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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모르죠..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이헌영 소설가 l 기사입력 2021-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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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인 있어요.

 

애인 있어요/이은미 노래

 

"아직도 넌 혼잔 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 건가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 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 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 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알겠죠. 나 혼자 아닌걸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 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도착한 지하철 압구정역은 침울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파에 섞여서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곤 나도 이들 중 하나라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무엇에 이끌리듯 한사코 위로만 오르는 무리에 섞여 계단을 오르며 모두들 좀비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방향을 바꿔 또 다른 계단을 밀리다시피 오르는 중에 또, 그가 생각났다.

 

‘와 있겠지?…얼마나 변했을까?’

 

밖으로 나오자 조금은 여유가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울은 바람도 차게 느껴진다.

 

이제 막 밤이 시작되려는 시간, 시계를 보았다.

 

한참을 기다려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곧바로 골목으로 들어섰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멀리 [어울 링]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걸이가 느려졌다. 또 시계를 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망설여지는 자신을 자책하며 잠시 후 일어날 일들을 그려 보았다.

 

‘뭐라고 인사를 하지?’

 

건물 앞에서 하릴 없이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다가 이내 건물로 들어섰다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계단을 오르다 또 시계를 보았다.

 

2층 출입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힘주어 문을 밀었다.

 

훅 밀려오는 훈기와 생경한 인테리어, 드문드문 손님이 있었지만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암전상태가 되어 두리번거리는데 경미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은미다!…이은미! 여기!…”

 

맨 안쪽 낮은 칸막이 위로 경미가 일어나 손을 흔들고 있다.

 

은미는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만들고 자신의 발걸음을 의식하며 또박또박 걸어 그곳으로 다가갔다. 없다. 그 사람은 없다, 여자 넷, 남자 둘.

 

경미, 지은. 문숙, 정혜 그리고 동욱, 정모, 그 사람은 없다.

 

경미와 모두의 왁자한 환영을 받으며, 그 사람이 없음에 적이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맥이 풀렸다. 그리고 이내 궁금해졌다.

 

‘왜?…안 왔지? 아직 안온건가?’

 

“은미, 얘, 이번에도 못 온다고 하는 걸 내가 세 번이나 전화해서 나온 거야,… 이제 처음 나온 거니까 앞으로는 꼬박꼬박 나와! 빠지지 말고, 알았지!”

 

그랬다, 이 모임을 만든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번번이 망설임 끝에 나오지 못했었다. 매번 경미에게 연락도 받았으나 그때마다 카페를 비울수가 없어서라며 미안하다고만 했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잊지 않고 꼬박꼬박 연락을 해줬는데…사실 오늘도 못 올 건데, 경미가 막 협박을 해서 무서워서 …여하튼 모두들 반가워”

 

은미는 한명 한명 눈을 맞추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카페 한다며? 여주에서…여주 시내야?”

 

동욱이가 친근하게 물어왔다.

 

“응,…시내는 아니고 좀 외곽이야!”

 

“으응, 내가 가봤잖아. 양평 지나서 여주 쪽으로 가다 보면 이포대교 있는 덴데. 장소가 좀 외지고 엉뚱해!…카페는 아주 낡은 건물이었다는데 얘가 개조해서 2층 살림집도 만들었어, 막상 들어가 보면 멀리 강도 보이고, 그럴싸해, 카페이름은 [노팅 힐]이야… 얘는 어떻게 그런데다 카페를 차릴 생각을 했는지 몰라. 그래도 손님은 꽤 있어”

 

경미가 자랑하듯 설명했다.

 

“그렇게 장소가 엉뚱해?…손님은 있다며?”

 

“일반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가 아니고 처음 들어본 산성인데, 그 산성에 올라가는 산책길 같은 거야, 사람도 없고, 그냥 한적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 그런데 손님은 있어. 희한하지?”

 

“은미씨 판단엔 되겠다 싶어서 했겠지, 그리고 된다며?”

 

“처음엔 안됐대, 어쩌다가 한명 한명 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늘어서,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지. 돈은 크게 안들은 것 같은데, 실내 분위기가 제법 그럴듯해, 지가 다 꾸몄다는데, 은미, 얘, 다시 봐야 돼,…우리 언제 한번 다 같이 가보자!󰡓

 

은미가 바로 끼어들었다.

 

“아이! 거기까지 뭘.…그 산성 이름이 파사성이라고, 신라 파사왕 때 만든 산성이라고 하는데 와보면 실망해,…카페를 거기다 차리고 싶어서 차린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거기다 차렸지, 돈이 있었으면 거기다 차렸겠어? 그 집이 외지고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흉가 같았었어, 그러니까 집주인이 할아버지인데 그냥 거저주다시피 나한테 준거지. 그리고 아직은 적자야. 처음 보다는 나아졌지만, 지출이 적으니까 버티는 거지,…이젠 다른 얘기하자, 동욱씨는 곧 결혼 한다며…”

 

“아! 아! 그러면 건물을 아예 산거네, 세가 아니고…이야! 괜찮네.”

 

정모의 말에 모두 공감하며 관심을 보였다.

 

“아! 잠깐,…날짜 잡자고…그쪽에 가볼 곳도 많아, 산성엔 안 올라 가봐서 모르겠고,…조금 더 가면 세종대왕 능도 있고 신륵사 절도 있고…아! 방향이 좀 다르긴 하지만 용문사도

 

있잖아!…언제 갈까?”

 

경미의 강력한 제안에 날짜는 못 잡았지만 함께 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은미는 이런 사태도 염려했었다. 그 일행 중에 그 사람도 함께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럴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그려봤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오늘 이곳에 없다. 누구도 그 사람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모처럼의 만남이기에 자연스럽게 은미는 관심의 중심에 섰다.

 

초전엔 은미에게 질문이 집중됐지만 술이 돌기 시작하면서 겨우 화제의 중심에서 비껴 날 수 있었다. 동욱의 결혼이야기, 문숙이 조카 이야기, 정모 어머니 병환 이야기로 돌고 돌다 각자 회사 이야기까지 돌도록 그 사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은미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줄곧 주변을 둘러보고 출입구를 살피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곤 정색을 했다.

 

‘내가!…내가, 왜? 이러지?’

 

모처럼의 술은 마음을 야릇하게 이끌면서 경계를 무디게 했다. 묻고 싶어졌다. 그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차마 묻지 못했다. 묻지 못하는 대신 술을 더 마셨다. 한 잔, 한 잔, 하다가 문득, 묻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냈다. 그리곤 기어이 술의 능력으로 태연히 지나치듯 묻고야 말았다.

 

“근데,… 강우선배는 왜? 안보여?”

 

아주 잠깐의 정적이 있은 후, 들려온 말

 

“아아! 강우선배, 출장!… 지금쯤 중국에 있을 걸”

 

너무나 쉽게 나온 정모의 대답, 그뿐이었다.

 

은미는 허탈했다.

 

경미의 닦달에 못 이기는 체하며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날부터,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초조의 강도는 심해졌었고, 그리고 오늘 지금 이 순간까지 이토록 초조하게 한 그 장본인이 중국에 가 있을 거라니, 기가차고 맥이 풀렸다.

 

허탈해서인지, 허탈감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맥락 없이 술이 잘도 넘어갔다.

 

“은미씨! 못 본 사이에 술 많이 늘었네,…오늘 술값 좀 나오겠는데”

 

동욱이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따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게,…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냐?”

 

“그동안 술 마실 일이 없어서, 술을 굶었나?… 적당히 마셔!”

 

“야! 천천히 마셔! 꼭 실연한 애같이 마시네,…여주까지 어떻게 갈려고”

 

정혜도 지은이도 문숙이도 한마디씩 했다.

 

“은미,…오늘 우리 집에서 잘 거니까 괜찮아!… 그래도… 은미야! 좀 천천히 마셔라,”

 

역시 경미는 은미의 든든한 보호자다.

 

이제 강우는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된다. 새삼스레 친구들 하나하나가 다감하게 느껴졌다.

 

편안했다. 이들을 긴 시간동안 멀리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 술의 힘으로 투정도 부리고 허세도 부리며 마음껏 풀어헤쳤다.

 

모처럼 느끼는 수다의 행복은 그들과 일원이 되었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행복했다. 술잔을 부딪치며, 옛날 누군가를 궁금해 하며, 또 누군가를 난도질하며 행복했다.

 

떠들썩하고 끈적이는 작별의식도 행복했고, 헤어진 후 경미네 집에서 경미 엄마에게 “엄마, 엄마” 하며 응석주정을 부릴 때까지 내내 행복했다.

 

카페엔 진즉 햇빛이 도착했는데 강은 아직 물안개를 다 걷어내지 못하고 이제 막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래된 다리위엔 아침마다 늘 그렇듯 정체된 자동차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다.

 

영업 준비를 끝내고 토스트 두 장과 오렌지 주스로 늦은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아래 쪽 주차장에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와 주차를 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차문이 열리며 눈에 익은 남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천천히 주차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잠시 후, 또 다른 승용차가 들어오고 역시 눈에 익은 남자가 내리자 둘은 악수를 하곤 바로 산성길을 함께 올라오고 있다.

 

은미는 탁자의 컵을 들고 일어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엔 저들은 늘 그랬듯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다,

 

은미는 표정 없이 그들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들이 산성 오름길에서 카페 갈림길 입구에 다 달았을 때 은미는 아연했다.

 

그 둘은 카페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지나쳐 산성 쪽으로 올라갔다.

 

‘어? 웬일이지?…그냥 가네!’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뭔 일이지?…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데크 바닥을 울리는 요란한 발소리에 이어 두 사람이 카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은미씨!… 우리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죠? 하하하!…”

 

“그러게요.… 웬일인가 했어요. 그냥 지나 가시 길래…“

 

“하하하! 아! 이 박 선생이 은미씨 한번 놀려 먹자고해서…하하하!”

 

“아이고 참…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 하고 반성까지 했어요. 호호호!

 

은미도 크게 웃었다.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박 선생과 송 선생은 명예 퇴직한 실업자들이다, 아직 육십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할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이곳 산성 위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정상에서 우연히 별 뜻 없는 짧은 대화가 있었는데, 그 후 각자 내려가다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씩을 주문하고 눈이 마주치자 거의 동시에 눈인사를 하게 되고 마음이 동해 통성명을 함으로써 알게 되었는데 금세 같은 처지인 것을 알게 되면서 바로 친구가 된 사이였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두 사람은 매일아침 아내의 눈총을 피해 마치 중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집을 나선 후 이곳 주차장에서 만나,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씩을 마신 후 차 한대는 그대로 주차장에 두고 한 대의 차로 함께 움직이며 온 하루를 함께 보내는 사이로 나이도 몸집도 비슷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그들로서는 오늘 하루의 시작을 짓궂은 장난으로 은미를 웃게 만듦으로서 자신들의 재치가 제대로 먹힌 행복한 출발이다.

 

내친김에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지난밤에 있었던 손흥민의 멀티 골을 찬양하며 은미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려 애를 썼는데 그 일도 결국 성공했다.

 

“손흥민이 축구를 잘 하긴 하나 봐요?”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알고 있는 축구세계의 이야기들을 분출시키기엔 충분했다,

 

두 사람은 축구전문용어나 데이터 등을 인용하며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한사람의 열정이 뿜어지고 있을 때 또 다른 한사람은 어느 순간에 뛰어들 것인가를 노리는 머릿속 움직임이 그의 눈빛과 입술에서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출되어 은미를 빙긋이 웃게 만들었다. 은미의 관심은 축구가 아니라 관심 끌기에 몰두하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요 집요함이요. 허허로움이었다. 은미는 많이 웃어주려고 했고. 실제로 많이 웃었다.

 

갈 곳 없고, 할 것 없는 그들의 몸부림에 공감하려고 관심을 보이며 웃어주었다.

 

박 선생, 송 선생, 오늘은 성공이다. 좋은 하루가 될 것이다.

 

물안개가 걷힌 강은 쏟아지는 햇빛을 맞아 수많은 작은 반사경이 되어 반짝이며 이쪽으로 흐르는지 저쪽으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흐름으로 그곳에 머물러있다.

 

강 왼쪽에 하얀 점으로 보이는 것은 백로다. 언젠가 산책 중 그 자리에서 보았던 백로, 청승맞은 모습으로 하염없이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 놈, 멀리서 그놈을 발견했을 때 왜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보았던지, 한참 후 몇 발짝 다가가자 화들짝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힘겹게 겨우 날아가던 그놈, 늘 혼자 그곳을 지키는 외롭고 배고픈 백로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청승맞은 모습으로 물속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무심히 강을 내려다보며 은미는 아무 근심걱정 없고 바랄 것 없는 지금, 이 삶에 나른한 행복감을 느꼈다, 좀 무료하긴 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휴대폰 진동이 인다. 의외감에 잠시 망설였지만 화면에 뜬 김경미 이름에 반가움이 확 밀려왔다.

 

“어! 경미야!”

 

“은미야! 나야!”

 

두 목소리가 똑 같이 반가움에 호들갑스럽다.

 

“그래! 경미야 잘 지냈어?”

 

“응, 그래, 은미야! 우리 다음 주 토요일 너한테 가기로 했어”

 

“다음 주?”

 

“응, 다음 주 토요일,…아침 아홉시에 만나서 가기로 했으니까, 거기가면 열시 반 쯤 되지

 

않을까? 괜찮지?”

 

“몇 명이나?…누구누구?”

 

“으응,…그때 모였던 여섯 명 다 간대,…아! 그리고 강우 선배는 잘하면 갈 것 같고… 일이

 

어떻게 될 줄 모르겠다고…그때 돼 봐야 아는데 가급적이면 가는 방향으로 해보겠다고…“

 

“으응, 그랬구나,…어떻게 다들 시간을 맞췄네.…다음 주 토요일이면 19일이네”

 

은미는 대꾸를 하면서도 강우를 떠올렸고, 잔잔하던 뇌수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후의 대화는 은미에게 온전하게 와 닿지 않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았지만 그런대로 큰 차질 없이 이어졌다.

 

김경미 엄마는 이은미에게도 엄마라며, 명랑하게 엄마 안부를 물으면서도 출렁거렸다.

 

파사산성을 얘기하고 세종대왕 능과 신륵사를 얘기하면서도 출렁거림을 멈출 수 없었다.

 

근 10여분동안 말잔치를 벌리는 내내 출렁거렸고, 천서리 막국수 얘기를 끝으로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여전했다.

 

김강우, 은미에게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애끓는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게 했던 사람이다. 오랫동안 꿈을 꾸게 했고 기다렸던 사람, 그러나 정작 첫 데이트에서 그가 은미의 양 볼을 감싸 잡고 입을 맞추었을 때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치며 “미쳤나봐” 라고 중얼거리며 되돌아 종종걸음을 쳤었다. 그 순간, 기껏 튀어나온 말이 “미쳤나봐”라니, 예고 없이 당한 기습 키스이긴 하지만, 뒤돌아 종종걸음을 칠 때부터, 이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는데, 그대로 둑길을 내려와 집까지 와 버렸었다.

 

얼마나, 얼마나 후회했던가? 왜?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가? 아니 가만히 있기만 했었어도,― 얼마나 가슴을 치며 자책했던가? 곧 대학생이 될 신분이었고, 알건 알만한 나이였는데 그런 순간을 전혀 예상 못하고 있었다니,

 

자신의 반응에 놀란 강우의 난감한 표정을 언뜻 보았었다, 찰나의 표정이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되는 첫 사랑의 어처구니없는 엔딩 장면,

 

짝사랑이 사랑으로 이뤄지려는 순간, 어처구니없이 팽개쳐져 버린 그 장면은 지금껏 가슴을 짓이겨 사무치는 한으로 남아있다. 더구나 그 일이 있은 후 강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라니, 은미 자신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피하게 되는 상황이 한심하고 못 견디게 안타까웠다. 달려가 그를 붙들고 그날 일들은 나의진심이 아니었다고, 당황해서 그랬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오래전부터 사랑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 못했다. 끝끝내 못했다. 끝끝내.

 

가로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날이 갈수록 마음속 갈망도 커져 갔지만 못했다.

 

몇 번인가는 절호의 기회가 만들어졌을 때도 강우가 또는, 은미 자신이 기어이 딴청을 쳤다. 또 몇 번인가는 교회에서 자신이 강우를 훔쳐보듯이 강우도 자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다가 그중 몇 번은 눈길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를 만난다 해도 그의 앞에서 그때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잘못 튀어 나온 것이고 사실은 오빠를 사모하고 있다고 조곤조곤 설명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교회 청년부의 다른 부원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몇몇은 눈치를 챈 것 같기도 해서 더더욱 난감했다.

 

교회를 ‘옮겨야 하나’ 하고 고심할 때쯤 강우네가 이사를 간다는 소식이 들렸다.

 

철렁했다. 조바심이 났다. 이제는 정말 만나야 한다고 자신에게 몇 번씩이나 다짐을 했다.

 

거의 매일 밤 꿈속에서도 다짐을 했으나 꿈속에조차 그 다짐은 성공하지 못했다.

 

헛날들이 지나가고 드디어 이사 간다는 날 천 번 쯤 망설망설 하다가 끝내 찾아가지 못했고 혹시 마지막 인사 겸 찾아오진 않을까 기대했으나 역시 헛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은미의 첫사랑은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은미는 대학을 다니며 두 번의 연애를 했지만 깊이 빠져들지 못했다.

 

첫 번째 상대였던 김준호는 은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허락을 받기까지 애를 먹었다.

 

은미는 준호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첫 데이트 하던 날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며 준호가 손을 잡았을 때 바로 손을 뺐다

 

그 작은 접촉이 은미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어색하고 신경이 쓰여 연극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준호는 은미가 수줍어서 그런 것이라고 판단하고 은밀하고 자연스럽게 다시 시도해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은미는 또 자신의 손을 당겨 가져갔다. 준호도 어색하기는 했지만 연극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용기를 내어 다시 손을 잡았다. 이번엔 조금 더 지체했지만 땀이 밴 준호 손에서 은미 손은 기어이 빠져 나갔다.

 

준호는 뻘쭘했지만 자신이 너무 서두른 탓이라고 생각했고 미안한 내색까지 보였다.

 

극장을 나와 저녁식사 자리까지 어색함은 계속됐고 하우스 와인을 받아든 은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미안해!…내가 좀 재미없지?… 건배해”

 

준호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사과할게…건배”

 

겨우 여느 연인들의 첫 데이트 같이 어색하지만 즐거운 듯이 아슬아슬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은미는 최선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말하고 듣고 행동하려했지만 그럴수록 손을 어찌해야 할지, 어디다 눈길을 두어야 할지, 도무지 자유롭지가 못했다.

 

그런 은미를 대하는 준호도 덩달아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지고 빤히 쳐다보던 준호의 느닷없는 한마디에 상황은 더 꼬였다.

 

“은미씨!, 예뻐요”

 

은미는 당황했다.

 

“어머!… 왜?”

 

은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도 고개를 숙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짠데…진짜 이뻐!”

 

준호는 그토록 수줍어하는 은미가 순진해보이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은미는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예쁘다는 칭찬과 함께 손이 다가와 머리나 얼굴을 만지려하면 질색을 하며 피했고 소름이 돋도록 무서워했다.. 언젠가 부터는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아예 뒷걸음을 쳐 자리를 피했고, 또 언젠가 부터는 예쁘다는 말조차도 좋게 인식되지 않았다.

 

첫 데이트의 긴 시간을 근근이 보내고 지하철역 안에서 헤어질 때 준호가 책을 내밀었다.

 

“오늘 즐거웠어,…우리의 인연을 생각해서 이 책을 골랐어,”

 

“고마워, …어떡하지? 난 그냥 왔는데”

 

“괜찮아,… 다음에 우리 또 만나는 거지?”

 

“응…그래야지…오늘 나 때문에 재미없었지?”

 

“아냐! …처음이니까…나도 그런데 뭐”

 

은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둘은 잠시 손을 잡고 하루의 어색함을 날려버렸다.

 

집에 와 준호가 준 책 포장을 벗기고 표지를 보니 피천득의 ‘인연’ 이었다.

 

준호와의 만남은 반년정도 지속됐다.

 

매주 한번이나 두 번, 때로는 세 번을 만난 적도 있었지만 상황은 진척되지 않았다.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탁자를 마주하고 있을 때의 은미와 준호가 옆자리로 와 앉았을 때의 은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주앉았을 땐 보통의 연인같이 자연스럽고 다정했지만 준호가 옆자리로 오면 은미는 불안 증세를 보였고 잠시 후에는 발딱 일어나 맞은편으로 옮겨 앉았다. 몇 번을 거푸 그렇게 당하자 준호가 참지 못하고 낮은 톤으로 경고했다.

 

“내가…그렇게 싫은 거야?…그러면 왜? 날 만나는 거지?…그만 만날까?”

 

“미안해,…나 좀 이상하지? 나한테 문제가 많은가봐”

 

마지못해 미안해하고 잘못을 인정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만남은 거듭됐지만 반년 동안 내내 포옹은커녕 손을 잡아본 것도 불과 몇 번뿐이고 그나마도 잠시뿐이며 기어이 은미의 손은 빠져나갔다. 그 지경이 되자 오히려 준호가 전전긍긍하며 고심을 하게 되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만남이 뜸해지고 마침내 준호가 이별을 고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은미는 서운했다.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은미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서운했다.

 

준호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과 닫혀있는 자신 때문에 어설프게 끝장났음을 괴로워했다.

 

상처는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남자를 만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 후 몇몇 남자로부터 대시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다. 자신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피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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