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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병철 회장의 양아들-박정희 대통령의 비선(祕線)참모 였다!”

인터뷰어/문일석 발행인 l 기사입력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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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지난 5월27일,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와 경기도 양주의 장흥에 위치하는 ‘하늘궁'에서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는 이 인터뷰에서 그간 베일에 싸여 있었던 “이병철 삼성창업자의 양아들이 된 이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선(祕線)참모였다”는 사실들을 직접적인 발언으로 공개했다. 영화 ’빠삐용’은 감옥에 수감된 수감수의 존명(存命)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의 어리시절은 온갖 역경을 딛고 생존(生存)해온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그는 고아로 성장, 비주류 교육과정을 거쳤다. 생사를 넘나드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해서 살아왔다. 살아남기 위해 30여 군데의 직장도 전전(轉傳)했다. 허경영 스토리는, 대한민국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한 ‘빠삐용적 성공스토리’의 하나이다. 아래는 그와의 단독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오늘은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를 모시고 인터뷰를 가지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근년들어, 허경영 대표님의 사회-정치적인 인지도가 매우 높아졌습니다.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허경영 대표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하겠습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2년 간 참전 하셨더라고요. 정치입문 시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선, 고향에서 어떻게 태어나셨고,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지요. 삼성그룹 창업회장인 이병철 회장, 또는 조홍제 효성그룹 전 회장 등이 진주시의 지수초등학교 1회 졸업생들입니다. 저는 지수초등학교 38회입니다. 그 지방에서 재벌이 178명이나 나왔습니다. KBS에 보도된 적도 있었습니다, 

 

-진주 지수, 풍수지리가 아주 좋나요?

 

▲대한민국에선 제일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용이 지리산에서 내려와서 남강을 끼고 우리 마을을 감싸고 있습니다. 경치가 그렇게 좋은 데는 대한민국 아무데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반 학생이 300명인가 그랬어요. 저는 지수 초등학교(국민학교) 38회 졸업생이지요. 이병철 회장은 1회출신이십니다. 

 

열다섯 살에 서울 와서 보니까 서울의 기와집들이 너무 작았어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을 가보니 집들이 코딱지만 했어요. 창덕궁을 가보니, 겨우 우리 고향의 집들만 해요. 

 

부친은 그곳에서 만석꾼 부자였지요. 경상남북도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키가 185cm이니 체격이 좋았지요. 소작농들 한테 그 땅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바람에 33살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았어요. 사상범이 아닌데 왜 사상범으로 몰렸냐? 6.25가 나기 직전, 우리 아버지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다른 소작농들이 도지를 안내는 거예요. 허 아무개는 무료로 땅을 주는데, 너희는 왜 쌀을 받아 가느냐? 이런 이유로 반란이 일어난 거지요. 그게, 종국적으로 여수반란 사건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반란을 선동한 것 마냥, 진주에서 사형, 대구 고등법원에서 사형, 서울 대법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어요. 그래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서울로 면회를 가 중랑교 다리 밑에서 머물게 됐어요. 가마니 움막을 치고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 많이 산고 있었으니, 어머니가 기겁을 한 거지요. 당시, 서울 중랑교에는 전차 노선이 닿아 있었어요. 서울 서대문 형무소가 전차의 종점이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면회를 다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낳았어요. 6.25 사변 발발하기 이틀 전에 사형 선고를 받으셨어요. 애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하냐? 서울에서 낳았으니까 서울을 편안하게 하도록 허락한다, 서울 경자(京) 편안할 영자(寧)로 지으셨어요. 그래서 내 이름이 허경영(許京寧)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지어줬지요. 당시 수감상태인 아버지가 “곧 전쟁이 날거다”라고 말했는데, 어떻게 아느냐 물어보니, 감옥에 빨갱이들이 많이 잡혀있었다 이거 겁니다. 6.25정보를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곧 전쟁이 날거니 빨리 진주로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고향으로 안 돌아갔어요. 안 믿었으니까요. 안 돌아 가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서대문 형무소에를 가게됐어요. 6.25 사변이 발발한 이후 서대문 형무소를 가보니, 죄수들은 하나도 없고 죽은 시체만 쌓였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못 찾고 진주로 돌아가게 되지요. 가는 길에 몇 번 죽을 뻔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데에 가면 미군이 있고, 또 다른 데 가면 한국군이 있고, 더러는 북한군도 있고... 가는데 마다 붙잡혀서 몸서리를 쳤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누가 키우셨어요?

 

▲어렸을 때, 진주 지수의 고향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했지요. 우리 허씨 집안, 친척집에서 컸지요. 우리 어머니의 누나는 서울에 상당히 부자로 살았어요. 서울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조홍제 집안이지 ? 부자 집안인데, 우리 어머니만 그 고생을 하다 돌아가셨지요.

 

-어쨌든 이념의 피해자시네요.

 

▲우리 고향집을 경찰이 에워쌓아서 불을 질렀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중요한 걸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경찰이 총을 쐈다고 합니다. 이 바람에 마을 청년들이 40명이 죽었다고 해요.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아버지는 일본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셨어요. 그 당시, 엘리트셨지요. 할아버지가 논을 나눠주면 안 된다, 그랬더니 아버지와 싸움이 붙어 결국 아버지가 일을 저지르신 거지요. 

 

-어쨌든, 아버지가 이념의 피해자시잖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어린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요? 

 

▲시골 고향에서, 남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지요. 우리 친척집에 가서 있었는데 방한 칸에 나 혼자 살았어요. 다섯 살 때부터 한자공부를 했어요. 방에 혼자 있으니까 사람이 없잖아요. 혼자 있으니까 공부는 잘됐지요. 새벽 4시에 서당을 갔어요. 서당을 6년 동안 다녔지요. 아침 4시에 일어나 사당을 갖다오면 아침 6시입니다. 6시부터 소죽을 끓여 소한테 먹여주고, 밥을 먹고 학교가야 했으니까 바쁘게 살았지요.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 대표(왼쪽)와 문일석 브레이크뉴스 발행인(오른Whr). Honorary Chairman Huh Kyung-young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left) and Moon Il-suk, publisher of Break News (right).    ©브레이크뉴스

 

▲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의 개인 사무실 '하늘궁' 전경.    ©브레이크뉴스

 

-아이큐가 430이라고 주장해 오셨는데, 초등학교 때 천재란 소리를 들었나요?

 

▲천재소리를 많이 들었지요. 지금도 그 동네에서 부모님들이 애들이 꾸짖을 때는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임마, 허경영이는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머슴살이하면서, 전교 1등 했는데 걔 좀 닮아라!”라고. 지금도 내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는 겁니다. 

 

-중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서울로 올라와서 학교를 다녔지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러 시험을 쳤는데 한 과목이라도 40점 미만이면 떨어져요. 과락이 있으면 안돼요. 수학 시험을 보는데 시험지가 바뀐거에요. 검정고시의 시험지가 바뀐거지요. 그 해에 문교부에서 비상이 걸렸어요. 시험지를 받았는데 애들이 10분도 안돼서 다 나가버렸어요. 나 혼자 남은거지요. 수학문제가 주관식 10개였어요. 중학교에서 본적도 없는,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지였어요. 그걸 붙들고 앉아 씨름을 하기 시작했지요. 시험관에게 시험지가 잘못됐다 말했더니,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지인 거에요. 시험이 잘못됐잖아요. 문제지가 바뀐거지요. 시험시간은 10분 밖에 안 남았어요. 내가 4문제를 풀었어요. 중학교 실력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문제10개 중에 4문제를 풀었어요. 그래서 합격이 됐어요. 40점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전국에서 4명이 붙었어요. 그런 궤변이 있나요? 그때 문교부 장관이 권 아무개 장관인데, 문교부 장관 집으로 학생들이 몰려가서 데모를 했어요. 나는 합격이 되었지요. 그래서 고등학교로 진학이 되었어요.

 

-학창 시절하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는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김명숙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부산에서 전근해오셨는데, 우리 학교에는 대부분 재벌 아들들이었어요. 우리 동네는 재벌들 자녀들만 바글바글했어요. 만석꾼들이 많았으니까요. 부산 교육청에서 특별 선생을 보낸 게 김명숙 여선생이었습니다. 왜 왔냐? 이병철 구인회 자제들이 전부 초등학생들이잖아요. 그 학교에 최고 엘리트 교사를 보낸 거지요. 그 분이 김명숙 선생님입니다. 나는 그렇게 멋있는 여자 선생님을 처음 봤어요. 그 시골에서. 그 여선생이 나를 잘 봐줬어요. 부모가 없는 사람 손들라 했는데, 나 혼자였어요. 나를 불러내서 앞으로 나갔지요. 수업이 끝날 때 단상으로 올라오라 해서 선생님이 내손을 잡고 절을 받게 했어요. 엄마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 일을 시켰어요. 집에 가면 일만 시킨다 해서 학교에 더 있게 한 거지요. 선생님이 서랍에서 사탕을 꺼내주는데 그 사탕은 아마도 도회지에서 가져왔나 봐요. 태어나서 처음 봤어요. 그걸 하루에 몇 개씩 줬어요. 그 여 선생님이 어머니 같았어요.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이 안 나는데, 지금도 그 여 선생님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요. 학교에서 소풍을 가는데, 난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 여선생이 준 밥을 먹었어요. 

 

선생님이 부산으로 떠나실 때  강을 바라보면서 “경영아, 저 강이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저 강물이 흘러가면 바다에서 만나듯이 우리는 언젠간 만나게 될 거야” 라고 말했어요.

 

그 당시, 생이별인거지요. 그 여선생님이 버스를 타고 떠날 때 나는 담장 뒤에서 울었었요.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이별은 정말 슬픈겁니다. 어린 시절, 그 여 선생님과 이상하게 정이 들었어요. 

 

-대학교는 어떻게 입학하시고, 대학에서는 어떤 공부는 하셨는지요?

 

▲고등학교를 끝나고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어요. 방송통신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당시 특별히 일을 한 게 있어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님의 양아들로 있었잖아요. 이맹희, 이창희, 이건희하고 잘 지냈어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막내입니다. 이건희는 그 당시에 일본에 유학을 가 있었어요. 일본 대학에 다녔지요. 이건희 회장은 스포츠맨입니다. 이맹희하고 이창희를 아버지를 내쫓았어요. 그때 사카린 밀수사건이 일어났어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모든 재산을 내놓겠다, 한국 비료를 주었어요. 이병철 회장이 잠시 회장에서 물러났을 때 큰아들 이맹희씨가 잠깐 회장 권한 대행이 되었었지요. 

 

-이병철 회장의 양아들은 어떻게 ᄃힰ셨나요?

 

▲제가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만난 과정도 특이합니다. 내가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산 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살았어요. 중학교 때 화계사에 있었죠. 공장도 이 공장 저 공장, 30군데나 다녔어요. 목사님 양아들도 1년 했지요. 스님 아들도 3년 했어요. 그 다음에 서울 홍제동 산꼭대기에 텐트를 치고 6개월 산에서 살다가 이병철 회장님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됐어요. 고 3때인데 서울 서대문구 인왕산, 서대문 교도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텐트를 치고 살았어요.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가 다 보였어요. 낮에는 서울 경치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밤에는 너무 추웠어요. 밤에는 노루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어요. 호떡 하나로 하루 식사를 한때도 있었어요.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이 슬리퍼를 많이 주었어요. 그걸 팔아서 학비를 마련했지요. 어느 날, 서울시 장충동 쪽으로 슬리퍼를 팔러 나갔어요. 그때에도 서울 장충동은 부자동네였어요. 이병철 회장님 집인지도 모르고 갔어요. 그 집에 벤츠가 있었어요. 벤츠가 서울에 한 대 있을 때였죠. 어떤 분이 차를 타는데, 옆에 있는 할머니는 한복을 입고 있었어요. 고무신을 신고 있었어요. 이병철 회장님 부인이었어요. 박 여사님이셨지요. 그분들을 보고 “이 슬리퍼는 팔아야 공부를 합니다. 공부할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공부할 시간을 달라”고 하니까, 그분이 날 유심히 봤습니다. 당시 나는 뼈만 남은 듯한 깡마른 몸이었습니다. 눈만 초롱초롱하지 완전히 쓰러질 것 같은 몸이었어요. 많이 굶었거든요. 그분들이 내 손을 잡더니 끌고 들어갔어요. 대화를 나누다보니 아는 분이셨어요. 경남 진주 지수 초등학교의 대 선배셨어요. 진주출신이라니까, 바로 알아 보셨어요. 아버지 이름을 대니 금방 아셨어요. 이병철 회장이 자기 집에서 공부하라고 했고, 나는 부모가 없었으니 양자(양아들) 사이로 발전한 것입니다.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 대표(왼쪽)와 문일석 브레이크뉴스 발행인(오른쪽).     ©브레이크뉴스

 

▲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의 개인 사무실 '하늘궁' 전경    ©브레이크뉴스

 

-그러면, 시중에서 나도는 이병철 양아들 설은 진짜네요?

 

▲진짜지요. 증언도 있잖아요. CJ그룹 손경식 회장이 법정에서 증언도 섰잖아요. 증언 선 게 있잖아요(이때 법정문서를 보여 줬다). 손경식 회장은 이맹희 회장의 처남이십니다. 그 분이 법정에서 증언을 섰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선 참모였다는 것은 용태영 변호사(불탄절을 공휴일로 만든 변호사)가 증언을 서주셨어요. 용태영 변호사는 당시 청와대 옆에 살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옆집에서 용태영 변호사를 내보내지 마라. 기독교 세력들이 트러블을 만들 수도 있다’며 보호해 줬어요, 내가 이때에 중재를 한 거지요. 내가 박정희 대통령의 비선참모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이때, 필자에게 법정 문서를 보여주며 확인시켜 줌).

 

-박정희 대통령 비선참모였으니,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만나신 거군요?

 

▲이병철 회장님의 소개를 해서 만나거지요. 자주 심부름했어요. 내가 며칠전 만난, 조광작 목사님은 그 당시 청와대 비서실의 사정비서였어요.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님은 원자폭탄에 대해 잘 압니다. 25년 전, 제가 시사 주간신문인 ‘주간현대’를 창간-발행하고 있을 때, 제 신문에 ‘한국에 원자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셨지요. 그래서 그때 독자들이 허경영에 대해 매우 궁금해 했었어요. 지금은 원자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정희 시대 때는 우리나라가 원자탄을 만드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어요. 그 시대에 정말 프랑스에서 플루토늄을 가져온다, 이휘소 이야기, 등등은 소설 같은 이야기이며 꿈입니다. 미사일 사정거리도 300km 이상 못 만들게 했어요. 미국이 미사일도 통제하고 있는데, 무슨 원자탄을 만들겠어요.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만드는 게 어려워요. 러시아 영보인 블라디보스톡 옆에 자르비노 옆, 연해주 쪽에 핵미사일 기지가 있어요. 소련의 핵 미사일 기지.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가 임대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추진한 적이 있었지요. 우리 한반도가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쓸 수 있게 하자,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하고 사이가 안 좋았을 때입니다. 차라리 소련의 핵 미사일을 임대할 수 있게 하자, 상당 진전이 되었지요. 실현은 무산됐지요. 이휘소라는 학자는 이론적인 물리학자라서 실제로 핵을 운용할 수 없는 분이셨어요. 

 

하늘궁 집무실에 걸린, 허경영 대표의 친필 서예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만 되소서라는 뜻이다.    ©브레이크뉴스

 

-지금, 한국의 핵무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핵무기는. 통일을 해야 하니까 소유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구상에 4개 국가가 핵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무너뜨릴 수 없어요. 세계가 통일이 되면 핵무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핵무기는 지구상에서 추방돼야 합니다.

 

-월남전에 참전해다는데, 월남전 참전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최초로 발령받은 데가 특무대였어요. 방첩대 본부에 있었어요. 지금의 현대 미술관 쪽에 보안사령부 방첩대 본부로 발령을 받아 갔어요. 거기서 보안학교로 보내더라고? 보안학교 100기입니다. 4명이 뽑혔더라고요. 천재들을 뽑더라고요. 506 보안부대로 가서 검문소에 나가 있었어요. 내가 월남에 가겠다, 자원했지요. 보안부대에서 보병으로 주특기를 바꿨어요. 월남을 갔지요. 백마사령부에서 법무서기를 했어요. 2년간 검사서기를 하다가 왔어요. 가슴에 달고 다니던 수류탄의 안전핀이 빠져, 겨우 살아난 적도 있어요.

 

-서울시장 후보 때 자녀가 있다고 공시된 적이 있었어요? 결혼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저는 오랫동안 고아원을 경영했어요. 애들이 4명이 있지요. 아들 3, 딸 1명을 입양했지요. 저는 아직까지 결혼을 안했어요. 40살까지 고아원을 경영했어요. 그래서 중앙일보는 나를 “한국의 페스탈로치”라고 보도한 적도 있어요.

 

-요즘 정치권에서 허경영 대표의 정책-공약을 벤치마킹(뒤따라 하기)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허경영이 공약을 만들어 놓으니 다른 정치인이 내 공약을 베끼는 거지요. 내 정책은 실제 대통령 후보 정책입니다. 그래서 허경영이 내세운 정책만한 정책이 없어요.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 후보인 거지요. 다른 후보들은 정책이 빈약해요. 허경영 만이 좋은 정책이 있어요. 준비된 대통령입니다. 공약이 빈약한 정치인들은 허경영이 만든 공약을 베껴서 쓰고 있는 거지요.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정치인들입니다. 그들은 대통령 후보가 된 다음에 정책을 만들고 있지만, 나는 이미 준비된 대통령 후보라는 거지요. 

 

썩은 나무에는 도장을 새길 수가 없어요. 정권이 썩은 나무죠. 그래서 도장도 못 새겨요. 썩은 물에 생수를 좀 부었다 해서 이 썩은 물을 먹을 수가 있나요? 세슘이 들어있는 물에 맑은 물을 섞는다 해서 먹을 수가 있나요? 우리나라 정치 풍토가, 국회의원이란 때가 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국민의힘 쪽에서도 이준석 인기가 올라가는 거예요. 국회의원 배지 안 단사람, 야권에서도, 허경영의 인기가 왜 올라가느냐? 저 사람은 아직까지 여야에 물든 사람이이 아니다, 저 사람은 공약까지 준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국가혁명당은 지난 총선에서 전국 규모에 257명이라는 국회의원 후보도 내보냈어요. 2.000여명의 예비후보도 있었어요. 여자 후보를 40% 출마 시켜 선관위로부터 8억4천2백만 원을 받았어요. 한국 정당사에 없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허경영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국회의원도 이런 조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랜시간 감사합니다. moonilsuk@naver.com

 

*인터뷰어/문일석. 시인. 발행인.

 

▲ 허경영  국가혁명당 명예대표의 개인 사무실 '하늘궁' 정원. 규모가 100만평에 달한다.   ©브레이크뉴스

 

“I was the adopted son of Chairman Lee Byung-chul-I was the secret staff of former President Park Chung-hee!”

[Exclusive Interview]-Huh Kyung-young,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My childhood was veiled... Talk about the Vietnam War!

-Interviewer / Publisher Moon Il-suk

 

On May 27, I had an exclusive interview with Huh Kyung-young,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at the ‘Haneulgung Palace’ located in Jangheung, Yangju, Gyeonggi-do. In this interview, Huh Kyung-young,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revealed in direct remarks that the veil was “the reason why I became the adopted son of Samsung founder Lee Byung-cheol, and that he was a secret adviser to former President Park Chung-hee.” The movie 'Papillon' tells the story of an inmate who is imprisoned in a prison. However, the childhood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Huh Kyung-young, has a story of surviving through all kinds of adversity. He grew up as an orphan and went through a fringe education. He also served in the Vietnam War, a life-and-death war. He also changed 30 jobs to survive. The story of Kyung-young Heo is one of the “Papillonian success stories” that overcame all kinds of adversity in Korea. Below is an excerpt from an exclusive interview with him.

 

-Today, we will have an interview with Huh Kyung-young,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In recent years, the socio-political awareness of CEO Huh Kyung-young has increased significantly. How was his childhood? A lot of people are curious about this. I will focus on questions about CEO Huh Kyung-young's childhood. He also served in the Vietnam War for two years. I'd like to hear more about his political career. First of all, I wonder how he was born in his hometown and what kind of people his parents were.

 

▲ I was born in Jinju, Gyeongsangnam-do. Samsung Group founding chairman Lee Byung-cheol or Chairman Cho Hong-je are the first graduates of Jisu Elementary School in Jinju. I am the 38th at Jisoo Elementary School. There were 178 chaebols from that province. It was also reported on KBS,

 

-Are you very good at Jinju Index and Feng Shui?

 

▲I want to say that it is the best in Korea. The dragon descends from Jirisan Mountain and surrounds our village along the Namgang River. It can be said that there is nowhere in Korea where the scenery is so beautiful. When I entered elementary school, there were about 300 students in my class. I am the 38th graduate of Jisoo Elementary School. Chairman Lee Byung-cheol is from Episode 1.

 

When I came to Seoul when I was 15, I noticed that the tiled houses in Seoul were too small. When I went to Anguk-dong, Jongno-gu, Seoul, the houses were snoring. When I go to Changdeokgung, I only do houses in my hometown.

 

My father was a thrifty man there. I had a lot of land in South and North Gyeongsang Province. My father is 185 cm tall, so he had a good physique. He was sentenced to death at the age of 33 for giving away the land to peasants for free. He is not a thought criminal, so why was he called a thought criminal? Shortly before 6.25, my father was a very wealthy man. Other peasants are guiding Doji. Huh, someone gives you land for free, so why do you take rice? This is why the revolt broke out. I think that ultimately led to the Yeosu Uprising. So, as if my father incited the rebellion, the death penalty was imposed in Jinju, the death penalty in the Daegu High Court, and the death sentence in the Seoul Supreme Court. So I was waiting for the execution date at Seodaemun Prison in Seoul. His mother visited Seoul and stayed under the Jungnang Bridge. There were many poor people living in bale huts, so her mother was terrified. At that time, there was a train reaching Jungnang Bridge in Seoul. Seoul Seodaemun Prison is the last stop of the train. Her mother visits her father, she gave birth to me before my father died. She was sentenced to death on 6.25 two days before the incident. How should I name my child? Because I was born in Seoul, I allow you to make Seoul comfortable, Seoul Gyeongja (Kyungja) You made it a comfortable English character (寧). So, my name is Huh Kyung-young. My father built it. My father, who was imprisoned at the time, said, “There is going to be a war soon.” When I asked him how he knew, it was because there were a lot of gangsters in prison. 6.25 information they knew first. It is said that my father told my mother, “There is going to be a war soon, so go quickly to Jinju.” But her mother did not return to her hometown. Because she didn't believe it. She didn't go back, and after my father died, she went to Seodaemun Prison. When I went to Seodaemun Prison after the 6.25 Incident broke out, there were no prisoners and only dead bodies were piled up. So the mother cannot find her father and goes back to Jinju. She said she nearly died a few times on the way. Because, in some places, there are US troops, in other places there are South Korean soldiers, and in some places there are North Korean soldiers... Everywhere they go, they get caught and shudder.

 

- When you were young, who raised you?

 

▲ When she was young, she worked as a servant in Jinju Jisoo's hometown. I grew up in my Heo family and relatives. My mother's older sister lived in Seoul quite wealthy. She didn't even know she was in Seoul. Are you from the Hong-jae Cho family? From her rich family, only my mother died after suffering.

 

-Anyway, you're a victim of ideology.

 

▲ It is believed that the police surrounded her hometown and set it on fire. It is said that the police fired a gun to get into the house to get something important. It is said that 40 young people in the village died because of this wind. It was a great case. My father majored in economics at a Japanese university. At that time, he was an elite. His grandfather said he shouldn't give out the rice fields, so he got into a fight with his father, and in the end, his father did the work.

 

-Anyway, your father is a victim of ideology. When his father passed away and his family fell apart, how did he live his childhood?

 

▲ In his hometown in the countryside, he lived in someone else's house, where he lived. He was at my relative's house, and I lived alone in the room where he was staying. He has been studying Chinese characters since he was five years old. I'm alone in my room, so there's no one there. Studying went well because I was alone. I went to the Seodang at 4 in the morning. He attended Seodang for 6 years. If you wake up at 4 in the morning and bring the shrine, it is 6 in the morning. Since 6 o'clock I had to boil beef porridge to feed the cows, eat and go to school, so I lived a busy life.

 

-You've been claiming that your IQ is 430. Did you hear that you were a genius in elementary school?

 

▲ I heard a lot of genius sounds. Even now, when parents scold their children in that neighborhood, my story comes out. “Damn, Kyung-young Heo, without her father and mother, while she was a little girl, she was ranked first in the entire school, so look just like her!” Even now, my story is being talked about.

 

- How did you go to middle school?

 

▲ I went to Seoul and went to school. I took the high school GED, and if I score less than 40 in any subject, I fail. There shouldn't be any excess. I'm taking a math test and the test paper has changed. The test paper has changed. That year, there was an emergency in the Ministry of Education. I got the test papers, and the kids all left in less than 10 minutes. I'm left alone There were 10 short answer equations. It was a test paper I had never seen in middle school. I grabbed it and sat down and started wrestling. When I told the examiner that the test paper was wrong, it was a test paper for the college entrance examination. The test observer saw it. It's wrong. The question paper has changed. Only 10 minutes left for the exam. I solved 4 problems. with middle school skills. I solved 4 problems out of 10. So I passed. I got 40 points. So there were 4 people from all over the country. Is there such a sophistry? At that time, the Minister of Education was Minister Kwon, and students flocked to the Minister’s house to give a demonstration. I passed. So I went to high school.

 

-When you were in school, you have memories of your teachers, do you remember any teachers?

 

▲ I remember Myeong-sook Kim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or 3rd grade. She had transferred from Busan, and in our school most of them were the sons of chaebols. Our neighborhood was bustling with only the children of chaebols. Because there were a lot of junkies. It was Kim Myung-sook who sent a special teacher from the Busan Office of Education. Why are you here? All of the children of Lee Byung-cheol's recruitment group are elementary school students. She sent the most elite teachers to the school. That's Mr. Myung-Sook Kim. I've never seen such a cool female teacher. She's in the countryside. She said that the mistress took good care of me. She said she had no parents, but I was alone. She called me out and went forward. At the end of her class, she asked me to come up to the podium and her teacher took her by the hand and took her bow. Just because her mom and her dad aren't there. She made her work when she went home after school. When she gets home, she makes her work, so she stays at school more. Her teacher pulls candy from her drawer, and the candy must have been brought from the city. I saw her for the first time in her life. She gave her several of them a day. She was like her mother and her teacher. I can't remember her mother's face, but even now, her teacher's face keeps popping up. I'm going on a picnic at school, and I've got nothing. She ate her meal that the teacher gave her.

 

When the teacher left for Busan, she looked at the river and she said, "Kyeongyeong, do you know where that river goes? When that river flows, we meet like we meet in the sea," she said.

 

At that time, she was separated from her life. I cried behind her fence when the mistress left on the bus. How many tears are shed, is parting really sad? She was strangely friendly with her teacher.

 

- How did you enter the university and what did you study at the university?

 

▲After high school, I entered the Department of Law at the College of Broadcasting and Communication. After graduating from the Department of Law at the Korea Broadcasting and Communication University, I did a special job at that time. He was the adopted son of Samsung Group Chairman Lee Byung-cheol. I slept with Lee Maeng-hee, Lee Chang-hee, and Lee Kun-hee. The late Samsung Electronics Chairman Lee Kun-hee is the youngest. Lee Kun-hee was studying abroad in Japan at the time. He attended Waseda University in Japan. Chairman Lee Kun-hee is a sportsman. Lee Maeng-hee and Lee Chang-hee were driven out of his father. Then the saccharin smuggling case occurred. I will give all my fortune to the then President Park Chung-hee, who gave him Korean fertilizer. When Chairman Lee Byung-cheol temporarily stepped down from the chairmanship, his eldest son, Maeng-hee Lee, became acting chairman for a short time.

 

- How did Chairman Lee Byung-cheol's adopted son come to be?

 

▲He helped me a lot in my studies. The meeting process is also unique. I lived in a tent at the top of a mountain in Hongje-dong, Seodaemun-gu, Seoul. I was at Hwagyesa Temple in middle school. I have been to 30 factories, from this factory to that factory. Pastor's adopted son also had one year. The monk's son has also been there for 3 years. After that, I pitched a tent on the top of a mountain in Hongje-dong, Seoul, and lived in the mountain for 6 months before entering as the adopted son of Chairman Lee Byung-cheol. When I was in high school, I lived in a tent overlooking Inwangsan Mountain in Seodaemun-gu, Seoul, and Seodaemun Prison. If you look down from there, you can see the entire city of Seoul. The view of Seoul during the day was very nice. But it was very cold at night. At night, roe deer came into the tent. There was once a day when I had one hotteok meal.

 

 The people who lived in the shantytown gave me a lot of slippers. I sold it to pay for my tuition. One day, I went to Jangchung-dong, Seoul to sell slippers. Even then, Jangchung-dong, Seoul was a wealthy neighborhood. I didn't even know it was Chairman Lee Byung-cheol's house. There was a Benz in the house. It was when there was one Mercedes-Benz in Seoul. Someone was driving a car, and the woman next to her was wearing a hanbok. She was wearing rubber shoes. She was the wife of Chairman Lee Byung-cheol. She was Mrs. Park. When I saw them, I said, “You have to sell these slippers to study. Give me time to study,” she said. When I asked, “Give me time to study,” he looked at me carefully. At that time, I was skinny, as if there were only bones left. It was a body that looked like it was going to collapse completely, with only her eyes lit up. I starved a lot. They grabbed my hand and dragged me in. I was talking to someone I knew. He was a senior at Jinju Jisu Elementary School in Gyeongnam. Being from Pearl, he recognized right away. He knew his father's name right away. Chairman Lee Byung-cheol told me to study at his own house, and since I had no parents, we developed a relationship.

 

-Is the rumor of Lee Byung-cheol's adopted son circulating in the market real?

 

▲ It's true. There is also testimony. CJ Group Chairman Son Kyung-sik also testified in court. You have a testimony (I showed you the court documents at this time). Chairman Son Kyung-sik is the brother-in-law of Chairman Lee Maeng-hee. He was testifying in court. Lawyer Yong Tae-young (a lawyer who made the National Day of Remembrance a holiday) testified that he was President Park Chung-hee's non-election aide. At that time, lawyer Yong Tae-young lived next to the Blue House. President Park Chung-hee said, 'Don't let lawyer Yong Tae-young out of the house next door to the Blue House. He protected by saying that the Christian forces could cause trouble, and I intervened at this time. It is also true that I was President Park Chung-hee's non-elected aide (at this time, he showed me court documents and confirmed them).

 

- Since you were President Park Chung-hee's non-elected staff, did you meet President Park Chung-hee often?

 

▲ We will meet by introducing Chairman Lee Byung-cheol. I often ran errands. Pastor Gwang-Jak Cho, whom I met a few days ago, was the secretary of the Blue House Secretariat at the time.

 

-Huh Kyung-young, Honorary Representative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knows very well about the atomic bomb. Twenty-five years ago, when I was starting and publishing the weekly newspaper ‘Weekly Hyundai’, you argued that ‘Korea should have an atomic bomb’ in my newspaper. So at that time, readers were very curious about Huh Kyung-young. What are your thoughts on the atomic bomb now? I wonder.

 

▲ During the Park Chung-hee era, it was absolutely impossible for Korea to make an atomic bomb. In that era, really bring plutonium from France, the story of Lee Hwi-so, etc. is a story like a novel and a dream. The missile's range could not exceed 300 km. The US also controls missiles, so what kind of atomic bomb would they make? It is difficult for Korea to make nuclear weapons. There is a nuclear missile base next to Vladivostok, a Russian newsletter, next to Jarbino, and on the coastal side. Soviet nuclear missile base. There was a time when President Park Chung-hee promoted a contract on condition that we lease it. Let our Korean peninsula pay for it and let it be used, that's when President Park Chung-hee had a bad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We'd rather let the Soviet nuclear missiles be leased, which is a significant step forward. Realization failed. A scholar named Lee Hwi-so was a theoretical physicist who could not actually operate nuclear weapons.

 

-Now, what do you think about South Korea's nuclear armament?

 

▲Nuclear weapons. It is difficult to own because it has to be unified. Four countries on the planet have nuclear weapons, and you can't bring them down. When the world is unified, nuclear weapons must be eliminated. Nuclear weapons must be expelled from the earth.

 

- You said you participated in the Vietnam War, please tell me about your participation in the Vietnam War.

 

▲I was trained at the Nonsan Training Center. It was the special stage when it was first ordered. It was at the counterintelligence headquarters. I was assigned to the headquarters of the Security Command's anti-intelligence unit in the current museum of modern art. They sent you to the security school there? It is the 100th security school. Four people were selected. They picked geniuses. I went to the 506 security unit and was out at the checkpoint. I will go to Vietnam, I volunteered. I changed my specialty from security forces to infantry. I went to Vietnam. I served as a legal secretary at the White Horse Command. I came here after working as a prosecutor for two years. There was a time when the safety pin of the grenade I was wearing on my chest came off and I barely survived.

 

- Was it ever announced that you had children when you were a candidate for Seoul mayor? How was your married life?

 

▲I ran an orphanage for a long time. I have 4 kids. I adopted 3 sons and 1 daughter. I'm not married yet. I ran an orphanage until I was 40. So, JoongAng Ilbo once reported that I was “Korean Pestaloch”.

 

-These days, more and more people are benchmarking (following) the policy-promise of CEO Huh Kyung-young in the political arena.

 

▲ Since Huh Kyung-young made a promise, other politicians are copying my promise. My policy is the actual presidential candidate policy. So, there is no such policy as the one that Huh Kyung-young has put forward. It's a planned presidential candidate. Other candidates have poor policy. Only Huh Kyung-young has a good policy. Ready president. Politicians with poor promises are copying the promises made by Huh Kyung-young. They are unprepared politicians. They're making policies after they've become presidential candidates, but I'm already a prepared presidential candidate.

 

You cannot engrave a seal on rotten wood. The government is a rotten tree. So I can't even engrave. Can you drink rotten water by pouring some bottled water into it? Can I eat it by mixing clear water with water containing cesium? The political climate of our country, the members of the National Assembly, are people who are buried in time. That's why Lee Jun-seok's popularity is rising in the people's power side. Why is Huh Kyung-young's popularity rising even in the opposition party, who is not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badge? That person has not yet been tainted by the opposition, and that person is a person who is ready to make a promise.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also sent out 257 candidates for the National Assembly in the last general election. There were also about 2.000 preliminary candidates. I got 842 million won from the National Election Commission by running 40% of female candidates. He set a record that was not in the history of Korean political parties. Huh Kyung-young is a person with a nationwide organization. No member of parliament has such an organization.

 

- Thank you for a long time. moonilsuk@naver.com

 

*Interviewer / Il-suk Moon. poet. Publ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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