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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서리처지도록 두려웠었던 그 때 그 일

이헌영 소설가 l 기사입력 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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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헌영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제1장 애인 있어요-중

 

은미에게 두 번째 연애는 졸업직전에 다가왔다.

 

두 번째 남자 지영근은 은미의 결벽증 증세를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적극적이되 절대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았다.

 

말끔한 외모에 늘 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다가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거절을 웃으며 받아들였고 얼마 후엔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데이트를 신청했다.

 

은미는 영근의 생경한 행동에 닳고 닳은 바람둥이 같은 느낌을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결벽 증세를 극복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 상태라면 영영 연애는 물론 결혼도 못한 채 아까운 청춘을 다보내고 후회만이 남을 것 같다는 초조감에 마음이 움직였다.

 

영근의 깨끗한 피부와 웃음을 머금은 듯한 눈은 처음의 경계심을 낮아지게 했고 호기심은 커져갔다. 몇 번의 대면에서 받은 인상은 점차 좋은 쪽으로 발전해갔다.

 

다음 데이트 신청엔 응 하리라 마음을 굳히고 기다렸다.

 

거의 한 달 만에 나타난 영근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데이트를 신청했고 은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첫 데이트는 청운동 자하문 옆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을 시작으로, 주변을 산책하고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관람으로 이어졌다. 초행인 은미를 영근은 이리저리 안내는 했지만, 장소에 대한 설명이나 작품해설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어쩌다 은미가 질문을 하면 그때는 성의껏 답변을 했다.

 

원래 윤동주 문학관 건물은 높은 곳에 만들어.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도 가압장이었었다는데 그 건물 같지도 않은 건물에 문학관을 만든 아이디어에 은미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제2전시실에서는 충격을 넘어 황당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제3전시실의 밀폐된 어둠속의 영상을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귀신이 등장할 것만 같은 으스스 한 제3전시실을 영근은 은미에게 혼자 들어가라며 자신은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해서 묘한 느낌을 받으며 다른 관람객 3명과 함께 거창한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고 같기도 하고, 창 없는 감옥 같기도 한, 을씨년스러운 방 가운데에 터무니없이 작은 꼬마걸상 몇 개가 놓여있었다. 꼬마 걸상에 앉아 어둠속에서 15분정도의 영상을 보고 문학관을 나와 시인의 동산을 거닐며 생각했다,

 

그 어둠속에 영근과 함께였다면, 그가 손을 잡지 않았을까하는 생각과, 그러면 나는 어떻게 처신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묘하게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허전했다.

 

서울미술관을 통해 석파정에 올라 둘러보며, 서울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고, 흥선대원군이 탐낼만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호가 흥선이 아니라 석파였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오래된 한옥 건물 밖 갓 마당의 엄청난 몸통의 노송은 사방으로 뻗은 우람한 가지들을 여러 개의 철 기둥으로 받혀놓았는데 크고 진기한 모습에 관람객들을 한참 머물게 했다.

 

옛날 선비들이 노닐던 정원은 나름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고, 멀리 맞은편 능선을 따라 축조된 한양도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묘함도 갖추고 있었다. 석파정을 다 돌아보고 미술관의 모든 관람을 끝냈을 때, 다른 세상에서 하루를 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첫 데이트 장소로 정한 영근의 외모가 더 귀티나 보였다.

 

“영근씨! 오늘 아주 좋았어요. 딴 세상을 본 것 같았어요.”

 

“아! 그래요.…좋았다니 다행이네요. 사실 좀 걱정했어요.”

 

“왜요?”

 

“은미씨 분위기와 잘 맞을 것 같아서 이 코스를 택했는데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다 좋았어요.…석파정이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가장 쇼킹했던 것은 문학관 3전시실…그런 곳에서…처음엔 좀 으스스 했어요. 나중엔 감동해서 울 뻔 했어요.”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그 영상을 보면서 1전시실에서 읽은 참회록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아! 그래요. 창씨 개명할 때 얼마나 괴로웠으면…”

 

은미는 오전에 지영근을 만나러 오면서 준호 생각을 했었다. 염치없는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고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영근을 만나고 함께하는 동안에도 간간이 준호를 떠올리고 곤혹스러웠으나, 차츰 빈도는 낮아져 갔고 저녁이 되면서는 거의 벗어날 수 있었다.

 

하루를 함께 하면서 영근에 대한 경계심은 많이 사라지고, 대신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비싸지 않은 한정식으로 저녁식사를 주문하면서, 술을 시키지 않는 것도 좋은 쪽으로 인식되었다. 준호와의 저녁은 의례히 술을 먼저 시키고 식사는 하지 않거나 나중이었다.

 

끝내 술을 하지 않은 영근과의 첫 데이트는 예상보다 깔끔했고 풍요로웠다.

 

지하철역에서 영근이 리본포장까지 된 책을 내밀며 말했다.

 

“은미씨 오늘 첫 만남이…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고마워요. 나는 준비를 못했는데…”

 

책을 받으면서, 준호와의 장면이 연상되어 당황스러웠다.

 

은미가 지하철을 타고 떠날 때까지 영근은 그 자리를 지키며 손 인사를 했다.

 

은미는 방금 헤어진 영근이 모습을 그리며, 흐뭇한 마음을 간직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 포장부터 뜯었다.

 

놀랍게도 눈에 익은 그 책, 피천득의 ‘인연’ 이었다.

 

혼란스러웠다. ‘어찌 이럴 수가?’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좋았다고 느꼈던 첫 데이트의 모든 순간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닳고 닳은 선수 같았던 처음의 그 느낌이 옳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했다.

 

두 번 다시 데이트에 응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한방 먹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냥 끝내기에는 은미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았다.

 

은미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커피 주문을 하고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영근씨! 지난번 그 책… 어떻게 그 책을 선택한 거지요?”

 

“예? 왜요? 무슨…내용이 안 좋아요?”

 

“그게 아니고…그 책 읽어봤어요?”

 

“물론이죠, 그럼 읽어보지도 않고 선택하겠어요?…아! 내용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인연이

 

아니라서 그래요?”

 

“아니! 그게 아니라 …”

 

“그럼…다른 거로 바꿔 줄까요?”

 

영근의 진지한 물음에 은미는 망설여졌다.

 

마침 진동 벨이 울렸다. 영근이 커피를 받으러 간 사이 잠깐의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결론은 같았다. 직격탄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

 

영근이 커피를 갖고 와 의자에 앉자마자 바로 직격탄을 날렸다.

 

“영근씨! …남자들이 여자를 처음 만나면 피천득의 ‘인연’을 선물하는 게 유행인가요?”

 

“아!…누가 또 그 책을 받았대요?”

 

“누가가 아니고, 내가 전에…”

 

“아!… 그랬어요? 그랬구나, 와! 그럼 엄청 황당했겠네요.”

 

“준호 아세요? 김준호,”

 

“김준호? 모르는데…그 사람한테 그 책을 받았던 겁니까?”

 

“네, 전 남자친구인데요. 첫 데이트 날 받았었는데 또 …이게 유행입니까?”

 

영근은 잠시 은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 던졌다.

 

“은미씨!…우리 말 놓읍시다, 불편해요”

 

“예?…그래요? 그럼 그래요.”

 

은미는 별 의미는 못 느꼈지만 그래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동의했다.

 

“됐어요. 그럼 그 책에 대해서 해명을 해볼게…그 책은 내가 고등학교 때 읽고 학교 독서 모임에서 발표도 하고 추천도 했던 책이고 거기에 나오는 어린 아사꼬 같이 순수한 여인을 만나면 주어야겠다고 그때 이미 정해놓은 책이야, 나는 지난여름부터 은미를 지켜보았고, 몇 번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할 때도 거절이 아니라 사양하는 걸로 느껴져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쁘게 기다릴 수 있었어. 전 남자친구에게서 그 책을 받았었다니 나도 당황스럽긴 한데 그만큼 좋은 책이란 뜻이 되지 않나?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지만, 하긴 그렇게 밋밋하면서도 감동을 주는…서정적이고 섬세한 책도 없지. 수필의 힘이 느껴지는… 책을 주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내용을 확인하고 준건데 그렇게 됐다니 나도 당황스럽긴 한데, 판단은… 그쪽이 해야겠지”

 

그날 은미는 처음 키스라는 걸 했다.

 

망설임은 있었으나 은미는 용기를 내어 해내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벽은 영근의 노력이 아닌 은미의 노력에 의해 무너졌다.

 

자신에게 책을 선물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었다는 대목과 진중하고 망설임이 없는 해명이 그를 믿음으로 이끌었다. 진정성이 느껴졌다.

 

몇 번의 거절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움츠림을 넘어 무언가는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먼저 팔짱을 꼈다.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그래야 된다고 자신을 다그쳤다.

 

과천 현대미술관을 관람하는 내내 오래된 연인처럼 손을 잡거나 팔짱을 꼈다.

 

처음엔 오히려 영근이 당황하는 기색이었으나 곧 적응을 했고 곧바로 진짜 오래된 연인이 되었다. 처음 팔짱을 끼고 손을 잡을 때가 어려웠지 일단 단행하고 나니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팔짱 낌을 당했을 때와 팔짱 낌을 해냈을 때의 차이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결코 접촉성 불안증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는 자긍심이 생겨났다. 미술관을 나와 야외 조각공원을 거닐다 사람이 없고 조금은 은밀한 곳에 이르렀을 때, 은미는 팔짱을 낀 채 영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영근은 잠시 망설였으나 은미가 눈을 감자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짧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길고 깊은 키스로 이어갔다.

 

은미는 첫 순간, 영근 입술의 감촉과 함께 결코 좋다고 할 수없는 구릿한 입 냄새와 콧바람에 당혹했으나, 곧이어 바로 감촉에 적응돼 가는 자신을 느끼며, 자신이 지금 첫 키스의 느낌을 알려고 집중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은미는 곧이어 자신의 몸과 영근의 몸이 반응하는 것을 똑똑히 느꼈다. 이젠 은미의 손은 영근의 허리를 안아 당기고 있었고 영근은 은미의 어깨를 푹 감싸 안은 채 조그맣게, 조그맣게 만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점점 은미는 자신의 입술과 자신을 지탱하는 모든 기관이 타의에 의해 조절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황홀했다,

 

얼마만큼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남자의 품속과 키스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준호 얼굴과 강우 얼굴이 엇갈리며, 스치듯 떠오르다 사라졌다.

 

다음 순간 쑥스러움이 밀려와서, 손을 잡힌 채 돌아서 땅 밑을 내려다보며 방금 전의 일을 되감기하고 있을 때, 영근이 은근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미씨! 처음이야?…이거 처음 해보는 거야?”

 

은미는 대답을 못했다. 당혹스러웠다.

 

“정말인가보네. 정말 오늘 처음 …내가 처음, 첫 상대란 거네. 그래?”

 

은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근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은미의 손을 덥석 잡아끌며 말했다.

 

“은미야! 가자! 밥 먹자. 밥 먹으러 가자!”

 

영근은 큰일이라도 해낸 사람같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은미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은밀하게

 

외치듯 속삭였다.

 

“밥 먹으러 가자”

 

한 순간에 변해버린 상황에 은미는 얼떨떨했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때만해도 만남을 일찌감치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준수한 외모인데다 데이트요청을 연달아 거절당하면서도 별로 실망하지 않는다든가, 윤동주문학관이나 석파정 등의 코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책, [인연]을 선물로 선택한 것 등이 모두 ‘선수였구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했었다.

 

거의 확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끝장내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가 한없이 믿음직해져 있다,

 

헤어지기 싫었다. 시간이 야속했다.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겠지’

 

지하철 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영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가락을 들어 꼬무락거렸다.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영근을 생각하다가, 아주 잠시 준호와 강우 생각이 났으나 다시 영근과의 포옹과 키스 느낌이 되살아나 짜릿한 행복감에 젖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을 상상하게 돼 몸이 떨리도록 짜릿함으로 이어졌다.

 

잠자리에서도 그 순간의 그 느낌이 휘감겨왔고, 그다음을 상상하다가 온몸이 떨려 와서 잠을 이루지 못해 몇 번씩이나 뒤척이다 바짝 웅크리곤 겨우 잠이 들었다.

 

새 아침이 왔을 때,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설레는 상상은 수시로 일어났고, 상상은 그다음 상상을 일으켰고, 덧없이 부풀어졌다.

 

부풀어진만큼 갈증이 일어났고, 갈증을 해소하기위한 만남이 애타게 기다려졌다.

 

세 번째 만났을 때, 그리고 네 번째 만났을 때, 격한 포옹과 지독한 키스에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짜릿했으나, 갈증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끝을 향해 달리고 싶은 욕망에 휘둘렸다. 갈급했다. 기다림으로 갈증은 더해갔고 한편으론 자신의 상태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다섯 번째 만나 격한 키스에 이는 포옹 중에 영근이 은미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모텔 갈까?”

 

은미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들어온 모텔방의 낯설음에, 은미는 적잖이 당혹했다.

 

머릿속에 그려왔던 것과는 너무 달랐고, 다른 것의 원인은 대체적으로 추레함과 묘한 냄새였다. 한쪽에 붙여져 있는 침대에 덩그마니 개켜져 있는 이불이며 베개도 왠지 청결과는 멀어보였다. 하얀 침대시트엔 흐릿하긴 했지만 얼룩을 지운 듯한 자국도 보였다. 작은 창은 열려져 있었지만 답답했고, 눅눅한 방에 방향제를 뿌렸는지, 야릇한 냄새까지 더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사랑을 나누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은미는 암담했다.

 

‘냄새 아! 이 냄새’

 

뛰쳐나가고 싶었다. 망연자실한 은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방도 그대로 멘 채 엉거주춤 거렸다.

 

은미의 낙담한 표정을 눈치 챈 영근은 상황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초조함이었는지 엉거주춤 서있는 은미에게 곧바로 다가와 가방을 벗겨내려 놓고 끌어안았다.

 

은미는 환경에 적응할 수도 없어 당황했으나, 영근의 익숙한 포옹과 뜨거운 입술에 조금씩 녹아들었고, 얼마 후엔 이내 모든 것을 잊고 뜨겁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과는 다른 영근이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은미의 뜨거운 반응을 확인한 영근은 더욱 거칠게 공세를 퍼부었다. 입술에 입술을 붙인 채 두 손이 아래위 가리지 않고 마구 헤집고 다녔다.

 

한참 열중하던 영근이 입술을 떼더니 느닷없이 은미를 밑으로부터 번쩍 들어 안고 침대로 가 눕히곤 덮쳐왔다.

 

그리곤 왼쪽 팔을 은미의 목을 안고 입술을 유린하며 오른손은 가슴을 더듬다가 밑으로 내려가 상의 속으로 밀어 넣어 브래지어를 올리고 맨 가슴을 움켜잡았다. 곧이어 영근의 입술은 은미의 위로 올라와 입술과 목덜미에서 헤매다 가슴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 거친 몸짓. 땀투성이의 머리칼, 그리고 그 머리통에서 나는 시큼한 냄새, 지금까지의 영근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은미의 머릿속에 날카롭게 솟구치는 기억 한 조각- 기억저편에 숨겨져 있던 - 몸서리처지도록 두려웠었던 그때 그일- 그 일이, 바로 그 순간에 솟구치듯 피어났다.

 

‘아! 맞아! …그때도…그때도 이랬어! 맞아!’

 

다음 순간, 지금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자를 확인해야 했다.

 

‘누구?… 이게?’

 

곧이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두 손이 필사적으로 뻗어나가 위에 있는 자의 얼굴을 잡아당겨, 확인했다. 

 

범벅이 된 번들번들한 얼굴, 부릅뜬 눈, 거친 숨소리, 역겨운 냄새, 눅눅한 공기.― 그 놈이다. 무서웠다. 공포에 질려 울지도 못했었다. 겨우겨우 울음을 밀어냈을 때 입이 콱 막혀왔었다. 숨이 안 쉬어졌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기억의 흔적이 없다.

 

‘벗어나야 한다! 또 당할 순 없다’

 

혼신을 다해 앞에 있는 놈의 가슴을 힘껏 밀치며 몸을 틀었다.

 

놈은 잠시 주춤했으나 의례적인 것으로 판단했는지 더욱 뜨겁게 돌진해 왔다.

 

영근의 반격에 은미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가슴을 밀고 엉덩이를 비틀며 쇳소리가 나도록 악을 썼다.

 

“놔! …이 새끼야! 놔…!”

 

순간 영근의 몸짓이 멈춰졌고 은미는 영근을 힘껏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지체 없이 옷과 땀에 젖은 머리칼을 동시에 매만지며 가방을 챙겼다.

 

영근은 땀투성이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왜 그래?…왜…?”

 

은미는 대답 없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은미의 두 번째 연애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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