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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주와 이렇게 오붓하게 단 둘이 있게 된 것이 정말 꿈만 같소!

리채윤 소설가 l 기사입력 2021-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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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채윤 소설가.     ©브레이크뉴스

6장 웅비의 세월 4

 

초린과 대조영이 상단을 이끌고 영주에 도착하자, 이진충은 성공적인 월행을 축하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해고가 영주 주둔군 장수로 돌아온다는 것이 기뻤던 것이다.

"대조영, 나는 자네에게 무엇이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야수이 그 놈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자네 말은 어찌 그리 순순히 따른단 말인가?"

"그것은 제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야수이의 가슴 속에 도호께서 베푸신 부성애가 깊이 각인 된 탓 일 것입니다."

"그런가? 그 놈에게도 아직 그런 여린 마음이 남아 있었어?"

"그렇고말고요."

이진충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온 듯 어린아이처럼 기쁜 표정이 되었다. 

대조영은 숙영을 흑선우의 집으로 보내서 그들 가족과 함께 지내도록 조치를 하고 착착 자신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 시켜 나갔다. 흑선우의 가족들은 눈시울을 적시며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이튿날 대조영은 미추홀을 시켜서 역고제가 키워 놓았다는 철기 기술자를 찾으라고  명했다. 미추홀은 그날로 그 자를 찾아서 데리고 왔다. 그의 이름은 나하만(羅夏萬)이었다. 그는 대조영보다는 나이가 위였지만 아주 젊고 성격이 밝은 젊은이였다.

"역고제 대장이 당신을 추천했는데 우리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홀한성으로 가주면 좋겠소, 그곳에 가서 당신이 고구려 검의 맥을 이어주면 좋겠소."

"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사흘 후에 떠날 것인데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소?"

“예. 제에게는 아내와 아이 둘이 딸려 있습니다. 가족만 거두어 주신다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소, 가족 걱정은 하지 마시소.”

대조영은 미추홀에게 철기 기술자들을 인솔하고 홀한성으로 가는 임무를 맡겼다. 

“나는 기회를 보아 숙영 공주와 떠날 것이니 네가 먼저 떠나거라. 우리가 함께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띄여서 영주도독의 의심을 받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해공 스님이 어찌 안 보이십니까?”

“스님께서는 당분간 영주에 머무시면서 우리 유민을 계도하시겠단다. 지금 유민들 중에 불교 신도들을 만나시고 계실 것이다.”

다음날 미추홀이 일행을 이끌고 떠나자, 대조영은 흑선우의 집으로 가서 숙영을 만났다.

"이곳에 오니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흑미려가 얼마나 나를 반가워하는지 모르겠어요."

숙영은 무척 기쁜 듯이 한껏 웃으면서 말했다.  대조영은 숙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그녀가 초린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도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다행스러웠다. 

대조영은 흑선우와 흑원종에게 숙영을 홀한성까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음 달이면 이해고가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전에 저는 이곳의 일을 정리하고 떠날 것이니 숙영공주를 먼저 홀한성까지 데려다 주십시오."

"알겠네, 나도 이참에 이곳을 떠나 홀한성으로 가려네. 고사계 장군이 장안으로 끌려간 후부터 이곳에 있는 것이 불안하기만 하네." 

흑선우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떠날 의사를 밝혔다.

대조영이 장안을 다녀오는 사이에 영주에서는 고구려 유민에 대한 소개령이 또 발동 되었었다. 고구려 유민 중에 거물급이 암암리에 부흥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주도독은 고사계를 비롯한 고구려의 지도급인사 100여명을 차출해서 장안으로 보내 버린 것이었다. 

마침 흑선우는 멀리 사냥을 나가서 검거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이곳에 남아 있으려고 하나? 혹시 검이라는 아이 때문인가?”

흑선우가 대조영의 속마음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아닙니다. 이해고가 당나라 장수로 영주에 오게 되면 그를 회유하기로 이진충과 약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란과 우리가 손을 잡고 힘을 합치면 실지를 회복하고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는 것도 어렵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먼. 하지만 몸조심하시게. 이해고란 자의 성정이 여간 모질지 않다는 소문이고, 또 그자의 원한이 깊은 만큼 그와 척을 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 초린이란 이진충의 딸과의 관계를 어찌 할 것인가?”

흑선우는 몹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해고가 영주로 오면 초린과 혼인을 맺을 것입니다. 제가 초린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그 자가 숙영공주를 장안에서 빼내 준 것입니다.”

“그래. 자네의 수완이 놀랍구먼.”

흑선우는 비로소 납득이 간다는 듯이 얼굴에 웃음을 지었다.

“저는 숙영공주와 말갈부락의 추장 걸사비우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그러하시게.”

대조영은 숙영과 함께 말을 타고 걸사비우를 만나기 위해 말갈족 부락으로 향했다.

대조영은 숙영과 단 둘이서 호젓하게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얼마나 꿈꾸었던 것인가를 생각했다. 대조영은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을 바라보며 정겹게 말했다.

"우선 흑선우 장군 부자와 함께 홀한성으로 떠나세요. 이해고가 이곳에 도착하는 데로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따라서 갈 것이오. 그때 우리의 혼인식을 치릅시다."

대조영은 그렇게 말하며 숙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항상 느껴지는 알싸한 향이 오늘따라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나는 어떻게 장안을 빠져 나오나 걱정을 했는데 이렇게 절묘하게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지금 만나러 가는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는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람이오. 전에 거란의 포로가 되었을  때 만난 사람인데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오. 걸사비우는 내친 아우라고 생각해도 좋소."

"알겠어요. 그렇게 모실게요."

숙영은 대조영이 말하는 의미를 알아들었다. 걸사비우는 대조영이 숙영과 함께 자신의 부락으로 들어서자 아내인 우씨와 일가친척들 다 불러 모아 인사를 하게했다. 

"대조영 장군의 배필이 되실 숙영 공주님이시오. 모두 두 분께 예를 갖추어서 절을 하시오."

그리하여 걸사비우의 가솔 30여 명이 두 사람에게 절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제 동모산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가솔들을 다 물리치고 대조영과 숙영, 걸사비우와 그의 아내 우씨만이 앉은자리에서 걸사비우가 물었다. 

"그래야겠지. 한 달 후면 이곳에 야수이가 당나라장수로 온다."

그 말에 걸사비우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 자가 여길 왜 온답니까?"

그는 이해고가 무척 껄끄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이진충과 나, 그리고 이해고와 나 사이의 밀약 때문일세."

"밀약이라니오?"

"영주를 당나라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첫 단계 작업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러면 야수이가 당나라군의 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진충의 명을 따른다, 이것입니까?"

"그렇게 만들어야지, 야수이가 우리 편만 되어준다면 요동성이나 안시성을 다시 되찾고 고구려를 부흥 시키는 것은 쉬워질 것이다."

"그럼 형님은 영주에 머무실 것입니까?"

"나는 홀한성에 가서 숙영공주와 예식을 올리고 거기에 머물면서 야수이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주시한 다음 결정 하려고 한다. 그 자는 자기가 이곳에 오기 전에 나더러 영주를 떠나라고 했다."

"예식에는 저희 내외도 참석하겠습니다. 날을 언제로 잡으셨나요?"

"동모산에 가서 아버님과 의논을 한 후 정하겠지만 가을이 가기 전에 치를 것이다. 가서 기별을 주마."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밤이 깊어지자 걸사비우는 대조영과 숙영에게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 방은 두 사람에게 미리 준비된 신방과도 같았다. 대조영과 숙영은 그렇게 걸사비우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오붓한 정을 쌓았다. 

“나는 공주와 이렇게 오붓하게 단 둘이 있게 된 것이 정말 꿈만 같소. 공주를 처음 본 날부터 오늘을 꿈꾸어왔소.”

대조영은 아주 그 옛날의 소년 시절로 돌아가서 그 설레이는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대조영은 변방의 소년 장수로서 도성의 공주와 혼인을 꿈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온달(溫達)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를 곱씹으면서 자신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대조영은 숙영을 품에 안으며 자신에게 이런 행운이 온 것을 놓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우리 고구려가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숙영이 대조영의 품에서 물었다.

“나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공주에게 청혼을 했을 것이오.”

“저도 그렇게 알고 기다리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럼. 나를 처음 본 그때부터 사랑을 했단 말이오?”

“그걸 아직도 모르셨단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은 서로의 품을 찾으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미색은 어둠 속에서도 찬연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며칠 후 숙영은 흑선우의 가족과 함께 홀한성으로 떠나는 길에 올랐다.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은 무척 청명하고 공기는 맑았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 일을 정리하고 곧 따라 갈 것이오."

대종영이 숙영에게 말했다.

"저 혼자 외로울지 모르니까 얼른 오셔야 해요."

숙영이 애교 띤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알겠소, 곧 따라 가리다. 처가 식구들이 없어서 적적할 것이지만 내 어머니가 잘 보살펴 주실 것이오. 내 집이라 여기고 마음 편히 먹고 있어요."

"알겠어요."

일행이 떠나려고 하는데 걸사비우가 50여기의 기병을 데리고 나타났다. 

"형님, 제가 형수님을 홀한성까지 안전하게 모셔 다 드리겠습니다. 천문령(天門領) 지나는 곳에 요즘 비적들 출몰이 잦다고 하니 걱정스러워서 달려 왔습니다.

"고맙다, 나도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네가 도와주겠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리하여 숙영과 흑선우 부자와 그들이 거느리는 20여 명의 식솔들은 걸사비우와 그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길을 떠났다. 

대조영은 일행이 영주성을 빠져 나가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다보았다. 이제 숙영을 지신의 여자로 맞이하고 소원 성취한 기분 때문에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지만 초린과 아들 검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여전히 어두웠다.

사흘 후, 미추홀이 돌아왔다. 

"오는 길에 천문령을 못 미치는 곳에서 숙영공주님과 흑선우 장군 일행을 만났습니다. 걸사비우도 보고요"

"잘 들 가고 있더냐?"

"예, 지금쯤 홀한성에 당도 했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아버님이랑 다들 별고 없으시겠지?”

“예.”

“그런데 초린이가 나와 야수이 사이의 밀약을 알게 되면 몹시 분개할 텐데…. 어쩌면 이진충이와의 관계가 그것 때문에 틀어져 버릴지도 모르고."

대조영은 못내 마음속이 찜찜한 것을 미추홀에게 털어 놓았다.

"그렇죠, 이진충이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제 생각에는 잠시 이곳을 뜨는 것이좋을 것 같은데요.’

"그것은 비겁한 일이다. 내가 직접 초린을 만나서 고백하겠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납득을 시켜야지."

"그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초린 아씨가 자신이 흥정의 대상으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면 모멸감 때문에 무척 화를 낼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나이가 이런 일을 회피만 하면 쓰겠느냐? 그러면 아무 일도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고가 돌아오기 전에 기회를 봐서 초린에게 고백하고 그녀를 설득해야겠다.”

대조영은 그렇게 자신의 의지를 굳혔다.

그 무렵 초린은 숙영이 영주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처음부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대조영과 이해고 두 남자가 능청스레 호흡을 맞추는 통에 사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지나쳤다. 

‘숙영이 영주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초린은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해답은 외부에서 날아들었다. 초린이 그렇게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이해고의 서찰이 날아들었다. 서찰을 읽은 초린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이해고는 자신이 영주에 오긴 전에 초린에게 대조영의 실체를 알려서 초린의 마음이 자신에게 오도록 하겠다는 심산에서 모든 사실을 까발려 버린 것이었다.

그때 마침 결단을 내린 대조영이 그녀를 찾았다. 그는 초린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고 찾아 온 것이었다. 이런 일은 숨긴다고 해결 되는 일이 아니란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모처럼 호수로 나가 볼까 날이 쌀쌀하기는 하지만 운치가 있을 거야."

대조영이 운을 띄우는데도 초린은 대답이 없다. 거의 혼자서 상단을 움직여 나갈 정도로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그녀이기에 이미 대조영의 속내를 눈치 챈 것일까? 하지만 이해고가 모든 사실을 발설한 것을 알지 못하는 대조영은 아무리 눈치가 빠른 초린이지만 그 내막까지는 알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과 숙영공주라 하는 그 여자는 어떤 사이죠?"

여자의 목소리에는 얼음 같은 차가움이 배어 있었다. 

초린은 대조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순간 대조영은 초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초린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조영은 초린이 그렇게 치고 나오는 의도를 알지 못해서 당황했던 것이다. 

"나는 당신을 믿었어요. 나는 호숫가 초막에서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당신이 연개소문의 손자인 연헌성이를 붙잡아서 떠날 때, 당신을 안 보낼 수도 잊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아이까지 낳아서 혼자 기르고 있건만 야수이까지 동원해서 나를 속여요."

초린은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비로소 대조영을 바라보았다. 대조영은 초린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고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벌써 모든 사실을 발설 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대조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던 참이었어, 내가 야수이에게 도움을 요청했었지. 숙영공주를 빼내 오려면 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거든."

"데리고 와서요. 당신하고 그 여자하고 붙어살면 망한 고구려가 저절로 다시 일어서나요. 나라는 여자는 무엇이건데 당신들 둘이서 그런 치졸스런 흥정 속에 나를 끼워 넣은 거죠?"

"그건 야수이가 초린을 그토록 못 잊어 하는 것 같아하니까…." 

아,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초린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 거의 사색이 되어 몸을 떨고 있었다.  

"야수이는 오지 않아요."

초린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무슨 소리야?"

"야수이는 전에 이진성 전투에서 당신과의 칼싸움에서 졌을 때, 당신이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의 청을 들어준 것뿐이랍니다."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대조영은 자신이 비로소 이해고의 책략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너무 선선이 요청을 들어주는 것 같더니!

"어떻게 나를 두고, 당신의 아이까지 낳아준 나를 두고, 그런 비열한 흥정을 할 수 있는 거죠?"

"미안하오."

"그 여자가 당신에게 무엇이죠? 고구려의 공주라서 그런 건가요? 내가 거란의 여자라서 그런 건가요?"

초린의 질문은 절규처럼 들렸다. 대조영은 아무런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당신은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변명은 안겠소, 나는 어쨌든 숙영공주를 장안에서 빼내 와야 했소. 그리고 야수이가 이곳에 온 다음에 우리끼리 어떤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오. 아버지가 내 잘못을 묻는다면 기꺼이 응하리다."

대조영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은 죽음이에요. 아버지가 당신을 용서하실 것 같아요?"

"글쎄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다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야수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하군. 나는 야수이가 영주로 온다고 믿고 있소 그러니 이 문제는 그때 가서 거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야수이가 왜 우리 둘만의 약조를 어기고 초린에게 어떻게 털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 있고 달아나지도 않으리다. 내가 야수이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겠소. 만약 야수이가 당나라 장수로 영주에 와서 당신을 아내로 맞겠다고 한다면 내가 양보할 것이오."

양보한다고요? 누가 누구를요?"

초린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대조영을 쏘아 보았다.

"당신의 뜻을 따르겠소. 또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야수이가 이곳으로 올 것이란 것도 믿고 있소."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사람을 보내서 당신이 한 짓을 내게 다 일러준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나를 제거한 후에 오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떳떳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겠지."

초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한 짓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다른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나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다니 이런 모욕은 참을 수가 없어요. 나는 당신 아이의 어미에요."

초린도 결국에 여자인지라 아이를 무기로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화가 나더라도 참으시오. 내가 여기 별 일 없이 있으면서 아버지의 일을 거들고 있는 것을 알고 나면 야수이의 본심이 드러날 것이니."

"그 여자는 어디로 빼돌렸나요?"

초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홀한성으로 보냈소."

"왜요? 거기 가서 후고구려라도 세우고 공주마마와 백년가약을 만 백성 앞에서 맺으려고요?"

"부정하지 않겠소."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요.”

초린은 혼절 할 듯이 주저앉았다.

"미안하오."

대조영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부축해 앉혔다. 

"보기 싫으니 가 보세요. 야수이에게는 연락하지 말아요."

초린은 대조영을 뿌리쳤지만, 이해고에게  사람을 보내지 말라는 말을 함으로서 사태의 추의를 지켜보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알겠어, 좀 진정이 되면 오겠소"

곧바로 초린의 처소를 나온 대조영은 이진충의 집무소로 향했다. 어차피 이진충도 알게 될 일이라면 차라리 먼저 매를 맞는 것이 나을 것이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반드시 영주로 올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먼저 약속을 어긴 그의 저의를 깨부수고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진충은 마침 집무소에 한가롭게 앉아서 시종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다 늦은 저녁에 웬일인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좌중을 좀 물려주시지요."

순간 이진충의 얼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지나가는 것을 대조영은 보았다. 노련한 이진충은 진작부터 초린과 대조영 사이의 기류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직까지 이진충은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의 정조를 빼앗고 아이까지 낳게 한 대조영이 영주에 다시 나타났건만 대조영에게 잘못을 묻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마치 방관하듯이 대하고는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속셈이나 계산이 없을 리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대조영은 이해고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사연들도 사실대로 이실직고를 했다. 호랑이 굴에 머리를 들여놓은 심정으로. 

"허면 네가 나를, 그리고 내 딸 초린이를 지금까지도 예사 여자로 치부하고 히롱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이진충은 노기가 실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정말 화가 난 듯이 얼굴빛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만약 도호께서 저의 입장이었으면 어떠하셨을까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나의 의지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고 제 꿈은 너무도 큽니다. 저는 대의를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야수이도 얕은꾀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두 남자 중 하나가 초린이를 책임질 것입니다. 이 대조영이도 초린을 사랑합니다. 이미 제 아이까지 가진 여자를 버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야수이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대조영은 진정을 다해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이진충의 얼굴빛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네가 내 딸을 사랑하기는 한 것이냐?"

"예"

대조영은 짧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전에 한 말을 기억한다. 내가 지금은 당나라의 하수가 되어 빌붙어 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거란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때 너도 고구려를 일으켜 세우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서 나는 너를 용서하는 것이다. 문제는 야수이 이 놈이로구나. 놈은 재주는 승한데 너무 가벼운 것이 문제야. 이봐, 대조영, 자네 오늘 나와 술이나 한 잔 하자. 어떤가?"

"좋습니다. 사나이 대 사니이로 목숨 걸고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 드립니다.”

"좋다. 나는 그런 네가 좋다. 아마 야수이라면 달아나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너를 쳐 죽인다고 무어라고 말릴 놈이 여기 없지 않느냐?”

이진충은 대조영을 넌지시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아버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허, 니가 지금 아버님이라 했느냐? 허허, 대조영도 아부를 떨 때가 다 있구나."

"사실이잖습니까?"

"그래, 그렇지, 허허"

이진충은 호걸다운 데가 있었다. 대조영이 걱정했던 것보다 쉽게 일이 매듭을 지어 가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독대를 하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훗날을 기약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 나이 이미 쉰을 바라보고 머리는 반백인데 자식이라고는 여식 하나뿐일세. 나는 야수이를 아들처럼 키웠지만 이제 와서는 실망이 많아. 그 놈이 초린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 인줄은 몰랐네. 내 여식은 몸은 비록  여자이지만 워낙 남아를 능가하는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평소 천하의 영웅이 아니면 지아비로 삼지 않으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인데 자네에게 정분을 주었으니 낸들 어찌하겠나. 계집이란 아무리 잘나도 계집일 뿐일세. 나는 자네가 내 딸과 천생연분의 배필이 되리라 믿고 있네.”

그 말을 들은 대조영은 이진충이 아직까지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진충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자네와 반드시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영주 땅을 만들고 말 것이네. 이 땅은 대대로 우리 거란의 땅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천리장성 너머의 땅은 고구려의 땅이니 자네가 다스리게나. 이 약조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진충은 정말로 마음을 풀어 놓고 대조영을 대했다.

“좋습니다. 반드시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대조영은 대조영대로 이진충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굳어졌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드디어 겨울이 찾아왔고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치면서 대지는 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모두가 가난한 고구려 유민들은 움막보다는 토굴 속으로 모여 들었고 먼저 영주에 정착해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말갈족, 해족, 돌궐족들은 조금은 여유롭게 겨울을 지냈다.  

눈보라가 사위를 가리고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리는 날, 장안을 빠져 나온 야철대장 교범수 일행 십여 명이 도착했다. 그들은 수달피 장수로 변장을 하고 영주에 도착을 한 것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소. 오는 데 큰 문제는 없었소?”

대조영이 의외로 밝은 교범수의 표정을 보면서 물었다.

“예. 다행이 장안성을 빠져나오는데 검색이 대단치 않았습니다. 우리 정예 기술자 전원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

“정말 다행이오. 이 엄동설한에 대단히 수고가 많았소. 뒤따라오는 군사라던가 세작들은 없었겠지요?”

“예. 그런 염려는 마십시오. 여기까지 오면서 두 패로 나누어서 조심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 당나라 군대가 영주 주둔군을 교체하고 이해고가 이곳의 장수로 부임해 온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야철대장은 한 이틀 쉬고 난 후, 일행들을 데리고 곧바로 홀한성으로 떠나야 할 것 같소. 나도 이곳에서 일이 마무리되는 데로 따라갈 것이오.”

“알겠습니다.”

“홀한성에 가면 평양성의 야철대장이던 역고제의 기술 전수자인 나하만이 철기방을 지키고 있을 것이오. 그와 협력해서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주기 바라오. 무기만 있다면 고구려의 부흥도 어렵지 않을 것이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조영은 교범수 일행을 비밀 장소에서 편히 쉬게 조치를 하고 초린을 찾아갔다. 초린은 아버지 이진충이 대조영을 용서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사나이끼리의 맹세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열흘 후면 이해고가 영주에 올 것인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오."

"나더러 어쩌란 것이죠?"

초린은 날카롭게 외쳤다.

"나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 그대로 영주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도울 것이니 내 걱정은 말고."

"난 당신같이 나쁜 사람은 처음 보아요. 어쩌면 야수이보다도 더 나쁜 사람 같아. 이젠 아버지까지 속여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으니...."

초린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대조영을 노려만 볼뿐이었다.

"우리가 행복한 시대에 만났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았소. 하지만 지금은 나라도 잃고 백성도 잃은 시대인데 우리만의 사랑 놀음을 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싶소."

대조영은 아주 무겁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초린은 여전히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대조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힘든 일일지 모른다. 야수이가 이곳에 당나라 장수로 오게 되면 이 남자는 살아남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는 무슨 속셈으로 여기서 이렇게 얼쩡거리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해고에게 대조영이 당하는 꼴은 더욱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야수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떠나세요. 당신의 그 잘난 고구려 공주를 찾아가세요.”

초린은 매정하게 말을 맺고 대조영을 밖에 남긴 채,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대조영은 대조영대로 초린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장안성에서 숙영을 빼내오려고 결심했을 때, 자신은 초린과 아들 검이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그것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겨울이 오기 전에 숙영에게 홀한성으로 가서 예식을 올리자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이 자신에게도 내재하고 있다는 것에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는 두 여자를 다 사랑할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대조영은 무엇보다도 이해고가 이곳에 와서 당나라군을 통솔하게 되면 고구려 유민들에게 더 가혹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었다. 또 만약 이해고가 당나라 장수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모든 행사를 펴나간다면 이진충이 조차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대조영은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한다고 결심을 굳혔다.

대조영은 이해고가 아직까지 자신이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혐오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해고는 대조영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시도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조영은 위기를 감수하더라도 그를 만나서 고구려 유민에 대한 보호에 대한 언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해고에게 그가 고구려인임을 깨닫게 해서 그나마 이곳에 와서 연명하고 있는 유민들을 화평케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대조영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열흘 후, 하늘과 땅이 온통 흰 눈에 덮인 요서 벌판을 지나 영주성 안으로 1만 3천명의 당나라군이 진군해 들어왔다. 전에 근무하던 군대와의 교체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해고는 5천명이나 증원된 군대를 거느리고 교대 근무를 시작한 셈이다. 

그것은 동돌궐이 다시 일어나면서 위연과 토번 세력이 만리장성 북쪽을 노략질하는 탓에 변경 강화 대책의 일부로서 이루어진 당나라 조정의 조치이기도 했다.  

당나라 군대 장수들의 이 취임행사가 끝나자 당나라 군 본영에서는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주연의 주체자는 영주도독 장검(張儉)이었고 영주성 내의 각 부족의 추장들이 다모여서 이해고의 부임을 축하했다. 주빈인 이해고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해고는 대조영이 자리에 배석해 있는 것을 보고 그다지 놀라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도호께서는 어찌 저 자를 이 자리에 부르셨습니까?"

이해고는 웃음을 그치지 않으면서도 이진충에게 대조영이 참석한 것에 대해서 까닭을 묻고 있었다.

"저 아이는 내 사위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일세."

이진충의 말이 떨어지자 이해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고 말았다.

"아버님, 저자는 고구려 부흥군의 장수입니다."

이해고가 자지러질 듯이 웃으며 외쳤다.  

"오늘 같이 좋은날 그런 사사로운 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은 야수이답지 않구먼."

이진충의 그 말에 이해고는 사태를 파악한 듯 독기를 품은 얼굴로 대조영을 쳐다보았다. 으레 이진충이 대조영을 내쳤거니 하고 사전 정보 없이 영주에 입성한 자신의 방만함을 스스로 질책할 뿐이었다.

"자 우리 이해고 장군의 무운을 빌며 건배합시다."

이진충과 장검이 기분을 돋우며 흥겨운 주연을 유도했다. 영리한 이해고는 그들의 뜻에 따라 거나하게 술을 받아 마시고 흥겨워지는 척 했다. 그는 취임의 변을 마치고 자리를 돌면서 배석한 빈객들에게 술을 따랐다. 대조영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그는 술을 따르며 말했다. 

"왜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느냐? 떠나지 않으면 너를 죽일 것이다. 내일 당장 떠나라."

그 말을 들은 대조영은 받은 술잔을 단숨에 삼키고 이해고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말을 듣고자 기다리고 있었소. 다들 나를 잡으니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이해고는 얼굴이 아주 찌그러지며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대조영에게 다시 잔을 건넸다. 그래서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주 친근한 정 때문에 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오해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해고의 말은 비수보다 더 날카로웠다. 

"잘난 척을 계속 한다면 동모산을 아주 휩쓸어 버리겠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것이다."

이해고는 미리 작심을 한 듯이 말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대조영은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알겠소.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떠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알아야 할 것이오. 지금 부흥군은 신라와 손을 잡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있소. 알고 있겠지만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장군과 신라의 설오유(薛烏儒)장군이 이끄는 1만 명의 연합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고 있소. 내가 보기에 고구려의 부흥은 멀지 않았소.”

“네 놈이 이제 보니 부흥군들과 내통을 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놈들이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를 건넌다고 해도 아니 될 일이다. 기껏해야 1만의 군사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다고 망한 고구려가 다시 일어설 것 같으냐? 지금 당나라 조정에서는 10만의 군사가 그들을 치기위해 출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고구려인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오.”

“그만 하거라. 나는 당나라의 장수일 뿐이다. 다시 그따위 수작을 늘어놓는다면 앞으로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겠소. 분부대로 따르리다.” 

대조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밤이 깊어서 주연이 끝나자 하객들은 진영을 하나 둘 떠났다.

“야수이가 당나라 물을 먹더니 너무 기고만장해졌구먼요.”

미추홀이 연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해고의 위세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위세는 좋은데 깊이가 없어 보이니 걱정이로구나.”

대조영도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형님,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일 당장 떠나시오. 천문령까지는 내가 호위해 드리리다. 저 미친놈이 군사를 보내서 형님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니까.”

걸사비우가 말했다.

“그래. 떠나야 할 것 같다. 이미 정리할 것은 다 정리했으니 날이 밝기 전에 떠나겠다. 때가 되면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니 그때를 대비해서 항상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거라.”

대조영은 걸사비우에게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처소로 돌아 온 대조영은 미추홀과 함께 행장을 챙겨놓고 해공 스님이 고구려인 집성촌 꼭대기에 거처로 정한 암자로 갔다.

“스님, 이렇게 야심한 밤에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홀한성으로 떠날 때가 되어서 문안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냥 떠나지 예까지 어인 발걸음이야? 야수이가 오래 머물 것 같더냐?”

해공 스님은 마침 대조영을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형형한 눈빛으로 대조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곳에 당나라 장수로 왔으니....”

대조영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 오래 있지는 못할 것이다. 잠시 피해 있다고 생각하고 떠나거라.”

“야수이가 오래 있지 못한다하심은 어떤 연유인지요?”

대조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놈은 이곳 영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특히 손만영이와는 어울리기 힘든 놈이지. 필시 불화가 일어날 것이다. 게다가 부기원이가 설인귀와 손을 잡고 당나라 조정에서 준동을 하고 있으니 그 줄에 설 것이다. 그 놈은 출세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린이가 그 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그 놈은 제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해공 스님은 넌지시 대조영을 바라보았다.

“초린이 야수이를 정녕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초린의 마음속에는 자네뿐일세.”

대조영은 해공 스님과 하직 인사를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스님은 멀리 암자에 계시면서도 세상일을 다 내다보고 계시네요.”

미추홀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그러기에 도를 통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대조영은 날이 밝기 전에 일행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걸사비우는 100여 기의 기병을 데리고 대조영 일행을 호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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