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눈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눈치의 해석학'

이종철 철학박사 l 기사입력 2020-07-01

본문듣기

가 -가 +

▲ 이종철 철학박사.  ©브레이크뉴스

가톨릭 대학의 이창봉 교수는 “집단주의 문화와 눈치의 그리고 민주주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8560)라는 글에서 과거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한국인들의 눈치 문화가 코로나 시기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적었다. 여전히 전 세계에 걸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기에 빼어난 대응능력으로 인해 한국이 희생도 줄이고 전 세계에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은 상황 판단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독특한 눈치(Noonchi) 문화 때문이다. 눈치는 사태를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방식인데, 과거에는 이 눈치가 자기검열의 방식이거나 처세술의 의미로서 부정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오늘 날에는 상황 전체에 대한 빠른 인식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적극적 의미를 띠면서, 이런 것들이 바이러스 유행에 기민하게 대처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눈치의 이런 일반적 의미에 더해서 눈치에 독특한 해석학적 이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눈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속도'이다. '눈치가 빠르다'는 말이 그렇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고기 맛을 본다'는 말이 있다. 절은 채식을 하기 때문에 고기와는 거리가 먼 곳인데, 그런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눈치다. 그런데 여기서 '빠르다'고 할 때의 '속도'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눈치가 빠르면 그만큼 상황을 빨리 인식하고 그에 따른 후속적 대처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빨리 빨리'는 이제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이 특유의 '빨리 빨리'의 정신에 의해 식민지를 겪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빨리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지 몰라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크다. '빨리 빨리'의 문화를 반성하자는 말도 많지만, 이것은 디지털 시대에 더 잘 어울리는 정신이다.

 

뉴톤의 제 2 운동 법칙인 f=ma에서 보듯, 가속도는 힘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이다. 속도가 빠르면 일 처리도 빠르고 영향력도 클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그곳에서 인터넷 라인이 문제가 생겼거나 잘 달리던 차가 고장이 나서 A/S를 한 번 받으려면 얼마나 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한지 말이다. 한국의 배달 서비스는 분초를 다툰다. 물론 이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는 의미다. 과거 칭기즈칸의 군대가 단기간에 전 세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빠른 기동력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을 오가는 그의 파발마는 하루 352km라는 상상 불가의 속도로 달렸다. 그의 군대의 이동 속도는 하루 130km에 버금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현대의 군대들도 따라잡지 못할 속도이다. 몽골의 기마병의 이동 속도는 너무나 빨라서 유럽의 기사들이 미처 대비책도 세우기 전에 순식간에 몰아쳐 헝가리 평원에서 유럽의 연합 기사단들을 전멸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 군대에 대해 유럽인들이 가졌던 공포나 트라우마는 대단했다. 그런데 필자가 몽골에서 지내보며 알게 되었지만 이런 빠른 유전자들은 더는 몽골인들에게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남아있는 것 같다. '빨리 빨리'의 정신은 무엇보다 빠른 상황 판단, 즉 눈치가 빠를 때 가능하다. 그 점에서 눈치에서 속도가 갖는 긍정성의 의미가 더 크다.

 

이런 빠른 눈치가 때로는 자기검열과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눈치가 보인다‘거나 ’눈치를 준다‘는 의미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일종의 단절감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상대의 행동을 제어하는 차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는 외려 눈치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눈치는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인식 방식의 하나인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눈치에서 '속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상호 간 혹은 다자 간의 관계에서 아주 미묘한 차이와 기미, 이를테면 눈빛 혹은 얼굴 표정, 미세한 손동작이나 발동작 혹은 헛기침 같이 모든 행동거지들이 하나의 해석을 위한 메시지로 작동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것들 속에서 의미 있는 해석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해석학자이고 기호학자이다. 반대로 그런 메시지를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 역시 상당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 북의 단추를 보면 그냥 '좋아요'라는 버튼 말고도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 같은 감정 신호를 보여주는 버튼이 있고, 최근에는 '힘내요'라는 버튼까지 추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감정 신호를 담은 버튼을 많이 누르는데 어떤 이들은 절대 그것을 보여주지 않고 무조건 '좋아요'만 누르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싫어도 싫다고 하지 않는다. 일종의 포커 페이스 같은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상당한 고수라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아예 잠행조차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고수들이 페이스 북에는 의외로 많다.

 

그런데 마음을 감추고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이란 개념이 이런 경지를 말할 수도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 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이건 인간이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해와 관심이 요구된다. 이러한 이해와 관심은 사랑과 증오, 거래와 배려 등 모든 관계에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지나치다 보면 중독처럼 빠질 수도 있고, 집착처럼 상대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도하게 들어가는 것 혹은 몰입은 상대에게 눈치를 주면서 양자의 정상적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 반대로 나가기나 거리두기는 이로부터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거리를 두다 보면 상대를 전체적이며 객관적으로 볼 수가 있고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바둑에서도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경우가 그렇다. 거리두기가 너무 심해지면 당연히 잘 보이지 않거나 소원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엄마가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할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종종 부모 자식 간의 관계 혹은 무촌이라고 할 부부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지나치게 상대에 몰입할 때 나타난다. 이럴 때 상대와 반성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거리는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공간적 거리도 포함될 수 있다. 아무래도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면 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는 SNS가 발달해서 이런 공간적 거리 유지가 잘 안 되는 데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들어가기‘와 ’나가기‘는 인간관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개념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양자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은 눈치를 보임으로써 차별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고, 눈치를 일찍 챔으로써 상황을 빨리 읽고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지혜‘(P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점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눈치‘는 반성적인 이해인 동시에 실천적인 지혜와도 연결이 된다. 코로나 시대에 눈치 문화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만한 큰 이유가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역시 이 양자의 긴장과 밸런스를 다 담은 상태이다.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 아마도 선사들이 말하는 무심의 경지와도 같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눈치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에는 이런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아주 딱 맞는 구절이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다. 내 마음이 어떤 것에 머물다 보면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런 마음이 가라앉는 곳, 무심의 경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마음이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을 하거나 정신없이 놀이에 열중하거나 음악에 빠져서 다른 아무 생각도 내지 않는 그런 상태가 내 마음이 머물지 않은 곳이고 무심의 경지이다. 이런 마음에 희로애락이나 재물욕이나 권세욕이 개입되니까 집착도 생기고 고통도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키울 수 있을까? 눈치가 빨라야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의 눈치가 결코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jogel4u@outlook.com

 

*필자/이종철(연세대 인문학 연구원철학박사) 

 

연세대 정법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연세대 철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연세대 등에서 강의를 했고몽골의 후레 정보통신 대학의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다.(사)푸른아시아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상임 연구원.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URL 복사
x
  • 위에의 URL을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PC버전

Copyright ⓒ 브레이크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