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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공산주의를 몰랐기 때문에 중국혁명의 최후승자가 됐다!

강효백 박사 l 기사입력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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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모택동)     ©중국 사진 자료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으레 중국하면 빨간 칠을 해놓고 ‘주의’를 붙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의 이상적 형태, 이하 ‘공산주의’로 통칭) 중국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런 붉은 중국이 외환보유고, 미국국채보유고, 수출총액, 에너지생산량 등등 각종 (자본주의적) 경제지표에서 세계 1위를 차지, 자본주의 대표국가 미국을 추월하며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니.

 

옛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 등 맑스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체제는 초장에는 일사불란하게 효율적으로 잘 나가는 것 같이 보이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급격히 붕괴하는 ‘서든 대스’ 현상을 보여 왔는데, 중국 붕괴론, 중국 분열론, 중국 거품론 등등 서방세계의 저주에 가까운 예상을 깨뜨리며 저 이른바 ‘좌빨 원조 대국 중국’은 좀처럼 죽거나 쪼개지지 않고 마치 빅뱅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한 팽창하고 있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필자는 감히 원초적 의문을 몇 가지 던져보기로 한다. 중국의 공산주의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속살까지 빨간색일까, 혹시 겉만 빨간색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반만년 생래적 자본주의자 비단 장사 왕서방인 중국인, 그들이 공산주의를 과연 뭐 하는데 쓰는 것으로 알고 있을까? 오늘의 공산중국 초대 황제 마오쩌둥이 동양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난해한 맑스 공산주의 따위의 참의미를 알았을까, 아니 알 필요조차 있었을까? 마오의 필생의 역사적 멘토(mento, 인생 길잡이) 또는 롤모델은 과연 누구였을까? 

 

마오는 맑스를 알았을까?

 

마오동지 당신은 주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손자병법 뿐이오.”

 

이 말은 마오쩌둥이 1935년 1월 대장정 중에 거행된 준의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첫 등극하게 되었을 때, 소련 유학을 갔다온 중국공산당의 이론가 한 사람이 내뱉은 비난의 한마디이다. 그 비난이 시사해주는 바는 매우 크다. 만약 마오가 맑스를 이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설적으로 말해 그는 맑스 공산주의를 잘 몰랐고 중국의 시간(역사)과 공간(지리), 즉 중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중국혁명의 최후승리자가 되었다. 

 

비록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해외유학은 커녕 대륙을 석권하기까지 단 한 번도 중국땅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중국판 신토불이, 토종 혁명가인 마오가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에 뿌리를 둔 맑스의 난해한 이론을 이해하기란, 마치 서양인이 동양고전 <주역>에 녹아든 동양의 우주적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사유의 심오한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것처럼 극도로 어려운, 실제로는 지극히 불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1918년 무렵 베이징 도서관 열람실에서 한 사서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꿈꾸는 듯한 커다란 눈, 넓은 이마와 단정히 빗은 머리카락, 그리고 감각적인 입에 매력적인 미소를 지닌 여성과 흡사한 미남청년, 후일 공산 중국의 황제로 등극하는 청년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후일 마오는 그의 사서시절 베이징 도서관 장서의 절반 이상을 뒤지며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그의 영혼을 흡인시킬 수 있는 책은 주로 수호전, 삼국지연의, 홍루몽, 사기, 한서, 정관정요, 자치통감, 25사, 중국지리와 세계지리 관련서적 등 주로 중국 고전과 역사지리서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 경제무역 회계학 관련 서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오쩌둥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하버드 대학 로스 테릴(Ross Terrill) 교수도 그의 저서 에서 마오의 독서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오는 독서광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드골을 뛰어넘는, 20세기 세계지도자 중 제일의 독서가이자 저술가였다. 특히 역사와 지리방면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독서광이었으나 과학기술이나 경제경영, 서구의 정치사상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포함한 서구의 정치사상서적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마오는 공산주의 경전 <자본론>을 읽지 않았다. 

 

비단 사서시절뿐만 아니라, 마오는 평생 한 번도 마선생(馬先生·중국인이 맑스를 지칭하는 말)과 마음을 열어놓고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이 말은 맑스가 대영제국 의회도서관에서 18년 동안의 장구한 세월을 기울이며 186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펴낸 <자본론 Das Kapital> 원문은 물론, 1872년 러시아판, 20세기 초반에 나온 영문판, 일문판은 커녕 중문본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본론은 기독교인의 성경과 같은 근본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읽지 않은 자를 참된 기독교도라고 할 수 없듯, 공산주의의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론을 본적이 없는 마오쩌둥을 이제껏 동방의 공산주의 수괴로 지칭해왔다. 

 

하도 난해하고 방대해 웬만한 서구의 지식인이 읽기에도 힘든 거작 자본론이 들어올 만큼 당시 중국의 사정은 그렇게 여유작작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중국 땅에 자본론 중역본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38년 9월 일본세력하의 상하이에서였다. 

 

그것도 궈다리(郭大力)라는 퇴직교사출신이 독문원본이 아닌 영문번역본을 초벌 번역한 것으로 후일 엉터리번역이 많아 1968년에 재번역한 것이다. 오리지널 독문 자본론을 직접 중문으로 완역된 것이 처음으로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본부에 등장한 때는 마오쩌둥 사망 11년 후인 1987년도. 그것마저도 오역 투성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라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 생활에 있어서 마오쩌둥은 매우 불우했다. 마오는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멤버 중의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에 대한 지식은 조악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에서 직접 파견한 고문단이나 소련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배우고 돌아온 소련유학파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는 후난 성 출신의 고집 센 촌뜨기로 경멸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합리적 사유와 근대 이성주의의 한계를 초극하지 못하는 독일의 관념주의보다는 진시황을 비롯한 중국의 황제들과 수호전, 손자병법 등 역사소설과 병법서 속에서 그의 혁명이상과 전략전술, 투쟁재료를 찾아내기에 익숙했다. 마오는 또한 일찍이 농민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데 착안해 농민을 중국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보았다.

 

초기 중국 공산당의 간부들은 거의 소련 유학파 지식인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중국현실과 중국인의 본성에 전혀 맞지 않는, 맑스이론을 주절대는 것에나 능했지 중국의 사회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더구나 중국인의 90%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상황에 대해서는 더군다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진시황을 닮은 카리스마, 통일과 팽창에의 강력한 욕구,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의 진승,오광의 난을 필두로 평등을 혁명이념으로 내걸며 중국의 시공을 수놓은 무수한 농민봉기들, 성공한 혁명사와 실패한 반란사와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역사 지리적 인식, 묵가사상(평등을 주창하여 오늘날의 민주사회주의와 유사), 도가사상(무정부주의, 자급자족적 이상사회 추구)을 위시한 중국의 제자백가사상 그리고 마치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같은 박학다식과 상식이 혼합된 종합체와 중국의 후진 농업환경의 교차지점에서 마오의 능력은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 빛나게 되었다.

 

마오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무한팽창주의자

 

1949년 10월 1일, 만 56세의 마오쩌둥은 그의 서재를 나왔다.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을 선포하고 국기게양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창안지에(長安街)는 인파로 가득 찼다. 마오쩌둥이 탄 전용차량앞에는 탱크 한 대가 길을 열고 있었다. 

 

미제 샤먼 탱크, 일련번호 237438W14. 디트로이트에서 태평양을 건너 상하이항에 상륙한 그 탱크는 마오쩌둥 섬멸을 지원하기 위해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샤먼 237438W14는 ‘자유세계’에서 한 시절을 보냈으나, 이제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텐안먼 광장 앞으로 이어지는 창안지에를 통하여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였다.

 

마오쩌둥은 텐안먼 망루에 올라 외쳤다. “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은 이미 일어섰다. 중화민족은 모욕을 받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로 시작되는 건국 기념사와 국기게양식 축사에서 마오는 단 한 마디도 ‘주의(ism)’나 ‘외국인’을 거론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그 날의 키워드는 중국, 역사, 지리, 국가, 민족 등이었다.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 오성홍기가 게양되었다. 손문이 열었던 푸른 하늘은 감빛 노을로 붉게 물들고 손문이 가리켰던 하얀 태양은 금빛 찬란한 다섯 개의 별로 바뀌었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의식이자 공산 황제의 등극식을 거행하던 날 수많은 중국의 평민백성들의 뇌리에는 무엇이 되살아나고 있었을까? 

 

오랜 과거의 추억이 가까운 과거의 기억보다 오히려 생생하게 떠오르는 노인들처럼 중국인들의 뇌리에는 역사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수한 영웅호걸들의 영상들이 오버랩되며 파노라마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특히 마오의 청년기와 정강산(井岡山)시절의 멘토였던 수호전 양산박의 108영웅들을 이어, 대장정 시기의 멘토였던 명말 유적집단의 총두목 이자성(李自成)이 화면을 반쯤 매운 모습으로 등장했다.(졸저, <협객의 칼 끝에 천하가 춤춘다>, <협객의 나라 중국> 참조 바람) 

 

그런데 파노라마의 맨 끝 부분, 이전의 모든 출연자들을 깡그리 압도할만한 거대한 형상의 캐릭터 하나가 화면을 독점하더니 정지화면으로 고정되었다. 그는 바로 진시황(BC259-BC210). 1936년 공산당통치거점 엔안(延安)시절 이후 1976.9.9 베이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의 마오쩌둥의 최대, 최고, 최후, 역사적 멘토인 진시황이었다. 

 

마오쩌둥의 커밍아웃, ‘나 역시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국 봉건사회의 제일 유명한 황제이다. 나 역시 진시황이다(我也是秦始皇). 린뱌오는 나를 진시황이라고 욕했다. 중국 역사는 두 개 파로 나뉜다. 하나는 친 진시황파, 다른 하나는 반 진시황파. 나는 진시황에 찬성하나 공자는 반대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은 중국을 하나로 통일했고 문자를 통일했고 사통팔달의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나라 속에 나라를 조장하는 지방분권제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중앙에서 임기제 지방관을 파견하여 토호세력의 세습제를 철폐하였다.”

 

이는 80세의 마오쩌둥이 1973년 9월 23일, 이집트 부통령 후세인 알 사페이(Hussein Al-Shafei)를 접견한 공식석상에서 한 발언이다. 참으로 경악스러운 ‘고백’이자 ‘커밍아웃’이었다. 특히 마오를 정통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토종 공산주의자정도로 옹호해왔던 골수 친소파와 극좌파들에게는 초대주석의 봉건황제적 정치지향과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벼락같은 ‘배신의 피날레’였다.

 

마오쩌둥의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1949년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다르다. 신중국 건국 이전 마오는 진승, 오광, 이자성, 홍수전 등 중국사의 농민봉기 지도자들에 대한 어록을 많이 남겼으나 진시황에 대한 언급은 가급적 회피하였고 간혹 거론하더라도 분서갱유 등 부정적 측면만을 유독 강조하였다. 당시 진보적 사상으로 치부되었던 맑스 공산주의를 지도사상으로 하여 조직된 중국공산당, 당 주석이 어찌 함부로 봉건황제를 찬양할 수 있겠는가. 제 아무리 당주석이라 하더라도 반당 반혁명분자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우행으로 판단했으리라.

 

마오쩌둥은 진시황 천하통일 이전의 진나라 판도에 속한 싼시성 일대를 장기점거하면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는 혁명과도기(1936-1949년)에, 아주 자연스럽게 진시황을 자신의 롤모델로 ‘내밀히’ 삼았다. 정강산과 대장정시절에 각각 공개적으로 수호전 108영웅과 이자성을 ‘공개적’으로 롤모델로 삼은 것과는 달리. 

 

혁명과도기에 마오는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무한팽창정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마오 자신의 가치체계로 소화한, 이른바 진시황의 내면화(internalization)를 이루었다고 분석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신중국 건국 이후부터 진시황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공개 발언을 시작하였다. 진시황에 관한 마오의 수많은 발언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마오의 제8기 당중앙회의 2차회의시 (1958년 5월 8일-18일) 어록 한두 구절만 더 들기로 한다. 

 

“진시황은 현실을 중시하여 구습을 혁파하는 일의 전문가였다. (이때 린뱌오가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저질렀다’라며 마오의 발언을 끊고 들어왔다. 잠시 침묵 후) 나 역시 진시황을 인용하는 것에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시황의 분서갱유쯤이야 나에 비하면 새발에 피다. 진시황은 겨우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했지만 우리는 4만 6천명의 유생을 생매장했다. 우리가 혁명을 하면서 무수한 반혁명지식인들을 죽이지 않았나? 언젠가 한 민주파 인사와 논쟁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내가 진시황이라고 욕한다. 그렇다. 나는 진시황이 아니라고 한 번도 부인한적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비난은 너무 부족하다. 더욱 심한 욕설을 해다오, 나 마오쩌둥은 진시황보다 백배 심한 독재자라고.”

 

▲ 강효백 교수.     ©브레이크뉴스

“‘공산주의’, ‘제국주의’등 현재 우리가 밥 먹듯이 쓰고 있는 상용어는 원래 소련이나 미국 영국 등지에서 나온 외래어를 중문으로 번역한 것들이다. 중국인과 외국인이 이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완전히 다르다. 진시황이후 중국인은 외국인을 눈 안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청나라 말엽부터 영국과 소련 등 제국주의세력의 침입으로 중국인은 노예가 되어 버렸다. 과거의 오만이 지금은 굴종으로 변해버렸다. 지금 당내에는 외래품이라면 막무가내로 숭배하는 풍조가 있다. 공산주의, 제국주의 따위의 함의도 알지 못하면서 외래용어들을 아는 채 하는 폐습은 반드시 교정하여야 한다.”

 

위의 마오의 첫 어록에서 알 수 있듯 마오는 진시황의 정체성을 마오 자신의 정체성에 융합시키는 동일시(identification)현상을 노출하고 있다. 급기야는 제2의 분서갱유, 즉 10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2천만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살생부에 생(生)으로 표시된 자 빼놓고는 모두가 타도되었다.

 

자신을 영원한 붉은 태양(紅太陽)으로 부르도록 우상숭배를 음양으로 강요하였다. 죽음을 3년 앞둔 시점 마오 자신 스스로 ‘나 역시 진시황이다.’라는 나쁘게 말하면 심각한 착란현상에 빠지고, 좋게 말하면 ‘만년(晩年)의 진솔한 고백’을 하게 된다. 또한 위에 제시한 두 번째 어록에서 마오가 ‘공산주의’를 서양에서 건너온 ‘외래품’의 일종으로 간주할 정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의외이다.

 

*필자/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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