는 가르치고 있던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버린다. 그 날은 피아노 교습소에 고요가 감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이상한 일 이지만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당시 연규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 당시 남도의 중심, 인심 많은 광주 사람들의 포근함이 년규와 동신의 부부가 가진 예술 향을 귀하게 여겨준 까닭이 아닌가 한다. 연규와의 결혼 이후, 동신의 생활은 왕과 같은 것이었다. 동신은 그림 그리는 일 외의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밖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추종자들을 집으로 끌고 들어오면, 연규가 베푸는 한바탕 잔치 술상을 받고 음주 가무로 흥청대고 지치면 쓰러지는 것이다. 동신의 집에 자주 와서 술을 얻어 먹었던 누군가 동신에게 말했다. 배 선생님은 늘 상 이런 생활을 하시니 저한테도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동신이 술에 취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소리지르듯이 대답했다. 으하하하하 우리 집에는 검은 궤짝이 몇개 있는데 그것을 마구 치면 돈이 나와 불어., 그걸 내 마누라가 해분당께.. . 헤헤헤헤.. 하였다. 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박장대소를 하며 또 술잔이 돌았다. 연규는 그런 동신에게 행여 또 간에 무리가 가서 건강을 해칠까, 동신을 위해 일본에서 가정의학 서적을 주문해 공부하며 동신에게 먹일 음식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렇게 요리된 음식들은 평상시는 물론 어김없이 동신의 잔치 술상에 올라와 있었다. 연규는 동신이 끼어 있는 갖가지 모임에 모든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자신이 동신을 위해 개발한 음식들로 잔치를 벌였다. 그런 가하면, 그 당시 일반가정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기오 븐기 같은 요리기구들과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주방기구들을 갖춰 놓았다.

 

그리고 식모들에게는 음식재료를 사오게 하는 일과 잔심부름을 맡기고 본인이 직접 요리를 했다. 연규는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동신이 벌리는 술잔치를 오가며 동신과 함께 노래도 부르며 동신이 춤추면 장단을 맞춰주느라 춤사위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렸다. 자리에 함께한 취객들도 매우 즐거워했다. 당시 동신의 친구이자 검사였던 이동봉은 청렴한 동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물욕이 없고 명예도 관심이 없는 가난을 즐기는 예술가라 했다. 연규는 그런 동신을 예술가로서 세상에 내 놓는 일을 하려한 것이다.

 

동신의 기행이 실린 고은의 수필집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1991년 5월 발행.  ©브레이크뉴스

동신의 성격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때면 매우 쾌활하고 화통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그러다 보니 술 한잔이 들어가면 너무 격렬하게 자신의 싫은 내면을 들어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고은 시인이 남도를 여행하다 동신의 집에 왔다가 동신의 생활상을 보고 흥미를 느꼈었던지, 어떤 모임에 동신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함께 술자리에 참석하였다가 황당한 동신의 기행을 목격하고, 그 날의 이야기를 자싵의 수필집에 실었다. 그날은 동신과 함께 활동하는 화가들이 모임의 이름을 짓자고 하여 모인 자리였다. 25명이 모였다고 하여 25인회로 하자남도회로 하자, 하다가 동신이 25인회로 하지 않는다고 술상을 뒤집어버린 사람이라고 그의 수필 속에 적었다.

 

이런 동신의 극단적인 성격은 연규와 도 많이 부딪쳤다. 결혼의 초창기에 그들의 부부싸움이 있었던 시절에는 당장 집안의 가구가 아수라장이 되어 남아나 질 않았다. 연규 또한 동신의 합당치 않는 도발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때문에 동신의 극히 감정적인 만행의 불이익이 연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연규는 서서히 동신을 이해해 주고 감싸주었다. 말하자면 동신은 어린시절 갑자기 변해 버린 부모들의 태도로 얻어진 불신의 기억이 욕구불만과 부딪치는 순간 극렬한 신경질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았기때문이다. 연규는 동신의 그런 현상이 가장 믿었던 어머니와 같은 대상이어야 생기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동신에게는 이처럼 자신에 대해 그렇게 깊은 이해력을 지닌 아내가 생긴 것이었다.

 

연규는 동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의 보살핌은 동신에게는 더 이상의 보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연규의 고민은 동신의 성격 때문에 아이들이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늘 노심초사 하였다. 이미 마사에와 5명의 아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었다. 년규와 마사에는 때때로 전화로 통화를 했다. 동신의 둘째 아들 ""이 일본으로 귀화 하기를 거부했고, 일본의 정치 반대세력인 적군파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그런 가하면 맏이 ""이는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한국인지 일본인지 인지장애를 앓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고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나아지는 대로 한국에 잠시 보내야겠다 한다. 셋째 명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우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 1965년 년규와 동신의 단란한 모습 동신의 화실.    ©브레이크뉴스

한편, 마사에 가 한국을 떠나 일본 하네다 공항을 통해 입국할 때 가방에 넣어 가져간 동신의 그림 7점이 공항의 검색대에서 적발되었다. 그 그림이 일본자유미술창자기협회의 정회원인 배동신의 그림이란 것과, 마사에 가 동신의 아내인 것인지에 대해 현장 공항수사대에 수사를 받고, 입증되었다. 그 과정이 공항에 나가있던 NHK기자들에게 취재되어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에 대한 일본 화랑가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한국에서도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아이들의 미래를 선택하고, 한국을 떠나온 마사에는 동신의 화우로써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써 동신의 성공을 위해 늘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동신과 자신이 만났던 이 일본에서 동신이 전시회를 갖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 미술계의 초청장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사에는 연규를 통해 동신이 한국에서 그림에 전념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동신이 사용할 물감과 종이 등 미술도구들을 당시 세계적인 최고의 전문가용인 "홀벤(HOLBEIN)"사의 제품으로 일체를 보내왔다. 참으로 동신의 화가로써의 신세는 일본과 한국의 두 아내로 부터의 내조로 최고 그 자체인 반면, 남편과 아버지로서 의 모습은 그야말로 티브이 속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자 가족의 숫사자 그 자체였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 <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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