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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신 수채화 개인전 “한국 미술계에 쐐기같은 존재의 화가” 평

후랭키 작가 l 기사입력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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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동신 화가 자화상. ©브레이크뉴스

연규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아버지 김형주가 대학을 졸업하자 장씨 집안으로 연규를 시집을 보냈지만 아이가 생겼음에도 몇 달도 안돼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딸을 낳았던 것이다. 딸의 이름은 ""이다. 연규의 어머니 고명주가 령을 맡아 키웠지만 동신과 결혼한 후 동신의 성을 붙였다. 연규의 딸 배령이 태어난 지 1년도 안되었을 때 6.25동족의 란이 터졌고 그 와중이었다. 포탄이 령의 근접에 떨어져 폭발하는 바람에 놀라 기절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자라면서 자폐증상이 드러나 정신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연규는 딸 령의 안위를 늘 걱정해야 했다. 그리고 사랑했기에 결혼했던 초창기엔 동신으로부터 을 보호하고자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동신이 매번 령이 실수를 저지를 때면 놀라지 않게 령을 감쌌고, 연규를 안심하라며 위로했다. 이 같은 동신의 령에 대한 각별한 배려를, 연규는 동신에게도 약자를 위한 특별한 인격의 부분을 갖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여겼다.

 

 

197010, 용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아버지 동신을 만나러 온 것이다. 그동안 일본에서 가족들의 생활도 많이 좋아졌다. 용은 아버지를 보자 눈물이 났다. 동신도 울었다. 동신의 나이 50, 용의 나이 27세였다. 20세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돌아 온 큰아들과의 7년만의 재회였다. 어른이 된 아들 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동신은 마사에와 일본으로 떠나보낸 자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안부를 물었다.

 

용과 동신의 모습.       ©브레이크뉴스

모두 아버지 동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에 동신은 울꺽 눈물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용은 한국의 어머니 연규에게 큰절을 하였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몇 번을 되풀이하며, 마사에가 보낸 편지와 선물을 전했다. 연규는 용의 손을 잡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이 잘 되었구나 하였다. 한국의 어린 동생들 령 한성 경자와도 인사를 나눴다.

 

동신은 특히 운의 소식을 용에게 물었다. 동신의 둘째 아들 운은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 해 3월 일본 여객기 JAL를 납치해 북한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동신도 당국의 조사를 받았지만 운이 소속된 적군파의 이념이 반공국가인 한국의 정치적 범죄 영역에 해당되지 않았고 동신의 예술관이 이념적 편향이 아닌 것이라 무사했다. 하지만 북으로 간 운은 북한의 체제를 거부함으로 북한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소위 아오지 탄광에서 일한다 했다. 해서 동신과 마사에는 일본에 있는 조총련의 북한당국을 통해 운을 위해 계속 돈과 물자를 보냈다. 용이 돌아가는 날 동신과 연규는 함께 김포까지 배웅을 했다. 동신의 마음은 마사에와 아이들을 보냈던 그 날의 슬펐던 기억이 밀려들었다.

 

쪼개지는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보딩 존으로 들어가는 용의 뒤 모습을 바라보는 동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마사에의 애칭이 새어 나왔다. 마짱.. 마짱 신음하듯 몇 번이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런 동신의 표정을 본 공항의 여직원이 영문도 모른 체 눈물을 훔쳤다. 그 이 후 용은 매년 동신을 보러 한국에 나와 일본의 소식을 전했다.

 

1970년 용이 일본에서 왔다왼쪽부터 용 년규 동신.  ©브레이크뉴스

동신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지고 연규는 동신을 위해 2층에 창문이 크게 나 있는 집을 샀다. 그리고 2층 전체를 동신의 화실로 피아노 교습은 아래층에서 할 수 있게 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의 여의도에 60평 아파트도 구입해 뒀다. 그리고 동신은 연규의 열정적인 내조와 응원 덕에 한국 화단의 거물로 부상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황토회와 전라남도심사위원, 전라남도문화상수상, 수채화창작가협회회장으로 피선되는 등 서울에서는 당대 한국최고화가들의 협회인 구상전에 초대되어 정회원이 됐다. 구상전에는 박고석 장이석 황유엽, 최영림, 박항섭, 전혁림, 박석호 등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신문회관(프레스센타)화랑에서 배동신 수채화 개인전이 열렸다.

 

197361920회 개인전 이었다. 전시회 전야제가 있었다. 가까운 화가 친구들은 모두 작품 앞에서 감탄했다. 동신의 작품은 맑고 깨끗한 한 덩어리의 볼륨, 그것은 동신의 내면의 굴곡, 구상과 비구상의 광활한 조형 세계의 틈새 반짝이는 보석과 같은 수채화, 누구도 닮지 않은 동신의 모습들이 화랑의 벽에 하나씩 걸려 있었다. 가난하고 병들어 쓰러져가고 있던 배동신이 기적처럼 살아 돌아 온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한국 화단에 수채화의 광풍을 몰고 온 것이다. 전시 중 미국 대사관에서 헤시라는 사람이 찾아와 동신은 세계적인 천재라고 했다. 이후 미국대사관에서는 동신의 미국 전시를 제안했다.

 

한국의 미술평론의 대부였던 이경성은 "배동신은 한국 미술계에 쐐기같은 존재의 화가" 라는 글을 신동아에 실었다.

 

▲1957년 배동신 개인전.  왼쪽부터 허련, 배동신, 임학송.  ©브레이크뉴스

다음해 1974년 봄 동신이 2층 자신의 화실에서 무등산 쪽을 응시하며 뭔가 기운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아래층에서 연규가 편지를 들고 계단을 오르며 소리쳤다. “여보 일본에서 편지가 왔어요”.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왔네요 하며 동신에게 건넸다. 일본 "동경미술가화랑"에서 전시 초청장이 날아왔다. 동신이 공부했던 도쿄에서 동신을 부른 것이다. 동신은 전시 일정을 9월로 잡혔다. 그 해 8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 총성이 울리며 육영수여사가 쓰러졌다. 동신이 일본으로 출발하려 했던 날이었다. 동신은 다음날 일본으로 떠났다. 연규는 동신을 보내며 생각했다. 일본에서 마사에를 만나고 아이들의 얼굴을 모두 마주할 수 있겠지! 참 세상살이 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동신은 이렇게 그의 얽힌 매듭을 풀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동신이 탄 비행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동신은 일본에서의 전시 준비를 하는 동안 동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일본의 가족들을 모두 만났다. 모두 다같이 울었다. 명자는 처음엔 아버지를 보자 가족을 버린 아버지란 생각에 화가 난 나머지 격한 말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다. 화자와 두성을 안아보았다. 모두 모였지만 보이지 않는 운의 모습이 동신의 마음속에 더욱 선명해 졌다. 용은 조용히 동신과 마사에 만을 남기고 형제들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더 이상 여한이 없다."라는 말이 이런 것일까? ,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일본으로 그림공부를 하러 와 와따나베 마사에를 만나고 사랑하고 행복했고 다섯 자녀가 생기고 가난했고 고생하고 헤어지고 좌절하고 다시 만나고 화해하고, 마침내 참! 싱거운 일이었다. 인생의 참모습은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각자의 생각과 마음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1973년 배동신 개인전 배동신 박고석 이원재.    ©브레이크뉴스

배동신 수채화전이 일본미술가화랑에서 오픈 되었다. 일본 미술계인사들과 주한대사관 인사들 그리고 소속 기자들, 일본 문화계 기자들이 밀려들어와 감탄사를 연발 하였다. 모두 하나같이 와! 크다, 무겁다, 대담하다, 그야말로 창작이다 하며 감탄했다. 일본화가들도 이런 수채화는 우리 일본에서도 못 봤다.” 라고 웅성거렸었다고, 당시 대사관에 있었던 문화 담당관 "윤탁"이 전했다.

 

일본수채화협회 회장 "후 하이 쇼"는 보내주신 안내장의 자화상을 보고 오늘을 기다렸다며, 세계적인 수채화 작품들이 전시 될 거라는 예상대로 주옥 같은 작품 하나하나에 감동 했다고 했다. 다음날은 전시장에 관객이 꽉 차 어깨가 닿을 정도로 붐볐다. 다음날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전시장 그림 앞에선 관객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감동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마지막 날 일본 황실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동신을 찾았다. 그림은 모두 팔렸다. 동신은 팔아야 할 그림과 팔지 말아야 할 그림을 분명히 정해서 그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두번째 일본 대판화랑에서 하여야 할 전시 목록을 따로 구분하여 전시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여러모로 동신의 일본 전시는 대성공을 거뒀다.

 

동신은 그림을 팔아서 번 돈을 처음으로 마사에 에게 줬던 날 동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마사에 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었다. 동신은 의기양양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동신의 그림은 당시 한국의 국정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매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밖에 수많은 굵직한 전시회에 동신의 작품이 선보였다. 동신의 수채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자, 급기야 한국 화단에는 수채화의 열풍이 불어왔다. 유화를 그리던 화가들은 너도나도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수채화 전시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유명한 화가들이 모여 수채화 전시를 하자는 "수채화작가전"이 생기고 "한국수채화협회"가 창립되었다. 2000년 한국정부는 동신에게 세계적인 화가로서 지역 미술문화의 발전과 수채화를 미술 장르의 한 영역으로 넓힌 화가로 인정하여, "대한민국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동신은 일본 전시 이후 서울의 여의도에서 10년간 생활하며 중앙 화단의 중추적인 화가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89년 아내 연규에게 여수로 내려가 살자고 졸랐다. 연규는 서울 생활을 갑자기 접자는 동신의 생각에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동신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연규의 양보로 동신은 결국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여수에서 한약방 일을 하다가 일본 유학을 결심했던 남도 여수로 돌아온 것이다.

 

여수에서의 작품 활동을 그에겐 화가로써의 모든 역량을 다할 마지막 격전지라 생각했다. 동신만의 조형의 바다를 유형 해 볼만 곳이라 여겼던 것이다. 광주의 무등산 나주의 금정산 목포의 항구 여수의 바다와 조선소 그리고 동신의 전속 모델 연규도 남도의 여인이다. 동신도 남도의 풍광을 받고 자랐고, 남도의 어느 한 켠에 자신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고향 남도로 돌아온 것이다. 한쪽으로는 오동도 다른 한쪽으로는 선착장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동신은 연규가 즐겨 치는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들으며, 작품 구상을 했다.

 

이번에 그려야 할 그림은 전에 그렸던 무거운 무등산을 바다에 띄워야 한다. 여수 앞 바다 작은 조각배는 작은 배가 아니고 내 삶의 무게를 담은 무등산이고 금정산이고, 누드의 부드러운 곡선과 풍만한 볼륨이다. 남도의 하늘에 떠있는 빛나는 구름이 바다 위로 치솟는 파도 속으로 하나가 되듯이 나의 그림 속 조형의 바다는 하나하나 내 영혼의 의미를 표현하는 나만의 회화로 태어날 것이다. 동신은 하나 하나의 작품을 실험의 연속이라 생각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절제했고, 부서진 구조의 균형과 미를 보는 시점을 전혀 다른 각도에 두고 재 구성했다.

 

종이 위에 맹물을 듬뿍 머금은 커다란 붓질이 샥 소리를 내며 빠르게 좌우로 지나가면, 흰 바탕 위에 순수의 물빛이 방울 져 흐른다. 잠시 후 습기에 불려져 도톰해진 지면 위로 여수 앞바다에 띄워진 고깃배가 보인다. 갑판에 부딪친 강열한 광선이 눈부신 청색의 신호를 보내고, 동신은 순식간에 원청색의 곡선을 친다. 순간 시간이 잠시 머물듯 서서히 흰 바탕 위로 우아하게 번지는 화려함은 고작 뱃머리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뒤이어 정해진 도형들이 여기저기 각자의 생기를 띠고 번진다. 배와 바다와 하늘 항구가 있는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육지의 풍경. 쏟아지는 남도의 풍광이 동신의 시선을 따라 흐르다 멈출 때면 화폭에 담긴 한점의 동신화가 완성된다. 그려진 그림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고, 잘 어울려 정돈되어 있지도 않다. 빼어난 손 재간의 기술도 없는 어색한 형식 없는 붓질의 긁적임. 동신은 작 품속 그 것들은 그냥 그렇게 그렸다. . . 면에 색칠을 하고 공간을 이용해서 자신의 감정을 매혹적으로 섞은 것이다. 이렇듯, 배동신 회화의 본질은 태초의 단순함이다.

 

동신은 2008129일 오후 3, 남도의 따듯한 겨울 햇볕을 받으며, 연규가 먹여준 미역국 한 모금을 맛보았다. 그리고 편안한 오수를 즐기듯 숨을 거두었다

 

▲ 배동신 부부.     ©브레이크뉴스

배동신(裵東信) 화가 약력

Dong shin Bae(1920~2008)

 

1920616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출생하여 광주 서석초등학교에서 벌교초등학교로, 다시 여수 서초등학교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3년 일본 카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과(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36년 그림을 그리러 간 금강산에서 박수근(朴壽根)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았으며, 평양의 미나까이(三中井) 백화점 장식부에서 일하며 문학수(文學洙), 장리석(張利錫)과 교류하였다. 1937년 일본으로 가서 유학했다. 1945년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 아들 배용과 함께 귀국하여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하였으나 부인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딸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1958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직 시절 제자였던 김연규(金年圭)과 결혼하였다. 1943년 일본 자유미술창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는 광주서중학교, 전남여자고등학교, 순천사범학교, 진도중학교, 영암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947년 제1회 개인전을 광주도서관에서 개최한 이후 1964, 1967, 1969년 전라도에서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1973년 서울, 1974년 일본 도교(東京)과 오사카(大阪)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수십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1968년에는 박철교, 강연균, 우제길과 함께 수채화 창작가협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오지호, 김영태, 최용갑, 김인규, 강동문, 김수호와 황토회전을 조직하고, 목포 미로화랑에서 제1회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72년에는 구상전에 초대 회원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한국수채화협회초대회장이 되었다. 1978년부터 서울로 옮겨 활동하였으며, 1989년 전라남도 여수시로 내려와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98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배동신 수채화 60년 초대전을 열었다. 누드, 과일바구니, 항구, 산을 주로 그렸는데, 특히 광주에 있는 무등산 즐겨 그렸다. 대부분 수채화로 제작하였는데, 큰 붓을 이용한 빠른 필치를 보여주며, 과감한 생략과 확대를 통해 대상을 변화시켰다. 또한 자유로운 선의 사용으로 운동감과 양감을 표현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제7회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녀로 입상하였다. 1974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대한민국문화훈장(보관장)을 받았다. <계속>  hooranky@yahoo.com

 

*필자/후랭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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