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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傅昭), 신중하게 변화를 예측하고 안전함을 도모

이정랑 중국 고전 평론가. l 기사입력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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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랑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지혜로 불패의 입지를 구축한 관료. 부소(傅昭)는 자가 무원(茂遠)으로 북지 영주 출신이다. 그는 분란이 끊이지 않고 무질서한 관직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입신의 도를 세웠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주마등처럼, 왕조가 바뀌는 위진남북조 시기에 그가 불패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매사에 조심하고 널리 살피는 지혜 덕분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송(宋), 제(齊), 양(梁)의 세 왕조를 겪으면서 주군의 관료와 지방 장관, 조정관 등 다양한 관직을 편력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갖가지 위기가 닥쳤지만, 그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그대로 보전하는 입신의 도를 과시했다.

 

부소의 부친 부담(傅淡)은 남송에서 『삼례 三禮』로 이름을 날리면서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의 관료를 지낸 바 있으나 유탄의 모반에 연루되어 함께 죽음을 맞아야 했다. 당시 부소는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부친의 죽음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성년이 되어서 매사에 조심하는 신중한 성격과 화복을 미리, 예측하는 뛰어난 통찰력은 이러한 충격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이 그를 기용하려 했으나 그는 송의 정국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보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남조 소제(蕭齊) 영명(永明) 초년에 부소는 오랫동안 남군왕(南郡王) 소소업(蕭昭業)의 시독(侍讀)을 지냈다. 나중에 소소업이 왕위를 계승하자 원로대신들이 제각기 총애를 다투기 시작했지만 유독 부소만은 세상사의 무상함을 깨달아 영달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동요 없이 냉정하게 자신의 몸을 보전했다. 소소업이 왕위를 계승 한지 불과 여섯 달 만에 폐위되었을 때 총애를 다투던 많은, 대신들이 박해를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리지 않았던 부소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남조 소양(蕭梁) 시대에는 농업 생산을 발전시키기 위해 허가 없이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하루는 부소의 며느리가 시아버지께 효도하려는 생각에 친정에서 쇠고기를 가져왔다. 이를 본 부소가 아들에게 말했다.

 

“쇠고기를 먹는 것은 법에 위반되는 일이라 고발당하면 즉시 친가에 피해를 주게 될 터이니 차라리 고기를 땅에 묻도록 해라.”

 

부소의 이런 처신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양 무제 천감(天監) 11년(512), 부소는 신무장군(信武將軍)을 거쳐 안성(安成)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안성군에는 계무어(溪无魚)라는 물고기가 많이 났는데 어느 해 무더운 여름날,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이 물고기를 바쳤다. 하지만 부소는 이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선물을 보낸 사람을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생각에 그가 택한 방법은 계무어를 방류하는 것이었다.

 

천감 17년(518), 부소는 임해 태수로 임명되었다. 임해군에는 밀암이란 곳이 있었는데 이전의 태수들은 하나같이 이곳을 관지로 지정하여 임대 해주고, 세를 받았다. 부소는 부임하자마자 이곳을 관지에서 해제하여 땅을 사용한 이익이 고스란히 만간에 돌아가게 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청정무위(淸淨無爲)의 태도를 유지했고 조정에서도 다른 욕심을 품지 않았으며 집안에서도 문하생들을 모으거나 사당을 결성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지 않았다. 이런 그가 생애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후에 정자(貞子)라는 시호를 받게 된 것도 그의 청렴하고 깨끗했던 입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나라의 여황제 측천무후가 중병이 들었을 때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은 측천무후의 측근인 장역지(張易之)와 장종창(張宗昌) 등을 죽이고 병변을 일으켜 중종(中宗)을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영무도대총관으로 있던 요숭(姚崇)도 자신의 주둔지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경성으로 회군하여 이 모반에 참여했다. 그 결과 그는 공적을 인정받아 양현후(梁懸侯)에 봉작되었다.

 

측천무후가 강제로 왕권을 넘겨주고 상양궁에 격리되자 중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측천무후를 찾아가 음식과 기거를 살폈다. 이른바 오공(五公)이 모두 이런 상황을 경축하고 있을 때, 요승 한 사람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있었다. 장간지 등이 그를 나무랐다.

 

“지금은 그렇게 통곡할 시기가 아니오! 공연히 화를 부르지 말고 자제하시오!”

 

“모반에 참여한 것은 공이라 할 수 없소. 오랫동안 무측천을 모시던 내가 지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지조 없이 옛 주인을 저버리는 일이오. 신하로서 응당 시작과 끝을 함께했어야 하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소. 이 일로 인해 벌을 받게 된다 해도 난 할 말이 없을 것이오.”

 

나중에 무삼사(武三思)와 위후(韋后)전권을 쥐게 되자 오공이 모두 수난을 당하게 됐지만 요승만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명대의 소설가 풍몽룡(馮夢龍)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무후가 강제로 왕위를 넘겨주고 오공이 모두 기뻐하며 자신들의 거사를 경축할 때 요승은 혼자 눈물을 흘렸고, 동탁이 죽임을 당해 만백성이 노래를 부를 때 채옹(蔡邕)은 혼자 통곡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매우 유사한 것 같지만 그 화복의 방향은 같지 않았다. 무측천은 군주였고 동탁은 신하였다. 요승의 눈물은 공도를 위한 눈물이었지만 채옹의 눈물은 사적인 눈물이었다. 채옹의 눈물은 평소에 동탁이 베풀어준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눈물이었지만 요승의 눈물은 혹시 닥칠지도 모르는 화를 면하기 위한 권술의 눈물이었다. 요승은 무측천의 핏줄인 무삼사가 건재하는 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짐짓 사람들 앞에서 후회의 눈물을 보인 것이다.”

 

간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시사의 변화를 두루 살필 줄 아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화복의 향방을 예측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득실만 따진다면 관료의 생명을 오래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

요숭(姚崇) 당나라의 명재상 측천무후에게 발탁된 후 중종, 예종과 현종 초기에 걸쳐 여러 차례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국정과 민생 안정에 힘썼다.

 

오공(五公) 장간지 항언범(恒彦范), 최현위(崔玄暐), 원서기(袁恕己), 경휘(敬暉) 등은 정변에 참가했던 다섯 명을 말한다.

 

무삼사(武三思) 당나라의 권신 측천무후의 이복 오빠 무원경(武元慶)의 아들

 

위후(韋后) 당 중종의 왕후

 

채옹(蔡邕) 후한의 학자. 189년 동탁에게 발탁되어 좌중랑장(座中郞將)까지 승급하였으나 동탁이 죽은 후 투옥되어 옥사했다. j6439@naver.com

 

*필자 : 이정랑.

언론인, 중국고전 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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